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노무현과 마르쿠스

  • 입력 2006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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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들어 노무현 대통령의 말수가 줄었다. 청와대에서는 북한 미사일 발사 이후의 ‘전략적 침묵’이라는데, 그렇다면 그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다.

노 대통령은 한미동맹과 한일공조를 뿌리째 흔들고, 믿었던 중국이 대북 제재에 찬성하는 상황에서도 입을 다물고 북한을 감쌌다. 그런데도 북한은 19일 이산가족 상봉 중단을 선언했다. 사실상의 ‘이혼’ 통보다.

지난달만 해도 노 대통령은 정말 말을 많이 했다. 12일 포털사이트 대표와의 오찬, 16일 군 주요 지휘관 회의, 25일 6·25전쟁 참전용사 위로연 등에서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특유의 ‘역사 강의’를 풀어놓았다.

“세종은 성군이었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정조 때 반짝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까 지지세력이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은 정도전이다….”

6월 9일 ‘6월 민주항쟁’ 주도 재야인사와의 만찬, 13일 국무회의에서는 “정치와 경제에서 소비자 주권이 실현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며 ‘소비자 주권’ 강의에 열중했다.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문제는 학생 훈육용이나 술자리 여담으로 적당한 얘기를 공석에서 길게, 그것도 대통령이 하는 데 있다.

국민이, 납세자가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역사와 철학 강의가 아니다. 그럴 시간에 한국의 현재를 고민하고 미래를 구상해 손에 잡히는 정책을 말해 주길 원한다.

더구나 대통령의 강의를 직접 듣는 사람은 대부분 중장년의 엘리트이다. 일반 강사가 아닌 대통령이 자신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주입하는 것은 일종의 ‘양심의 자유’ 침해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이번 달 노 대통령의 ‘전략적 침묵’은 11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만찬에서 깨졌다. 그런데 주 비판대상이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이 아니라 일본과 미국이었다.

일본에 “물러서려야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고, 미국에는 ‘선참후계(先斬後啓·군율을 어긴 자를 먼저 처형한 다음 임금에게 아룀)’라고 훈계했다.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도 미일 등의 ‘과도한 대응’을 경계했다.

침묵하다 단문으로 던지는 노 대통령의 외교 화법은 한미일 공조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노 대통령이 정작 해야 할 강의는 당면한 외교 현안에 대한 깊은 이해와 효율적인 대책이 아닐까.

로마제국 ‘5현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후세 사가들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꼽는 이유는 ‘명상록(暝想錄)’을 남긴 ‘철인(哲人)황제’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19년의 재위기간 대부분을 게르마니아 전선 등 전장에서 보내면서 제국의 안전을 지키고 내치(內治)를 다졌다. 삶과 죽음, 역사와 철학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명상록’은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 야전 텐트에서 탄생한 것이다.

마르쿠스 황제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지도자는 말보다 치적으로 평가된다. 개인적인 사유의 세계를 드러내고 싶다면 촌음이 아까운 국정의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자기만의 시간에 글로 남기면 된다. 철학자인 마르쿠스 황제가 숨을 거둔 곳은 로마시대 야만족인 게르만과 맞붙은 최전선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의 차가운 겨울 숙영지였다.

박제균 정치부 차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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