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위대한 유산

  • 입력 2001년 1월 8일 18시 17분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감독: Alfonso Kuaron (1998년)

출연: Ethan Hawke/ Gwyneth Paltrow / Robert De Niro

미국의 고등학생에게 셰익스피어에 대해 말해 보라면 절반은 '섹스 어필'에 대해 열을 올린다고 한다. 독서세대가 사라지고 교양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한 때는 인류의 문성(文聖)이라던 셰익스피어도 이제는 영상을 통하지 않으면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는 무명씨에 불과하다. 마크 페로의 말대로 문학은 영화의 전사(前史)로 물러서고 있는지도 모른다.이른바 '고전'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읽혀지면서도 교훈적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그런데 그 교훈이란 저자가 원작 속에 담은 '원래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가 원작으로부터 추출해 내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전문학도 새로운 해석기법과 방법이 개발되어야 하고 '독자'가 '관중'으로 바뀐 시대에 문학은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문호, 찰스 디킨스의 작품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도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중에서 반세기 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David Lean 감독의 작품이(1946) 원작을 충실하게 압축하여 영상으로 옮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린의 작품은 독서세대를 겨냥하며 만든 것이며 어디까지나 원작을 읽어야만 한다는 당위를 전제로 하여 원작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인물과 시대적 배경을 영상화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 (Alfonso Kuaron)감독의 1998년 작품은 디킨스의 살해와 재창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원작의 틀을 깨고 나섰다. 린의 작품은 독서세대를 겨냥하며 원작의 보조 수단으로 만든 것이나 쿠아론의 영화는 영상세대의 감각과 기호에 맞추어 과감하게 개작한 것이다.

디킨스의 역작의 주제는 사회적 계급을 기초로 한 빈부간의 갈등과 헛된 꿈의 좌절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위대한 유산'이라는 우리 말 제목은 이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필자는 '거창한 꿈'이라는 번역을 더욱 선호한다. 이 작품은 누구나 동의하듯이 타인의 힘에 의존하여 신분상승을 꿈꾸는 한 소년의 헛된 꿈의 좌절을 통한 개안과 인간적 성장을 그린 것이다. 누군가의 시혜에 힘입어 '막대한 재산'(expectations)을 보유한 신사가 되어 미모와 교양을 겸비한 아내를 맞는다는 '거창한 기대'(expectation)가 무너질 때 비로소 진실한 인간의 가치를 깨친다는 메시지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유산'이라는 제목은 반어적 용법을 차치(且置)한다면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핍의 에스텔라에 대한 몽환적 사랑은 그의 내면적 성장을 그리기 위해 동원된 화려한 물감에 불과했다. 과거의 먼지 속에서 갇혀 살던 미스 해비셤이 잿더미로 변한 흉가의 잔해가 되고, 사내의 가슴에 상처를 주도록 훈련받은 '아름다운 악녀' 에스텔라가 파멸로 마감하는 것도 이러한 사회적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였다. 등장인물의 외모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을 특장인 디킨스가 유독 이 소설에서만은 핍을 포함하여 어떤 등장 인물의 외모에 대해서 거의 묘사하지 않은 이유는 일인칭 소설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이 주인공의 내면적 성장을 다룬 성장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내면적 성장은 타인의 재산과 힘에 의존하여 신사가 되겠다는 헛된 꿈을 버리고

림으로서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다.

20세기말에 대서양 반대편에서 제작된 쿠아론의 영화는 두 청춘남녀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빛과 색채, 그리고 '섹스 어필'을 교묘하게 조합한 이 영화는 영상세대의 기호에 영합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을 화가로 설정한 것도 물론 빛과 색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고, 플로리다의 태양 빛과 뉴욕의 분수대에서 펼치는 감각적인 키스씬도 가족관객(family market)에서 청춘관객(youthful market)으로 영화의 고객이 바뀐 세태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디킨스 작품의 핵심이었던 사회적 메시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분 변동의 사회적 의미를 관조하면서 신, 구 질서 사이의 간극을 정교한 법리로 연결해주던 재거스 변호사도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미'라는 이름의 잡무변호사가 단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 다만 에스텔라가 떠난 후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핀(Finn Bell)이 비로소 "나는 성장의 길을 택했다." (I elected to grow up) 라며 홀로 서기를 시도하는 것을 장면을 통해 개인적 성장의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한 시대를 투영했던 심각한 사회소설이 한갓 보기 좋은 애정영화로 탈바꿈한 것은 세상이 셰익스피어 시대에서 섹스어필 시대로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위대한 유산'은 한때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믿었던 소설의 시체 위에 화려하게 핀 영상의 꽃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게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일러 새 시대, 21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들 한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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