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책과 혁명'…佛혁명 불지핀 ‘禁書 베스트셀러’

  • 입력 2003년 12월 19일 17시 18분


코멘트
프랑스 혁명 이후 인쇄 출판의 자유를 얻은 프랑스인들이 인쇄물을 제작 배포하는 모습을 담은 채색 판화.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 독자들은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듯’ 책을 탐독했고 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진제공 도서출판 길

프랑스 혁명 이후 인쇄 출판의 자유를 얻은 프랑스인들이 인쇄물을 제작 배포하는 모습을 담은 채색 판화.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 독자들은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듯’ 책을 탐독했고 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사진제공 도서출판 길

◇책과 혁명/로버트 단턴 지음 주명철 옮김/584쪽 2만8000원 도서출판 길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프랑스 역사학자 다니엘 모르네(1878∼1954)는 명저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18세기 프랑스인은 어떤 책을 읽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러나 미국 프린스턴대 유럽사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18세기 프랑스인은 어떤 금서(禁書)를 읽었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그렇게 하면 18세기 프랑스 문학 전체를 다루는 것보다 범위가 훨씬 줄어들 뿐만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독자의 눈으로 볼 때 불법문학은 근대문학 전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금서의 불법 유통을 감시했던 당대의 공무원 말제르브가 “정부의 공식허가를 받은 책만 읽은 사람은 동시대 사람들보다 거의 100년은 뒤질 것”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저자는 프랑스 국경 가까이에 있던 스위스의 뇌샤텔출판사가 남긴 5만여 통의 주문편지와 장부책을 발굴, 25년간 자료 정리와 해독 끝에 1769년부터 1789년까지 불법 유통된 720종의 금서목록을 뽑아내고 금서들의 유통과정과 이 책들이 여론형성에 끼친 영향을 추적했다.

저자가 꼽은 금서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뒤바리 백작부인에 관한 일화’ ‘방황하는 창녀’ ‘루이 15세의 사생활’ 등 현재는 잊혀진 포르노그래피, 볼테르의 ‘백과사전에 관한 질문’ ‘오를레앙의 처녀’, 올바크의 ‘예수 그리스도의 비판적 역사’ ‘사회체계론’ 등 계몽사상가들의 묵직한 책들이 함께 올라가 있다.

업계에서는 금서를 ‘철학서적’이라는 은어로 불렀고 소매상들은 도매상이나 출판사에 “철학책 3권 주세요”라고 은밀히 주문했다. 가격은 대개 정상 도서의 1.5배에서 2배인 권당 2∼3리브르로 숙련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사볼 수 있는 정도였다.

저자는 금서 베스트셀러 가운데 1위인 ‘2440년’, 2위 ‘뒤바리 백작부인…’, 그리고 15위의 ‘계몽사상가 테레즈’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했다. 메르시에의 ‘2440년’(1771년)은 도덕적 유토피아인 2440년 파리의 모습을 통해 18세기 파리의 타락한 실상을 비판한 작품이다. 작자미상의 ‘뒤바리 백작부인…’(1775년)은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의 애첩이 된 후 베르사유에 입성하는 ‘음탕한 신데렐라’ 이야기. 역시 작자미상인 ‘계몽사상가…’(1748년)는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 테레즈의 성생활을 다룬 포르노그래피다.

이들 ‘철학 서적’의 공통점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시대 정치 종교 등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을 거스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의 불을 지핀 것은 이러한 금서들이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프랑스인에게 군주정에 대항해 봉기하라거나 사회질서를 전복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금서들은 ‘정치적 민담’을 구성해 무절제한 왕과 사악한 대신들을 고발함으로써 군주정의 정통성을 보장해주던 신성함을 한 켜씩 벗겨냈다.

“아무도 프랑스 혁명을 내다보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적 기원은 새로운 체제를 예언하는 과정보다는 앙시앵 레짐의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불법문학보다 더 효과적으로 정통성을 무너뜨린 것은 없었다.”

원제는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 베스트셀러(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 1995년 출간돼 1996년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