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1년 이란 美대사관 인질 석방

  • 입력 2005년 1월 19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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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이란 영공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1981년 1월 20일 52명의 미국인을 태운 테헤란발 미국행 항공기에서 이런 기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승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들은 500여 명의 이란 학생들에 의해 444일 동안 인질로 잡혀 있다가 석방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직원들이었다. 독일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마치 승전 군인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란 미대사관 인질 사태(1979년 11월 4일∼1981년 1월 20일)는 60, 70년대 형성된 중동권 반미주의가 미국에 직접 도전장을 던진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시 뜨거웠던 이슬람혁명의 열기 속에서 이란 과격파 학생들은 미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으로 도망간 팔레비 국왕의 송환을 요구했다.

사건은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미국과 이란 모두에 큰 상처를 남겼다. 미국은 대중동권 외교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은 인질 구출을 위한 극비 군사작전을 감행했으나 미군 헬리콥터는 대사관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이란 사막지대에 추락해 망신을 샀다. 이 인질사태 이후 미국의 재외공관은 테러 공격의 단골 타깃이 됐다.

얻은 것이 없기는 이란도 마찬가지였다. 인질범들은 1980년 팔레비 국왕이 사망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는 등 나라 사정이 뒤숭숭해지자 별다른 성과도 없이 인질들을 풀어줬다. 인질사태 직후 가해진 미국의 전면적 경제제재로 이란 경제는 20년 넘게 후퇴를 거듭했다.

테헤란 시내에는 아직 빈 미대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란인들은 여전히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미국 타도’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훨씬 작아졌다. 1997년 취임한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 대통령은 미국을 공개적으로 칭찬하며 외교 재개를 모색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은 학생들이다. 25년 전 대미 항전 의지를 불살랐던 학생들이 이제는 미국과의 화해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변모했다. 반미주의를 지지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권력층에 반기를 든 이들은 독자노선을 포기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변신을 과연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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