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재기/방사성폐기물 위험성 과장말라

  • 입력 2000년 12월 20일 18시 44분


19세기 후반 우리는 신문물을 ‘서양귀신’으로 부르며 정치 이데올로기화해 배척한 결과 산업혁명 이후 급진하는 시대조류를 놓쳐 가난하고 허약한 나라가 됐다.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문제를 놓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진통을 보면 마치 옛 서양귀신 다툼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한국이 단기간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에너지원으로서의 원자력발전이 기여한 공로를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반대에서 비롯한 반원자력 정서가 만연해 원전이나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위한 부지 확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사성 폐기물은 원전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현대 의료에는 방사성 물질이 대단히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상당한 분량의 폐기물이 병원에서도 발생한다.

원전처럼 사고 위험도 없고 방사선 위험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인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이 15년 가까이 공전하고 있는 이유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일부 단체나 개인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방사성 폐기물을 턱없이 위험한 것으로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부지 후보지역이 거론되기만 하면 지역 주민은 부동산 가격 하락을 걱정해 무조건 저항하며, 정치권은 ‘표’를 의식해 국가적 사업에서 뒷걸음질친다.

언론은 대중의 구미를 맞추는 보도자세를 취함으로써 방사성 폐기물이 정말로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화시켜 일반인들도 방사성 폐기물이 심각하게 위험한 것으로 오해하게 됐다. 방사선 안전을 전문으로 하는 과학자의 견해보다 환경운동가의 말에 동조한다. 원자력사업자의 설명은 믿지 않고 정부에 대한 불신풍조가 안전규제기관의 설명도 무색하게 한다. 분위기가 이러니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

위험하지 않은 것이 위험한 것으로 오해받는 데는 과거 원자력 정책이 폐쇄적이었던 탓도 없지 않다. 지금은 정부의 원자력 시책에서 ‘투명성’이 중요한 키워드가 돼 있다. 이번에 폐기물사업 주관기관은 폐기물 처분장 부지를 일방적으로 지정하지 않고 유치를 희망하는 지방을 공모해 선정된 지역에 막대한 지역협력사업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초기 5년은 매년 약 60억원, 이후 30년 동안 매년 약 20억원의 이 사업비를 지방자치단체가 효율적으로 활용하면 처분장 유치 지역을 ‘황폐해지는 땅’이 아니라 부러움을 사는 고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정부나 사업 주체가 유의해야 할 점은 뜬소문으로 인한 기피현상을 막고 지역민이 재산상의 손해를 보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는 한편, 만약 손해가 발생하면 보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주민의 진정한 불안은 방사선 위험성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제적 피해에 대한 우려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색 단계이지만 이번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공모에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부디 물의 없이 부지가 선정돼 더 이상 불필요한 낭비가 없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재기(한양대 교수·원자력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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