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열등감과 자존심

  • 입력 2000년 10월 1일 18시 34분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가 ‘동양인 최초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한해 16승을 올렸다 해서 일본열도가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서양에서 배운 야구, 코쟁이보다 작은 체구와 힘, 그런데도 이겨냈으니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열등감을 풀고 싶다는 기분이 깔려 있었다. 벌써 1884년에 서양인과의 잡혼(雜婚)으로 일본인종을 개량하자는 책도 나온 일본이다. 그래도 100년이 넘도록 풀지 못한 서양 콤플렉스가 노모선수를 계기로 터진 것은 아니었을까.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대표팀이 일본을 꺾었을 때다. 기자들이 카메라를 한국감독에게 들이대자 말한다. “다른 나라에는 다 지더라도 일본만은 꼭 이기자고 했습니다.” 맺혀 있는 한마디일 것이다. 일본의 침략 지배에 대한 반감 분노 혹은 ‘극일정신’ 등등. 그래도 아차 싶다. 일본인말고도, 예컨대 전혀 다른 미국이나 영국인이 듣는다면 어떨까. 과거 올림픽 사격부문 메달리스트인 북한의 김호준이 외신 인터뷰에서 “원쑤의 심장을 쏘는 정신으로”라고 했던 때처럼 고개를 갸웃하진 않을까.

▷일본인들이 ‘왜소 천박 협량’하다고 자탄해온 신체조건이나 자의식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국위가 낮은 것은 아니며 일본인이 지구촌에서 손가락질만 받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일간의 과거사는 지울 수 없는 통한의 역사지만, 지구촌에 한국 나름의 위상이 있다. 또 일제시대 야구를 배웠고, 일본 프로야구가 한수 위인데도 한국 야구는 시드니에서 일본을 이길 만큼 컸다.

▷박찬호도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노모의 16승을 훌쩍 뛰어넘어 18승을 올렸다. 지난주 미국 여자프로골프 투어의 세이프웨이챔피언십 대회에서 공동선두로 경기를 마친 김미현과 장정을 상기해 보라. 소렌스탐 같은 대선수를 물리치고 두 작달막한 한국처녀가 ‘또순이 걸음’으로 우승을 다투는 장면.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은 달라졌으며 바뀌고 있다. 그 프라이드만큼 발상과 감각도 바뀌어야 한다. 야구감독의 ‘솔직한 실언’만 탓하자는 게 아니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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