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재호/이산의 눈물과 동서독

  • 입력 2000년 8월 20일 19시 07분


대학 2학년 때인가 구미(歐美)외교사 시험에 ‘독일 통일 과정을 논하라’라는 문제가 나왔다. 예상했던 문제여서 별 어려움 없이 답안지를 메웠다. ‘통일에 필요한 것은 오직 철과 피’라고 했던 비스마르크의 통일론을 중심으로 1860년대 프로이센과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짚어 주었다. 결과는 B―로 기대 이하였다. 다른 학생들도 대개 비슷했다. 담당 교수님이 답안지를 돌려주면서 한 평가가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여러분은 답안 첫머리에 한결같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독일 민족이 통일을 이룬 것은…’이라고 했는데 독일 민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무슨 증거가 있는가. 여러분은 검증되지 않은 명제, 문제의 본질과 관계없는 명제를 기술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지는 이 극적인 여름에 참 무수히도 많은 동서독 관계에 대한 글을 읽었다. 동서독은 정상회담을 어떻게 했나, 그들은 이산가족문제를 어떻게 풀었나, 동서독의 교훈 등등. 동서독은 우리에게 일종의 전범(典範) 같았다.

그러나 남북관계에는 동서독의 예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도 다르고 우리는 6·25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는 점도 다르지만 관계 개선 과정 자체가 역순(逆順)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서독은 교류 협력의 진전과 함께 정상회담(70년 3월) 교통조약 체결(72년 10월) 기본조약 체결(72년 11월) 유엔 동시 가입(73년 9월)의 단계를 밟았다.

이에 반해 남북은 편지 한 장 주고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유엔 동시 가입(91년)부터 먼저 했고 이어 기본합의서 채택(92년)과 정상회담, 그리고 교류 협력의 시작이라는 순서를 밟고 있다. 이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좀더 깊은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가끔 ‘남북관계 개선은 동서독의 그것과 전혀 다른 형태로 오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교류 협력부터 다져 나가는 식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에 의해서 문이 확 열리는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은 아닐까. 일찍이 함석헌(咸錫憲)선생도 “통일은 도둑같이 어느 날 갑자기 슬며시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런 생각은 성급한 ‘기대성 사고’일 수 있다. 하지만 동서독이 이른바 ‘작은 발걸음 정책’에 따라 교류 협력부터 다져 나가야 했던 시기는 엄혹한 동서 냉전의 시기였다. 우리가 굳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행태를 답습해 내려올 필요가 있을까.

동서독 통일 과정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기능주의적 접근에 함몰돼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들의 사고는 대단히 합리적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남북간에는 있다.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더 절실해졌다. ‘이산의 눈물’까지도 꼭 단계적으로 닦아줘야 하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지만 저들의 눈물 앞에서 누군들 쉽게 그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남북이 지혜를 모으면 ‘개선된 남북관계’를 의외로 빨리 누릴 수도 있다. ‘동서독 신드롬’을 떨쳐 버리자. 한민족 최대의 ‘정치적 실패’라는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적 열등감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도 됐다.

이재호<정치부장>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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