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김미현/'惡'앞에서 왜 작아지나

  • 입력 2001년 4월 10일 19시 02분


오늘도 나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직선적인 성격 탓에 남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지는 않았나 걱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특히 착해서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서가 아니라 부족한 내 모습이 싫어서일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반성 보다는 후회 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래도 잘못을 알기는 한다는 자기 위로에 빠지면 나의 이기심은 최상급에 이르게 된다.

좀더 심술을 부려보자. 어차피 완전히 이타적인 행위는 불가능할 것 같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이기적인 유전자'만 살아남는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이므로 자연 진화된 것은 무엇이든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명한 이기주의' 필요한 때▼

노력하지 않아도 악해지는데 노력해야 착해지는 것을 보면 이기적인 악이 유전형질임에 반해 이타적인 선은 획득형질이라는 말인가.

최근 번역 출간된 요리후지 가츠히로의 '현명한 이기주의'에 의하면 그런 듯하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므로 이런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위선이다. 그래서 어차피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면 제대로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런 세속적인 도덕관을 위해 저자는 이기주의를 구분한다. 가령 범죄는 즉각적인 만족을 주지만 지연된 기쁨을 주지는 못하는 어리석은 이기주의이다. 반면에 선행은 당장은 괴롭지만 길게 보면 기쁨을 주는 현명한 이기주의가 된다. 때문에 현명하게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적당히 이타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도덕을 뒤집는 '현명한 이기주의'의 부제(副題)는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가치관'이다. 이 책은 포스트모럴리즘 을 통해 '초(超)윤리'를 주장하면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새로운 문학을 주도할 젊은 소설가 김영하에게서도 이런 가치관이 엿보인다. 담배처럼 해로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이 소설가는 이렇게 당당히 밝힌다. "사랑할 가치가 있는 조국만 사랑하라. 당신의 분노는 공중전화 박스보다 소중하다.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불우이웃을 도우려는 당신의 삶은 또 얼마나 불우한가."(하이텔 연재소설 '악의 꽃')

더 이상 무조건 선한 '선심파'나 무조건 악한 '사기꾼파'가 되어서는 행복할 수 없다. 오히려 상대하기 '나름'의 전략을 구사하는 '나이스(nice)파'가 현명하다. 나이스파는 먼저 속이지는 않지만 속임수를 당하면 반드시 보복한다. 그래서 '원한파'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상대가 다시 성실하게 나오면 용서해준다. 그래야 강해지기 때문이다.

왜 이처럼 불온해 보이는 '현명한 이기주의'를 문제삼는가. 이것을 현재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고 있는 한국과 일본, 중국과 미국의 관계와 연결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다시 극우적 시각에서 왜곡한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켰다. 중국 상공에서는 미군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 사고를 일으켰다. 잘못을 저지른 것은 일본과 미국이다. 그런데 반성할 줄 모르는 이런 사기군파 나라들에 대응하는 한국과 중국의 반응은 너무도 다르다.

중국은 미국에 강경책을 쓰고 있다. 반면 한국은 일본에 유화책을 쓰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겠지만 과연 길게 보아도 중국과는 다른 한국의 대응이 과연 생존력이 강한 행동일까. 오히려 어리석은 이기주의나 맹목적인 이타주의는 아닐 것인가.

▼日역사왜곡 강하게 대응해야▼

너무 악하거나 너무 선하면 악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나 패자만을 양산하기 쉽다.

요리후지의 말처럼 ‘나쁜 짓’이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기보다는 현명하다면 ‘할 필요가 없는 짓’이다. 김영하 소설의 ‘악’도 악이 악다워야 타락한 세상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유죄’의 문학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황폐화’를 초래한다는 오해나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이 ‘현명한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이유이다. ‘약한’ 우리 국민이 현명하게 이기적이지 못하거나 ‘강한’ 우리 정부가 제대로 강하지 못해서 일본이 더욱 더 악해진 것이라면 우리의 잘못도 크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가 실천할 것은 ‘현명하게’ 이기적이 되라는 ‘본능’과 ‘현실’의 목소리는 아닐까.

김미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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