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풍납토성 훼손' 정부 책임이다

  • 입력 2000년 5월 15일 19시 48분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문화유적이 굴착기에 의해 마구 파헤쳐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13일 서울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경위야 어떻든 우리의 문화재 보호의식에 대해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백제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이곳은 '한국의 폼페이'라고 불릴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이곳을 훼손한 아파트 재건축조합 관계자들은 아파트 공사장에서 문화재가 출토되면서 건축이 지연되자 공사를 빨리 재개하려는 생각에서 발굴현장에 손을 댔다고 한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무단으로 유적을 파헤친 이들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책임은 정부 당국에 있다고 본다. 문화재 보존과 개발을 둘러싼 재산권 분쟁은 90년대 중반 경부고속철의 경주노선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이번에도 재건축조합원들의 불안감을 가장 잘 알고 있던 것이 문화재청 등 정부 당국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은 방관자적 자세로 일관해 왔다. 특히 재건축조합이 지난 4일 공사 재개를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문화재 당국이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풍납토성 문제는 63년 서울시가 풍납토성의 성곽 부분만 사적으로 지정하고 내부를 일반인에게 불하한 것에서부터 불행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이 결과 사적지에 각종 건물이 가득 차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는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저지른 '실수'였다고 하더라도 이번은 문제가 다르다.

최근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도읍지일 것이라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됐고 이를 입증하듯 중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쯤 되면 이곳을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지정하는 작업을 서둘렀어야 했는데도 문화재청은 차일피일 미뤄오다 이번 사건을 맞은 것이다.

40만평에 이르는 풍납토성 내부는 벌써 3분의 1 가량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유적이 파괴된 상태지만 나머지 지역에는 땅속에 유적이 묻혀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존하려면 정부가 땅을 매입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므로 범정부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현실적으로 이번에 문제가 된 1000여평의 아파트부지부터 먼저 사들이든지, 아니면 대토를 해주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머지는 장기계획을 세워 조금씩 매입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문화재 훼손이 가속화되는 현실이다.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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