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1만5000여 명 출산 도운 자연분만 전도사 이복남 할머니

  • 입력 2006년 7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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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독일 병원 분만실 근무를 합쳐 51년 동안 1만5000여 명의 아이를 받은 자연분만 전도사 이복남 할머니는 “온돌방 생활에 익숙한 우리나라 여자들의 골반 유연성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한다. 이종승  기자
25년간 독일 병원 분만실 근무를 합쳐 51년 동안 1만5000여 명의 아이를 받은 자연분만 전도사 이복남 할머니는 “온돌방 생활에 익숙한 우리나라 여자들의 골반 유연성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한다. 이종승 기자
“아이를 받으러 독일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 산모랑 한국 교포 산모랑 나란히 누워 있는 걸 봤지. 독일 산모는 미리 책도 읽고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했는데 한국 산모는 영 아는 게 없더라고. 근데 독일 산모는 소리를 있는 대로 질러 가며 정신이 없는데 한국 산모는 몇 시간 끙끙대더니 쑥 아이를 낳는 거야. 한국서 애를 받을 땐 몰랐지. 아 글쎄, 한국 여자들이 애를 낳는 데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고 있는 거야.”

‘자연분만 전도사’ 이복남(76) 할머니는 만나자마자 대뜸 한국 여자의 ‘유연한 골반’ 자랑부터 시작했다.

입식 생활에 익숙한 서양 산모들은 골반이 굳어있기 때문에 임신하면 따로 골반운동을 해야 하지만 한국 산모들은 ‘온돌방 생활’로 골반이 유연하기 때문에 자연분만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가 1958년 조산원을 개업한 뒤 받은 아이는 20여 개국 1만5000여 명. 1972년 독일로 건너가 25년간 독일 병원에서도 아이를 받았으니 분만에 관한 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인 셈이다.

그는 적십자 완장을 차고 있으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2년제 간호학교에 들어간 것이 산파(産婆)로 접어든 계기였다고 한다. 그는 기술도 노련했지만 부잣집 가난한 집을 가리지 않고 애를 받다 보니 전북 전주에서 이름을 날렸다.

이 할머니는 1970년대 초 독일에서 간호사를 뽑는다는 말을 듣고 선진 분만 기술을 익히고 싶다는 ‘당찬’ 생각에 물설고 낯선 땅으로 간다.

“17개월 된 막내딸을 두고 남편한테 ‘몇 달만 참으라’고 하고 비행기를 탔지 뭔가. 그렇게 훌쩍 5년이 흐르니까 기다리다 못한 남편이 애를 들쳐 업고 독일로 왔지.”(웃음)

독일서도 난산(難産)은 늘 ‘프라우(Frau·영어로 미시즈) 리’ 몫이었다. 어떤 땐 산모 배 모양만 보고 태아의 성별을 맞혀 독일인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할머니에게 선진 독일의 사회보장제도는 ‘이런 천국 같은 세상이 있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중에서도 애 낳는 여자에 대한 지원이 제일 부러웠다.

“1980년대부터 독일도 저출산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에 출산장려금까지 더해지고 산전산후 보호까지 있으니 완벽한 사회처럼 보였지.”

독일 생활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있던 이 할머니가 어느 날 퇴근 뒤 집에서 집어든 한국 신문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제왕절개 세계 1위’

이 할머니는 기사 제목을 보는 순간 털썩 주저앉았다고 한다. 서양 여자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연분만을 하겠다는 판인데, ‘유연한 골반’을 가진 한국 산모들이 제왕절개를, 그것도 세계에서 제일 많이 한다는 소식에 통탄했다.

그는 귀국을 결심했다.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젊은 엄마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1996년 귀국한 그는 고향 근처인 전북 정읍에 터를 잡고 전국의 병의원을 다니며 자연분만 전도사로 변신했다. 이번에 낸 책 ‘이복남의 자연분만은 아름다워라’(글을읽다 간)는 그 결정판이다.

그가 말하는 순산의 비결은 무엇일까. 이 할머니는 “분만 역시 ‘마음의 문제’”라고 말했다.

“산통이 올 때 어미의 입장이 아닌 아이의 입장이 되도록 평소 훈련해야 한다. ‘아이야. 이 좁은 길(산도)을 혼자 내려오려니 얼마나 힘들겠느냐. 이 어미가 도와줄 테니 겁내지 말거라’는 느긋한 마음으로 산통을 받아들이면 어미의 몸이 이완되어 아기를 빨리 내려가게 한다.”

이 할머니의 자연분만 비법은 복식호흡과 산모의 마음을 다스려 주는 끊임없는 대화.

이 할머니는 1남 3녀를 자연분만했으며 첫아들을 빼고 세 딸을 혼자 힘으로 낳았다. 그는 “임신 중 노력 여하에 따라 무통분만까지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숱한 출산을 도운 할머니에게 저출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물었다. 뜻밖에도 ‘미혼모에 대한 배려’를 첫손으로 꼽았다. 한 해 150만∼200만 건이란 낙태만 없어도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할머니는 “미혼모들이 남의 눈치 안 보고 자기 성(姓)에 입적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들에게 생활고가 있다면 지원해 줘야 한다”며 “일하는 여성들이 아이를 가질 경우 업무까지 조정해 주는 선진국의 여성 사회복지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자들을 단지 애 낳는 기계로 보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이 할머니는 “여자에게 출산을 인생 최고의 행복한 경험이 되도록 만들면 남자들도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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