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의 바둑세상만사]의사들은 패감을 바꿔라

  • 입력 2000년 8월 13일 18시 00분


패란 바둑에서 서로가 상대 돌을 딸 수 있는 형태다. 내가 상대 돌을 따면 상대가 내 돌을 다시 딴다. 내가 다시 따면 상대가 또 되딴다. 이러면 바둑이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번 돌을 땄을 때 그곳을 바로 되따지 못하게 규칙으로 정한 것이 패이다.

패가 나면 상대가 꼭 받아야 하는 자리에 돌을 놓는데 상대가 그것을 응수할 때 패를 딴다. 이를 두고 패감을 쓴다고 말한다.

바둑을 두면서 하수가 제일 골치 아파하는 것이 바로 이 패다. 하수는 패만 나면 지레 겁을 먹는다. 물러서지 않아도 되는데 스스로 움츠려 들어서 물러서고 만다. 반면 상수는 자유자재로 패를 만들기도 하고 패를 걸어가기도 한다. 그러니 패가 나면 상수가 이기는 경우가 많다.

요즘 의약분업 시행을 놓고 정부와 의료계가 대립하는 모양이 꼭 바둑의 패를 닮았다. 의료계는 약사들의 임의조제와 대체조제를 금지하라고 주장하면서 파업이란 패감을 먼저 썼다. 그러자 이에 굴복한 정부가 약사법 개정으로 한발 물러섰다. 의료계는 그 걸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다시 파업으로 패 싸움을 걸었다. 이제 정부가 패감을 써야 할 차례인데 패감이 바닥난 것처럼 보인다.

이런 패 싸움을 보고 있으면 의료계가 국민들의 생명을 위협해가면서 파업이란 패감을 써야 하는 건지, 패를 걸면서 무조건 이기려고만 하는 게 옳은 것인지 묻고 싶다.

사실 바둑은 패가 있어서 재미있는 게임이지만 상수에게도 패는 골치 아픈 것임에 틀림없다. 프로도 예외는 아니다. 재작년 패왕전 도전기 1국에서 조훈현 9단은 패를 하다 착각해 이성재 5단에게 졌다. 그의 바둑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창호 9단은 그래서인지 바둑이 유리하면 아예 쓸 데 없는 패를 하지 않는다. 반 집이라도 유리하면 마지막 반 패를 그냥 양보하는 일이 흔하다. 강자의 여유가 아니다. 실수를 걱정해서이다. 의료계가 정부보다 상수라고 해도 함부로 패를 쓰면 안 되는 것이다.

패감을 쓸 때는 중요한 금기사항이 있다. 손해 패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손해패감을 자꾸 쓰면 나중에 패에서 이겨도 득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수가 돌을 잃으면서도 손해패감을 안 쓸려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금 의사들은 패를 할 때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손해패감을 쓰고 있다. 파업이 그것이다. 어느 집단이든 자신들의 주장이나 이익을 위해 파업을 할 수 있다. 의사라고 왜 파업을 못하겠는가마는 의사 파업은 지하철 파업이나 호텔 노조파업과는 다르다. 지하철은 불편을 참으면 되고 호텔은 안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에게 의사가 파업했으니 참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패로 얼마나 이득을 얻을지는 몰라도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패감은 결국 엄청난 손해패감이 되고 말 것이다. 파업을 해서 그들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진다 해도 그들은 더 큰 것을 잃을 것이다. 의사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명예와 자존심은 되찾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패를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지금 당장 패감을 바꾸어라.

김대현 <영화평론가·아마5단> momi21@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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