[광화문에서/유윤종]자신에게 속은 사람들

  • 입력 2007년 9월 20일 20시 36분


얼굴이 닿을 듯한 두 사람의 표정은 무척 정겨워 보인다. 19일자 본보 A19면에 실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아소 다로 자민당 간사장의 사진이다.

그러나 취임 초기에 찍힌 이 사진의 분위기와 달리 최근 퇴임을 결정한 아베 총리는 ‘아소에게 속았다’며 극심한 배신감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참의원 선거 패배로 위기에 처한 아베를 아소가 부추겨 정권을 놓지 않도록 만들었고, 스스로는 차기 총리가 되기 위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인류가 상대방을 응시하는 눈동자와 집단생활의 특성을 갖게 된 다음부터 기만(欺瞞)은 우리의 종(種)과 유구한 역사를 함께했다.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라면 달라야 한다? 영장류 학자들은 권력 서열의 정점 주변에서 기만이 가장 횡행한다고 보고한다.

“지금까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번에는 판단에 대한 자신이 무너졌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심경의 일단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깜도 안 되는 의혹” “소설 같다”고 말해 오지 않았던가. 그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최근 ‘공상허언증’이라는 낯선 병명이 화제가 됐다. 신정아 씨가 남 앞에서 자신을 과대 포장해 온 데는 자신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려는 심적 기제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창작한 이력을 문자 그대로 믿어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거 아니잖아’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도록 꾹꾹 눌러 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허상(虛像)성 기억 조작’이라는 말도 썼다.

그러나 이 같은 심적 상태가 병리적 상황에 처한 특정인들만의 것은 아니다. 누구든지 편해지기 위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누르려 하는 경향이 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면역학자 피터 메더워의 말을 빌려 한 말처럼, ‘남들을 속이기 전에 자신을 속이는 엄청난 수고’는 때로 용서받기 힘든 죄가 된다.

총선에서 참패한 아베의 마음속에 ‘자리를 정리할 때’라는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런 목소리를 애써 누름으로써 능동적으로 아소에게 속았을 것이다. “나를 도와 온 아소가 자리를 내놓지 말라는데 괜찮은 거지 뭘….”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의 의혹에 관한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의 생각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단지 보수 언론들의 모함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늘 나와 동지들을 흔들어 오지 않았던가. ‘내 편’의 얘기는 항상 그들에게 불필요하게 흘러나가 왜곡됐고, 그런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기자들이 관가를 들쑤시지 못하도록 조치하지 않았던가….

성철 스님은 생전에 자신을 찾아오는 불자들에게 부처 앞에서의 ‘3000배(拜)’를 요구했다고 한다. 절하느라 진이 빠진 상대방이 ‘이제 진리를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그의 말은 짧고도 한결같았다고 한다. “쏙이지 말그래이.”

누구를 속이지 말라는 것일까. 성철 스님의 말이 가진 핵심은 그가 종종 썼던 휘호에 나타나 있다. 필자가 앉아 있는 편집국 한쪽에도 그 휘호의 복사본이 붙어 있다. ‘불기자심(不欺自心).’ 그가 경계한 것은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일이었다.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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