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安企部 돈, 검찰의 고민

  • 입력 2000년 10월 5일 18시 33분


96년 총선 때 여당인 신한국당이 당시 안기부 돈 400억원 이상을 선거자금으로 전용한 혐의를 검찰이 내사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이 관련 예금계좌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5개월 전인 지난 5월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두달 후인 7월. 동아일보 검찰담당 기자는 경부고속철 차량 선정 로비의혹 사건의 한 피고인 수사기록에서 ‘조그만 단서’를 포착했다. 테제베(TGV) 제작사인 프랑스 알스톰사의 한국인 로비스트와 당시 신한국당 모 중진의원의 ‘관계’를 알게 된 것.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큰 사건으로까지 진전될 줄은 몰랐다. 얼마 후 검찰이 이 의원의 계좌를 뒤졌다는 ‘틀림없는 제보’를 또 다른 검찰담당 기자가 받았다. 이 의원은 ‘린다 김 로비의혹’사건 때도 등장했던 인물. 당시 검찰은 린다 김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수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TGV와 관련한 수사일 것으로 추정이 가능했다.

심층 취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7월말경 다가왔다. 검찰이 극비리에 법원에서 발부받은 일련의 계좌추적용 압수수색영장 가운데 서너개가 체크됐다.

그 후 검찰의 내사 진전 상황과 팩트(fact)를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확인해온 결과가 이번에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안기부 돈 선거자금 유입’사건이다. 그러나 이 돈이 국가의 비밀예산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기업에서 모금한 것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확인취재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문제는 검찰이다. 즉 이 사건을 과연 얼마나 철저히 수사해 진상을 밝힐 수 있느냐에 있다. 검찰은 동아일보 보도 후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스무고개’나 선(禪)문답 같은 검찰 관계자의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도 그런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예금의 이동이) 총선 전인가.

“얘기할 수 없다.”

―모 의원을 수사하나.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피의사실 공표다.”

―안기부 돈이 맞나.

“동아일보에 물어보라.”

―돈의 규모와 행방 등을 언제까지 확인할 건가.

“확인해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수사대상이 될지 모른다.”

이 관계자의 대답을 잘 뜯어보면 동아일보 보도내용을 부인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검찰은 다음 두 가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가뜩이나 꼬여 있는 여야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소지. 둘째, 안기부 비밀예산을 선거자금이나 이른바 ‘통치자금’으로 전용하는 ‘관행’에서 현 정권은 자유로운가 하는 관점. 96년 당시 집권당이었던 야당측의 예민한 반응은 물론이고 현 집권당 일각에서조차 “검찰이 사고만 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런 어려운 정치현실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검찰의 길’을 가야한다. 이제는 못된 고리를 끊어야 한다. 안기부의 비밀예산이라면 국민이 낸 세금이다. 또 기업에서 모금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소비자의 부담’으로 되돌아 올 성질의 돈이다. ‘정권 보위’ 차원이 아닌 국가의 기본과 장래를 위해 검찰의 현명한 자세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육정수<사회부장>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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