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하준우]卵子광고하는 사회

  • 입력 2005년 11월 19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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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결 좋습니다. 아기 피부라고 다들 부러워합니다. 너는 고칠 곳이 없는 자연미인이라고 말합니다.”

“운동하는 것도 좋아하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1등급에 상위 4% 안에 들었고요. 부모님 모두 어릴 적에 수재 소리 들으셨고….”

입사지원서나 자기소개서의 한 대목이 아니다. 국내에서 100여 개나 성업(?) 중이라는 난자 매매나 대리모용 인터넷 동호회(카페)에 들어가 보면 이 같은 ‘선전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난자 매매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1999년에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신문에 ‘키 178cm, 수학능력시험 1400점 이상인 건강한 여성의 난자를 5만 달러에 구함’이란 광고가 버젓이 실렸다. 또 같은 해 웹사이트에 모델 8명의 사진 나이 직업 등을 공개하고 난자 경매에 나선 한 사진작가는 “난자 제공이 계속된다면 다음 세기에는 좀 더 나은 자손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난자 매매의 마케팅은 ‘좋은 난자+좋은 정자=경쟁력을 지닌 우수한 자손’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뿌리내리고 있는 듯하다. 이 같은 인식은 19세기 말에 등장한 우생학(eugenics)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우생학의 창시자인 프랜시스 골턴은 1869년 ‘유전성의 천재’라는 책에서 “사회 저명인사는 대부분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고 주장하며 “유전은 신체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개인의 재능과 성격도 결정한다”고 단언했다.

우생학은 인종을 개량한다는 사회운동으로 번져 인류 사회에 재앙을 가져 왔다. 저능아, 정신병자, 범죄자, 알코올 의존증 환자, 신체허약자, 정신병자 등의 생식 능력을 빼앗으려는 무시무시한 법들이 등장한 것이다. 1920년대에 미국에선 절반에 가까운 주들이 강제불임법을 만들었다. 독일은 나치시대에 유색인종 35만 명의 생식 능력을 제거했다. 캐나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에서도 모든 사회적 현상을 유전 탓으로 돌리려는 풍조가 번져 거세법이 제정됐다.

난자 매매가 우생학과 같은 재앙을 불러온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우생학은 권력의 개입에 의해 인종을 개량하려는 강제성과 결부되어 있지만 난자 매매는 ‘개인적인 결정’이어서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또 “이왕이면 똑똑한 아이를 낳고 싶다”는 불임부부의 소망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난자 매매에 깃든 우리의 인식을 되짚어 볼 필요는 있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부모가 원하는 ‘슈퍼 베이비’가 곧 태어날 수 있다지만 유전자 결합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긴 힘들다. 서울대 최재천(생물학) 교수는 “한 집안의 자식들도 모두 다르다. 하버드대생의 난자를 받았다고 지적 능력이 높은 아이가 태어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난자와 정자의 열성(劣性) 유전자 결합은 똑똑한 아이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를 배반한 ‘개인적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유전공학의 확률을 계산하기 이전에 난자 매매가 윤리적으로 옳은지도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신성한 생명의 원천을 사고파는 일은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난자 매매를 불법화하지 않은 미국에서도 난자 매매의 윤리성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난자 매매 마케팅을 위한 선전문구가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다.

하준우 사회부 차장 ha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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