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혹평'과 소송

  • 입력 2000년 8월 10일 18시 55분


평론가 혹은 비평가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이 부쩍 늘어났다. 생소한 분야의 평론가도 자주 눈에 뜨인다. 이를테면 문화 전반을 뭉뚱그려 비평하는 문화평론가도 있고 요리평론가 패션평론가도 등장한다. 다양한 평론가의 출현은 사회의 전문화 현상을 반영하며 삶의 질 측면에서 과거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평론 하면 역시 문화 분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예술의 난해함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뛰어넘기 힘든 벽이다. 여기에 평론가들이 나서게 되면 거리감은 한결 줄어든다. 반면에 예술가에게 평론가는 떨떠름한 존재다. 평론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자신에게 혹평이 가해질 경우 훼방꾼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평론가와 예술가들이 사이가 좋은 경우는 드물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보들레르는 “사랑과 애정으로 가득 찬 비평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평론의 비판 기능을 강조했다. 이 점에서 우리 평론은 부끄럽다. 찬사 일변도의 평론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양쪽 모두에게 있지만 토론문화 부재의 사회풍토와도 무관치 않은 듯하다. 어쨌든 예술의 좋고 나쁨을 가리는 평론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문화예술 발전에 큰 장애요인이다.

▷요즘 문화계에는 비평과 관련된 두 가지 소송이 관심을 모은다. 바이올리니스트 배은환씨가 자신의 연주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을 상대로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성공적이었던 연주회를 혹평함으로써 음악적 자존심이 훼손됐다는 주장이다. 무용가 김민희씨도 비슷한 이유로 평론가 송종건씨에 대해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모두 혹평에서 비롯된 이 두 소송은 앞으로 재판을 통해 시비가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이로 인해 가뜩이나 왜소한 평론계가 더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평론과 예술은 상호 보완 관계이지 대립적 관계는 아니다. 평론에 대한 예술인들의 피해의식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서로 등을 돌리기보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비평문화를 향상시키는 쪽으로 함께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홍찬식논설위원>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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