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승웅]고난 속에 핀 꽃, 꼬마 동포

  • 입력 2006년 7월 3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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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꽃밭을 일구다 지난여름 호박꽃의 수술을 따 수박꽃의 암술에 발랐더니 가을에 호박도 아니고 수박도 아닌, 진한 쑥색의 이상한 과일이 생겨났어요. 여러분, 신기하죠?”

미국 디트로이트의 세종한글학교 7학년에 재학 중인 조윤경 양의 설명이다. 지난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재미한글학교협의회(NAKS)가 주최한 ‘나의 꿈 말하기 대회’에 출전한 조 양의 체험기다.

과일을 잘라 먹어 보니 호박과 수박의 중간 맛이었고, 씹어 봤더니 뭉클뭉클하면서도 아삭거렸다. 소녀는 이 과일에 ‘호박멜론’이란 이름을 달아 준다. 20년 후 세계 최고의 유기농 농부가 되는 게 꿈이다.

이 대회에는 뉴질랜드에 사는 여지연(와이카토한글학교 6년) 양이 찬조 출전했다.

“시곗바늘을 2015년, 제가 스물한 살이 되는 해로 빠르게 돌려놓겠습니다. (대학) 졸업 작품전을 열고, 거기서 1등을 한 후 파리로 가서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가 되는 겁니다. 할리우드 스타에게 한국 사람인 제가 만든 옷을 입히는 거예요. 자신 있느냐고요? 걱정 마세요.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이니까요. 친구들, 아자 아자 파이팅!”

꼬마 동포들의 꿈을 현장에서 해몽(?)하다 보니 70년 전, 옛 소련 땅 우수리스크 기차역의 눈보라 치던 장면이 환영(幻影)으로 떠오른다.

“여섯 살 때였어요. 가족과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옮겨지고 있었는데, 기차 안은 화장실도 없었어요. 몇 날 밤을 달려가다 갈대가 많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강제로 내려져, 그곳에서 갈대로 집을 만들어 살았어요. 밤마다 늑대 우는 소리에 무서워 잠을 못 잤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명령으로 고향인 연해주를 떠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끌려갔던 김 나제스타(75) 할머니의 기억이다. 보름 전 재외동포재단 초청으로 서울에 온 해외 유공 동포 26명이 털어놓은 회고담 가운데 일부다.

김 그리고리(79) 할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한다. “(강제 이주 후) 열심히 공부해 타슈켄트 운전학교 교장, 당위원회 재정경제부장이 됐고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가 주는 공로장도 받았다. 세 아들 모두 의과대학을 나와 첫째는 타슈켄트 시 외과병원 원장이고 둘째는 부원장, 셋째는 피부과병원 원장이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인들 거개가 덴버 대회 같은 곳에서 꿈을 미리 말하지 않았을 뿐, 중앙아시아 황량한 사막에서도 보란 듯이 꿈을 펼친 것이다.

귀국하는 기내에서 줄곧 여과(濾過)라는 단어만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자연시간에 배운, ‘자갈-모래-숯-모래-자갈’이라는 식수 마련 과정 말이다. 제일 중요한 몫은 숯이 맡기 마련이다. 숯 역할을 비운의 러시아 동포 할머니 할아버지가 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 동포 꼬마들이 저리 재잘대며 펼쳐 보인 꿈도 알고 보면 숯 덕분이다. 꼬마들의 꿈 잔치는 이를테면 말갛게 걸러진 식수다. 민족 수난사 측면에서 봤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의 수난이 없었던들 꼬마들이 저리 맑고 순수한 꿈을 과연 꿀 수 있었을까.

김승웅 재외동포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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