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자거라, 네 슬픔아'…사진속으로 시간여행

  • 입력 2003년 12월 26일 17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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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거라, 네 슬픔아/신경숙 글 구본창 사진/252쪽 1만원 현대문학

한 장의 사진이 때로는 문이 된다. 소설가 신경숙(40)이 사진작가 구본창(50)의 사진을 통해 다른 시간으로 넘어갔다.

그 문을 열고 자박자박 걸어 다다른 곳. 거기에는 곱게 접어둔 수의를 꺼내는 어머니, 철길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 개, 서투르게 피아노를 배우는 카페 주인남자, 큰오빠에게 물려받은 나무책상이 있다. 사진은 깊고 고요하며, 추억은 애틋하고 슬프다.

1994년 충남 강경에서의 소박한 정경이 필름에 기록됐다. 세월이 고스란히 흔적을 남겨놓은 거친 나무 선반 위에 흰 고무신과 낡은 수첩이 놓여 있다. 오래 신지 않은 고무신 속에는 흙먼지와 지푸라기가 소복히 쌓여 있다. 성한 곳보다 벗겨진 곳이 많은 표지에 비를 맞았는지 속지가 쭈글쭈글한 수첩. 작가는 이 사진 한 장에서 할머니를 떠올린다.

경북 안동에서 할머니 혼자 살고 있는 민박집에 하룻밤 묵게 된 작가. 주인할머니는 이부자리 까는 방향은 물론 뒷마당에 열린 감을 따먹으라고 일러주느라 쉴 새 없이 방문을 벌컥 열었고, 대청에 앉아 있으면 같은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할머니의 연이은 질문과 말씀이 슬며시 귀찮아져 대답을 빼먹기도 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부엌문을 밀어 보니 할머니가 침침한 바닥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니 할머니는 수저를 놓고 나와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주며 가다가 음료수를 사먹으라고 했다.

‘나도 어차피 세상의 할머니들처럼 언젠가는 할머니가 될 것인데 그때 누군가가 나를 찾아오면 외로워서 앞뒤 맥락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간다고 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부스럭부스럭 1000원짜리를 꺼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작가는 궁궐의 회랑에서 달콤한 오수에 든 남자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아름다움 앞에서 잠들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일으켰던 친구네 집 창밖의 아름드리 은사시나무를 불러본다.

‘돌아볼 수 없는 곳에 누군가를 두고 왔다면 혼자 보게 되는 아름다움 앞에서는 늘 무릎이 푹푹 꺾일 것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는 것을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게 인간인 것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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