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주영]소버린은 다 챙기고 떠났지만…

  • 입력 2005년 8월 26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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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화제와 논쟁을 몰고 다녔던 ‘소버린’이 한국을 떠났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인 SK㈜의 최대주주로 전격 등장해 모두를 놀라게 한 지 약 2년 4개월 만이다. 아주 떠난 것인지, 일시적으로 떠난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간 한국 투자에 앞장 선 최고경영자(CEO)가 교체된 것을 보면 일시적인 것은 아닌 듯싶다.

소버린은 SK㈜에 대한 투자를 통해 8000여억 원을 벌었고 LG에 대한 투자에서는 500억여 원 손해 보아 모두 7500억 원 정도의 차익을 남겼다고 한다. 소버린에 대한 평가는 ‘단기 차익만 노리는 투기적 외국 자본’에서 ‘한국 기업지배구조 선진화의 첨병’에 이르기까지 극에서 극을 달린다. 과연 ‘소버린’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간 것일까?

‘SK㈜의 낙후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소버린인 만큼 과연 소버린이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차분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소버린이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그다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소버린이 SK㈜라는 개별기업의 지배구조 개혁에 도화선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SK㈜는 소버린의 등장 이후 이사회 내 사외이사 비율을 70%로 끌어올리는 등 경영투명성 강화에 나섰고 이사회 내에 투명경영위원회, 전략위원회 등 4개 전문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이사회 중심 경영도 강화했다. SK㈜ 직원들이 선정한 ‘2004년의 10대 뉴스’에서 ‘사상 유례 없는 1조6000억 원대의 당기순이익 달성’(2위)을 제치고 ‘이사회 중심의 투명경영’이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덕분에 주가가 5배 이상 올라 기업가치가 1조2000억 원에서 6조3000억 원으로 커졌다. 이 혜택은 소버린뿐만 아니라 SK㈜의 모든 주주와 SK㈜ 자체도 함께 향유했다.

하지만 나라 전체로 보면 오히려 소버린 사태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 개혁 작업에 상당한 타격이 가해진 측면이 크다. 소버린이 불과 1800억 원의 자금으로 SK㈜의 최대주주가 되고 SK그룹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서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 논쟁, 자본의 국적성 논쟁이 불거졌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공개매수기간 신주 발행 금지의 철폐, 대량보유신고제도(5%룰)의 개정 등 경영권을 보호하는 법 개정이 이어졌다. 총액출자제한제의 축소, 집단소송제의 유예나 과거 분식회계에 대한 감리유예 방침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보호조치는 기업 경영진의 책임성을 떨어뜨릴 수 있고, 기업과 기업인의 책임을 경감시켜 주기 위한 과거분식에 대한 감리유예조치가 회계 투명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히려 제도 면으로 볼 때는 소버린 사태가 한국 기업지배구조제도의 쇠퇴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국내 대기업도 경영진이 배임이나 횡령 등 이른바 지배구조 스캔들에 휘말리면 외부 주주의 간섭과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었다는 점, 흩어진 소액주주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또한 사모투자펀드 관련법의 통과 등 국내 투자자들의 기관화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소버린 사태로 인해 이른바 관계투자 (relational investment), 즉 경영권 획득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투자 대상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인 감시 역할을 하면서 장기투자를 하는 투자 행태도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소버린은 떠났지만 우리는 남았다. 옆에 살던 껄끄러운 이웃도 눈에 안 보이면 허전한 법인데 불청객처럼 불시에 찾아온 소버린이 왔던 모습 그대로 떠나는 모습은 무언가 씁쓸하다. 이제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웠던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우리의 모습을 점검할 때이다.

우리 기업들이 내부 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비리와 불신에 얼룩져 헐값에 거래되는 일이 더는 발생하지 않고,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무관심하고 피동적인 투자자에 머물지 말고 기업 투명성 제고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 상생하는 쪽으로 소버린이 남긴 빈자리가 채워졌으면 한다.

김주영 변호사·법무법인 한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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