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손학규의 길

  • 입력 2007년 3월 23일 19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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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는 중도(中道)란 이변비중(離邊非中)이라고 했다. 양극단을 떠나되 가운데는 아니라는 것이다. 월간 ‘신동아’(2007년 3월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총과 민노총, 조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갈등이 큽니다. 이런 문제를 화해와 상생의 방향으로 부드럽게 해결할 방안이 없는지 따지는 게 중도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도 중도의 원리가 적용돼야 해요. 당근과 채찍이 다 필요해요.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더라도 핵 문제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때렸어야 해요. 왜 그것을 병행하지 못해요? 칠 때는 쳐야지. 그게 중도입니다. 가운데 길로 가면서 적당히 타협하는 게 중도가 아니에요.”

중도는 중심이다

소설가 황석영은 좌우의 중간이 아닌 ‘핵심을 찌르는 것’이 중도라고 말한다. 즉 사회나 생명체나 둥그런 공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핵심을 찌르는 것이 중도라는 것이다(‘경향신문’ 2007년 1월 23일자 인터뷰).

“중도 중용(中庸)이라고 할 때 그 가치는 정확성이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둥근 공 같은 세계를 이뤄 내는 것이다. 각자 역할을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중지(衆智)를 모으면 중도가 가능하다.”

이 말은 난해(難解)하다.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의 말까지 인용해야 할 듯싶다.

“혁명이 아닌 개혁이란 것은 합리적 보수의 숫자를 늘려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도적 사람이 많아져야 과거 상처를 치유하고 선진적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상식이 이끌어 가는 사회, 안정적이고 튼실한 사회가 돼야 한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한나라당 탈당(脫黨)이 ‘김지하 황석영의 중도론’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일부 언론에서는 두 사람이 손 씨의 탈당을 권유했다는 설(說)을 보도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낡은 수구와 무능한 좌파의 질곡’을 깨기 위해 중도통합의 길을 선택했다는 손 씨의 탈당 선언과 제3의 세력화를 위해 ‘바람잡이’를 할 수 있다는 황 씨의 최근 발언 등에서 일련의 맥은 짚어 볼 수 있다.

중도는 양다리 걸치기식 중립이 아니다. 실패한 수구 좌파나 맹목적 수구 우파가 자신들의 정체를 호도하기 위해 숨어드는 중간지대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도에 뚜렷한 이념적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좌우 극단보다 중도의 가치를 지켜 내는 일이 훨씬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더구나 세상이 극단으로 분열될수록 중도는 존립하기 힘들다. 기회주의자나 회색분자로 매도되거나 목소리 큰 자들에게 밀려 침묵하게 된다.

그러나 좌우로 흔들리던 시계추가 가운데에 머물듯이 결국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중심(中心)으로서의 중도’다.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는 일정불변(一定不變)이 아니다. 변화하는 가치에서 ‘핵심을 찌르는’ 기준은 그 시대 사회공동체의 보편적 가치인 상식이다. 중도의 힘은 상식에 있다.

예컨대 개방으로 파이를 키워야 분배도 가능한 한국 경제의 현실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불가피하다. 물론 FTA에는 득실(得失)이 따른다. 뚜렷한 대안도 없이 손실을 과장해 ‘FTA 저지’를 외치면 진보이고, 찬성하면 보수인가? 이런 소모적 다툼은 끝내야 한다. FTA로 얻는 이익이 손실을 보는 부문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으로 대외(對外)개방과 대내(對內)복지가 선순환(善循環)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고 중도의 논리다.

‘非盧反한나라당’ 넘어서야

중도의 힘은 균형감각 있는 책임감에 있다. 그것은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손 전 지사는 그가 내세우는 중도통합의 동력(動力)을 스스로 훼손했다. 그동안의 말을 바꾼 탈당의 변(辯)도 그렇지만 십수 년간 몸담아 온 당을 ‘낡은 수구’로 매도한 것은 논리를 떠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손 씨는 “내가 무엇이 되는지를 보지 말고 내가 무엇을 하는가를 지켜봐 달라”고 한다. 그가 권력에 연연한 ‘보따리장수’인지, 중도통합에 ‘한 알의 밀알’이 될 것인지는 앞으로 그가 걷는 길에 달려 있다. ‘비(非)노무현 반(反)한나라당’에 매달리는 좁은 안목의 중도라면 그를 오래 지켜볼 일은 없을 것이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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