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판문점의 봄’

  • 입력 2006년 10월 13일 03시 00분


1992년의 어느 봄날 나는 군사분계선을 넘고 있었다.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밖의 시멘트로 된 군사분계선 표시 턱을 걸어서 넘으며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반공 교육이 잠재의식에 군사분계선을 넘어서는 안 될 ‘레드 라인’으로 그어 놓았던 것이었을까. 당시 통일원 출입기자로 취재차 판문점을 자주 다녔지만 군사분계선을 넘기는 처음이었다.

무슨 회담인지는 기억 못하지만 그날 남북회담은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리고 있었다.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기사를 송고한 뒤 군사분계선을 넘어 통일각까지 100m 남짓 홀로 걷는 길은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금기의 벽을 처음 넘어가는 길은 고독했고, 그만큼 자유로웠다.

돌이켜보면 1992년은 ‘판문점의 봄’이었다. 남북한은 1991년 12월 ‘남북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을 채택했다. 이 두 합의에 따라 1992년 판문점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회담이 열렸다. 그 회담들을 취재하러 판문점을 오가며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다는 자부를 느끼기도 했다.

‘판문점의 봄’은 1993년 3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당시 76세) 씨의 북송까지 이어졌다. 취재 기자들의 관심은 단연 42년여 만에 북한의 부인과 딸을 만나는 이 씨의 일성(一聲)이었다. 1면 톱기사의 제목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감위 회의실에서 부인과 딸을 상봉한 이 씨는 오열하는 이들을 앞에 두고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고,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중감위를 빠져나가 북측이 마련한 앰뷸런스에 옮겨 탄 뒤에야 안도한 그는 처절한 울음을 터뜨렸다. 40여 년 만에 쏟아져 나오는 듯한 그 울음은 차라리 짐승의 울부짖음이었다. 아, 이념이 뭐기에 한 인간의 일생을 저토록 강렬하게 붙들고 있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판문점의 봄’도 저물어 갔다.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남북 관계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적어도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감행하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다. 남북 간에 다양한 대화 채널이 가동됐고, 무엇보다 북한은 남측을 대화 상대로 인정했다.

사실 ‘판문점의 봄’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에 힘입은 바 크다.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을 거쳐 평양으로 가겠다’며 한소, 한중 수교로 주변 환경을 다진 뒤 남북관계 개선으로 나가는 전략은 주효했다.

반대로 남북관계 개선에 다걸기(올인)하다시피 한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을 지나면서 오히려 남북관계가 퇴보한 것은 아이러니다. “남북 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나머지는 ‘깽판’ 쳐도 괜찮다”고 했던 노 대통령은 남북관계를 위해 한미동맹과 한일관계에 ‘깽판’을 쳤다. 그 결과 결국은 남북관계에서 가장 큰 ‘깽판’을 치게 됐다. 남북관계는 이미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 문제가 됐고, 북한은 애초부터 남측을 상대할 뜻이 없었다는 단순한 현실을 ‘민족공조’라는 이상론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한 탓이다.

1994년 독일 통일 4주년 현장을 취재하며 만났던 독일 정부 관계자의 얘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서독 정부가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면서 가장 공을 들인 쪽은 동독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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