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정호]‘빨리빨리’가 가져다준 풍요

  • 입력 2006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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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는 한국인의 큰 장점이다. 기다리는 것을 빨리 갖다 주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는 세계인들에게 누구보다 앞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할 수 있었다. 우리의 건설업이 사막에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이 선점하고 있던 세계의 전자제품 시장을 가져온 것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해져 있는 ‘빨리빨리’ 덕이 크다.

빛에 그림자가 따르듯 ‘빨리빨리’에는 ‘대충대충’이라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결과 부실공사, 불량제품 같은 오명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제 한국인은 ‘빨리빨리’와 ‘철저함’을 동시에 이루는 경지에 접근했다. 품질과 가격 모두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제품들이 이 땅에서 여럿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런데 빠름은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본래 모습은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느릿느릿 걷는 것이 양반이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지배층의 모습은 여유였다. 독립신문은 지금부터 108년 전인 1898년 3월 3일자 사설에서 조선인의 90%가 일 안 하고 빈둥거리고 있다(遊衣遊食)고 개탄했다. 과장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게으르다는 지적이다. 1894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조선인의 모습을 가난과 나태와 우울함으로 묘사한다. 우리의 예전 모습은 게으름과 느림이었나 싶기도 하다.

필자 생각에 그런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착취 구조였다. 백성들이 헛간에 식량이라도 조금 쌓아 놓을라치면 양반과 벼슬아치들이 반드시 앗아가곤 했다. 먹을 것이 없는데도 일하지 않는 당시의 한 조선 농민에게 영국 데일리 메일의 매킨지 특파원이 이유를 물었다. “내가 왜 일해야 하죠? 그래 봤자, 원님 좋은 일만 시킬 텐데.” 이것이 답이었다. 입에 풀칠할 만큼만 일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조상들에게는 합리적 선택이었고, 그것은 바로 게으름을 뜻했다.

사람들이 부지런해지고, 빨라지기 시작한 것은 일해서 저축해도 더는 빼앗기지 않고 자기 것이 된다는 확신이 들면서부터다. 눈앞에 잘살 수 있는 기회, 돈 벌 수 있는 기회가 보이는데, 게으름을 피우고 앉아만 있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분질서의 붕괴와 더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무원들에 대한 서정쇄신 작업과 부정부패 척결 운동, 대통령 자신의 소박한 생활 태도 같은 것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런 것들이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에게 백성들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강력히 전달했다. 그리고 뿌린 대로 거둘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빨리빨리 뿌리고 거두었다. 그 결과 한국인도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사정은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만만디(慢慢的)가 중국인의 속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큰 나라 사람들이라서 역시 크게 보고 천천히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해였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으로 실질적인 사유재산제를 도입한 이후 중국인의 성격은 만만디에서 콰이콰이(快快·빨리빨리)로 변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택시를 타면 어찌나 빨리 차를 모는지, 오금이 저려서 앉아 있기 힘들 정도다. 과거에 그들이 만만디였던 것은 큰 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부지런을 떨어도 그 결과가 자기 것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으르던 일본인들이 부지런해진 것도 1867년의 메이지유신으로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의 착취가 사라지면서부터였다.

중동 사람들이 즐겨 입에 담는 인샬라(신의 뜻대로), 터키인의 수하힐리(천천히), 필리핀의 마나냐(내일)는 모두 여유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뿌린 대로 거둘 수 있음이 보장된다면 한국과 일본과 중국 사람들처럼 빠르고 부지런한 성격으로 변해 갈 것 같다. 생활 형편도 좋아질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겠지만….

이처럼 제도는 민족성을 만든다. 지금이라도 뿌린 것을 대부분 정부가 거두어 가거나 또는 원치 않는 다른 사람과 강제로 나누어야 한다면, 한국인들은 더는 빨리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고 성장은 지체될 것이다. 우리의 민족성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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