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일본인들만의 '평화'

  • 입력 2000년 8월 6일 18시 53분


단어의 뜻은 사용하는 사람의 의중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해마다 8월이 되면 일본인들이 입에 자주 올리는 ‘평화’란 말도 마찬가지다.

6일은 55년 전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사상 처음으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당시 일본은 원폭 투하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끔찍한 인명피해를 겪었다. 도시는 복구됐지만 지금까지 21만7137명이 숨지고 아직도 수많은 피폭자가 후유증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원자폭탄의 ‘원’자만 들어도 악몽에 시달리고 ‘평화’를 갈망한다. 일본이 어떤 나라보다도 핵무기 철폐에 적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날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도 평화에 대한 염원은 여실히 드러났다.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 총리를 비롯한 5만여명의 참석자들은 “인류가 증오와 폭력의 사슬을 끊고 화해의 길을 열어 핵무기를 없애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처럼 요란스러운 평화기념식에서 ‘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왜 원폭이 투하됐는지, 이에 앞서 아시아인의 평화는 어떻게 짓밟혔는지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날 도쿄에서 열린 자유주의사관연구회 전국대회에서는 “똑같은 패전국인 독일은 국군이 남았는데 일본은 남지 않았다”며 과거에 대한 반성을 ‘자학적 역사관’의 소치로 비판하는 소리가 컸다. 이런 주장은 점점 힘을 얻어 일본의 전쟁포기를 명시한 ‘평화헌법’을 바꾸자는 개헌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명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핵무기는 어떤 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전쟁 책임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고통만을 기억하는 일본인의 ‘평화’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아시아인이 바라는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이영이<도쿄특파원>yes202@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