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의 대화]최재천/인간은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 입력 2003년 7월 9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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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면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지 186년째 되는 날입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께서 1845년 이맘때, 더 정확히 말해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부터 2년간 홀로 사셨던 월든 호숫가(미국 메사추세츠주) 그 통나무집터에 서 있습니다. 집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고, 지금은 그런 집이 이 자리에 있었노라 가리키는 작은 푯말만이 말없이 서 있습니다.

선생님의 집터를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서너평도 채 되지 않았을 단칸방 작은 집이 서 있던 이 자리는 이제 바람조차 아무런 걸림 없이 스쳐 지나가는 빈 공간이 돼 버렸고, 그저 작은 돌들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누워 있을 뿐입니다. 메추리알 크기의 동그스름한 잿빛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성품처럼 수줍은 듯, 그러나 또렷한 온기가 한 세기 반이라는 세월을 넘어 제 손과 팔의 핏속으로 흘러드는 것만 같습니다. 그 피가 이내 제 심장을 뜨겁게 달굽니다.

홀연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미리 편지지를 준비해오지 않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봅니다. 하지만 이내 저의 불경함을 반성합니다. 자연에 대한 선생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이 신성한 자연보호구역에서 아무렇게나 버려진 종이쪽지라도 찾으려 했던 저의 모자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자연만 오염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젠 우리들의 마음도 많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작나무 한 그루가 흰 살갗을 조금 벗어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선생님처럼 자연의 싱그러움을 감칠 맛 나는 언어로 빚어내던 우리나라 정비석 선생님은 자작나무를 나무 중의 왕이라 일컬었습니다. 저도 자작나무를 특별히 좋아합니다. 지금 저는 그 자작나무 껍질을 조금 뜯어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자작나무에서 못 볼 걸 보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껍질에는 인간이라는 짐승의 앞발이 닿는 모든 곳마다 무지함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의 이름들이 빈틈없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그 중에는 제 동료 한국인의 이름도 또렷하게 적혀 있습니다. 한 세기 반 전에 이미 선생님께서 그토록 명확한 언어로 짚어주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우린 아직도 가슴에 새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연의 가슴팍에 오염의 족적을 새기기 바쁠 따름입니다.

몇 년 전 저의 스승 에드워드 윌슨 교수가 바로 이 자리에서 선생님께 써 보낸 편지를 기억하십니까. 그의 근저 ‘생명의 미래(The Future of Life)’의 서문으로 실린 그 편지에서 윌슨 교수는 한 세기 반 전 선생님께서 그토록 예찬했던 이 지구의 생명들이 얼마나 심각한 절멸의 위기에 놓였는지 조목조목 알려드렸습니다. “제3의 밀레니엄을 맞는 이 지구에 아마겟돈이 밀려오고 있다오. 그런데 예언자들의 말처럼 우주의 소용돌이가 우리 인류를 화염에 몰아넣는 게 아니라오. 지나치게 풍요롭고 독창적인 인간의 본성이 이 행성을 파멸시키고 있는 것이라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인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똑똑하고 독창적일지는 몰라도 결코 현명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의 독창적인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음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제 ‘현명한’ 과학과 기술이 우리를 아마겟돈의 위기에서 구원해야 합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이 지면을 통해 ‘생명과의 대화’를 시작합니다. 저는 ‘월든’과 ‘시민 불복종’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통해 자연과 사회를 향한 선생님의 의지를 읽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우리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의 자만에서 깨어나 ‘호모 심비우스(공생인)’로 거듭나야 한다고 부르짖어왔습니다. 선생님의 집터를 떠나려던 참에 개미 한 마리가 동료의 시체를 나르는 걸 보았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늘 우리를 떠나지만, 또 한편에서는 더 큰 숨을 몰아쉽니다. 선생님의 뒤를 이어 끊임없이 생명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렵니다. 월든 숲 위로 선생님도 보셨던 그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소로 선생님.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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