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文明에의 예의

  • 입력 2007년 7월 26일 20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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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새천년의 첫 성탄절을 맞아 들뜬 2000년 12월 중순, 나는 성지 예루살렘에 있었다. 새 밀레니엄을 맞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를 찬양하는 성탄절 풍경을 취재하러 간 게 아니었다.

예수 탄생 2000년을 맞았지만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그해 9월 시작된 ‘팔레스타인 2차 봉기’로 곳곳에서 유혈 사태가 번지고 있었다. 그런 긴장의 현장에서 ‘13억 이슬람과의 대화’를 주제로 문명 간 화해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재 출장이었다.

불과 1km² 남짓한 땅에 수십억 명의 기독교도와 무슬림(이슬람교도), 수천만 명의 유대교인 성지가 밀집한 동예루살렘의 공기는 무거웠다. 때마침 이슬람 휴일인 금요일을 맞아 수천 명의 무슬림이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 내 ‘성전산(Temple Mount)’의 알 아크사 사원에 가려고 몰렸다. 이스라엘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자 이들은 발을 구르며 쇳소리 섞인 야유를 보냈다. 어디서 돌멩이라도 하나 날아들면 금방 참극이 벌어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성스러운 이미지는 그렇게 깨졌다.

다음 날 찾은 예수 탄생지 베들레헴. 그곳도 말구유의 아기 예수, 동방박사의 찬양 같은 평화와 축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베들레헴이 무슬림(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치하에 있다는 사실에 ‘환상’이 깨졌다. 한 한국인 선교사는 전날 인근의 유대인 정착촌 질로와 팔레스타인 도시 벳잘라 사이의 총격이 베들레헴의 밤하늘을 뒤덮었다고 했다. 성탄절 축하 폭죽 대신에.

#프랑스 파리는 해마다 이맘때면 ‘색깔’이 바뀐다.

파리 시민들은 거의 다 7, 8월 두 달간 휴가를 간다. 드물게 문 여는 상점이나 공공시설에는 아랍·아프리카계 무슬림 이민자들이 대신 일한다. ‘불법체류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이민자가 없으면 프랑스 경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 그럼에도 이들을 쳐다보는 파리지앵의 눈은 차갑다.

사실상 거주지역도 구분돼 있다. 파리의 북부가 이들의 ‘게토’에 해당한다. 극우파 인종차별주의자인 장마리 르펜(78) 국민전선(FN) 당수가 2002년 대선 1차 투표에서 17%, 올해 대선 1차 투표에서 10.5%를 득표한 것도 이민에 대한 반감 덕이다.

타인종, 타문화에 대한 ‘톨레랑스(관용)’는 이미 옛날 얘기다. 파리 특파원 시절 가깝게 지냈던 프랑스 대학생은 “톨레랑스는 사회당 정부가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5년 가을 파리 근교의 이민자 폭동은 세계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에서도 문명 간 화해가 얼마나 힘든지를 웅변한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는 문명 간 충돌이나 화해의 문제가 이스라엘이나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2007년 7월 한국의 문제라는 점을 똑똑히 보여 준다. 멀고 먼 문명 간 화해의 출발점은 다른 문명이나 종교를 그대로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 ‘예의’일 것이다.

프랑스 생활 초기 건물 출입문에 들고날 때 처음 보는 앞 사람이 열린 문을 잡고 뒷사람이 들어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의아했다. 불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3년 뒤 귀국해서는 앞사람이 그냥 문을 닫고 들어가는 바람에 놀란 일이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잠깐만, 아주 잠깐만 열린 문을 잡고 기다려주는 게 아닐까 싶다. 뒷사람이 아시안이든, 흑인이든, 무슬림이든….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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