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헌기]인천상륙은 건국史의 일부다

  • 입력 2005년 6월 27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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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15일 6·25전쟁이 발발한 지 80일 만에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3년여에 걸친 전쟁 중에 있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작전의 한 사례로 보아서는 안 될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 건국사의 한 장이며 그 성공으로 대한민국이 존립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작전 자체는 상륙작전에 부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한 북한 인민군이 방어력을 집중하지 않아 쉽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서울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15일에 상륙하여 서울을 완전 탈환한 28일까지 13일이 걸린 것만 보아도 당시 전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북한도 인천상륙으로 시작한 이 공세를 막지 못하면 자신들의 존립이 어려우리라는 것을 알고 치열하게 맞섰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여기서 패퇴하였고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으며 기습남침으로 시작한 한반도 적화 음모는 실패하였다. 또 지휘체계가 무너져 버린 인민군이 패퇴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양민학살 등의 만행은 뒤에 6·25전쟁에 참가한 중공군 측에서조차 “잔학행위가 심하여 인민군은 인민의 지지를 완전히 잃었다”고 개탄할 만큼 극심하여 이 증오는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민족의 장애로 남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건국사의 일부로 보는 것은 당시 대한민국이 유엔의 지원 아래 탄생된 지 2년밖에 안 되는 신생국이며, 이 건국을 부인하려는 북한이 계획적으로 벌인 남침전쟁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즉 대한민국의 존립 자체가 걸린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란 가정을 전제로 논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했던 많은 신생국이 내전이나 이념 분규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대한민국이 없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비록 미군이 주축이었지만 16개 회원국이 참여한 유엔군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집단안전보장 체제가 처음 성공한 사례라는 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유엔군의 성공적인 구성과 활동을 통해 약소국도 힘에 의해 함부로 병탄되거나 정치체제를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국제정치 무대에 정립되었으며, 이 원칙은 이 작전의 성공을 통해 힘으로 구현됐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인 평화기구로 구성된 국제연맹이 강대국들의 침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결국 2차 세계대전을 치르게 되었던 것과는 달리 유엔은 힘을 통해 평화를 보장하는 기구가 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천상륙기념사업회’가 24일 발기인총회를 가졌다. 민족의 공조가 강조되고 통일이 거론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적 전쟁 체험을 되새기는 것은 남북의 증오를 심화시키거나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려는 의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한다. 건국사의 일부인 인천상륙작전을 온 국민에게 올바로 알리는 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에 속하는 일로, 우리가 이를 가르치거나 널리 알리는 데 그동안 너무 게을렀다는 점을 반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의 공조나 남북 간의 화해도 역사적인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는 기초 위에 설 때만 튼튼해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아직도 남침한 사실을 사과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시인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 보니 피해자인 우리는 설혹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역사에 대한 기억만큼은 제대로 하자는 말이다. 그리고 이 기억을 지니고서라도 불쌍한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이헌기 인천상륙기념사업회 발기인 대표 전 노동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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