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선친의 문집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한문 실력이지만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학자(漢學者)들의 번역 덕분이다. 날로 발전하는 일본 중국 대만을 자주 방문해 한자를 중심으로 한 그 나라들의 학문과 문명을 보며 늘 생각하는 것은 우리도 오래 간직해 온 지식과 지혜의 보고(寶庫)가 있다는 점이고, 이를 통해 국민의 눈을 뜨게 하고, 한국 문명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일이다. 바로 우리 고전의 번역을 국가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번역 안된 채 방치된 지혜의 보고
이 일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선각자들이 고군분투하며 많은 일을 해 놓았다. 목은, 포은, 퇴계, 율곡, 고봉, 다산, 연암, 성호 선생의 글들을 번역하고, 방대한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일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국가가 한 것이 아니라 민족문화추진회라는 민간단체가 주도해 왔다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이 국역되면서 조선시대의 일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접근하게 되었고, 우리 역사와 선조들의 일을 폄훼하던 패배주의 역사관도 극복되고 있다. 요사이는 이런 실록에서 영화, 연극, 문학의 소재를 발굴하기도 하고, 대학 속에 갇혀 있던 역사 연구가 생활 속의 열린 공간으로 나오고 있다. 이덕일과 이한우가 발굴하고 풀어 내는 역사 이야기는 폐쇄적인 교수 중심의 역사 논의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 모든 것도 원전의 번역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인데, 그간 우리 고전에 대한 번역 상황을 보면 실로 안타깝다. 개개인의 부업 수준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불안정한 국가보조금에 의존해 그때그때 연명하는 식으로 일거리를 따오기도 한다. 번역 자체에 급급해 질적 평가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점차 줄어드는 한학자들을 이을 전문 번역가는 양성되지 않고 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40년 동안 애국심 하나로 이런 일을 해 왔지만, 민간단체가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사업을 더 추진하기는 역부족이다.
방대한 고전의 올바른 번역 작업은 체계적인 시스템과 인프라의 구축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많은 판본 중에 번역 대상으로 삼을 가장 잘된 선본(善本)을 정하는 작업, 판본을 교감(校勘)하는 작업, 번역 대상물의 보존, 방대한 번역사업을 체계적으로 기획하고 이를 관리하는 작업, 많은 사람의 번역을 통일하는 작업, 번역 결과에 대한 평가와 후속 작업의 기획,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재번역 작업, 번역 작업의 시스템화, 판본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 등이다. 이런 일들은 그 규모나 성격상 도저히 민간이 감당할 수 없다.
고전번역원 설립 결실 보기를
현재 번역되지 않은 우리의 고전은 6500여 권인데, 종래 방식으로 번역하면 100년 이상 걸릴 뿐 아니라 체계적이지 않으며 후계자의 부족으로 일이 진척되기도 어렵다. 후계자를 양성해야 할 노령의 한학자들이 직접 번역하고 있으니, 씨감자까지 삶아 먹은 다음엔 어떻게 될까.
다행히 현재 열린우리당에서 국가 재정으로 한국고전번역원을 설립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민족문화추진회도 발전적으로 이에 흡수되는 결단을 했다. 더 미룰 수 없는 국가적 사업이기에 여야가 합심해 결실을 보아야 한다. 잘난 조상에 못난 후손이 되지 않기 위하여.
정종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헌법학 jschu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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