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유치원 정치'

  • 입력 2000년 4월 18일 19시 28분


선거가 끝났다. 위로하려고 전화를 걸면 낙선자들은 대부분 무슨 산이든 산에 올라가 있었다. 그럼 당선자들은? 너무 바빠서 도무지 통화를 하기가 어렵다. 특히 30대와 40대 신진들은 신문 방송에 불려 다니느라 제 정신이 아니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 386세대와 40대 당선자 두 사람이 나란히 출연했는데, 하는 말들이 참 걸작이었다.

“보스가 시키는 대로 패거리 정치 하려면 뭐하러 국회의원을 273명이나 뽑습니까. 둘만 뽑아서 너는 여당 나는 야당, 그러면 되죠. 하나 있으나 백 명 있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국회의원은 먼저 독립적 헌법기관이고 그 다음에 당원입니다.”(송영길·인천 계양·민주당) “현역은 의정보고회를 무제한으로 할 수 있는데 신인은 명함도 못 돌립니다. 축구로 치면 상대방은 다리를 묶어놓고 자기네는 손발 다 써가면서 하는데 관중이 감동받고 열광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국민더러 정치에 관심 가지라 할 수 있습니까. 당선되었으니까 선거법부터 공정하게 고칠 겁니다.”(김부겸·경기 군포·한나라당)

▼신인들 상식적 발언에 되레 감동▼

무척 상식적인 말이다. 그런데 정치신인들의 이런 상식적 발언이 어째서 감동 비슷한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아마도 9단들을 비롯한 정치 고참들이 하도 말 같지 않은 말을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신인들이 많이 들어왔으니 6월에 문을 여는 16대 국회는 무척 시끄럽게 됐다. 그들이 후보자로서, 당선자로서 한 정치개혁 약속을 지키려면 정치 고참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흘러나온 다음과 같은 중진들의 말씀은 상식에 비추어 보면 실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야당의원이 국회의장이 되어서 정치적 이유로 사회를 기피하면 대통령의 국정수행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국회의장은 반드시 여당에서 나와야 한다.”(박상천 민주당 원내총무)

“국회의장은 제1당 의원이 맡아야 한다. 신익희 선생도 야당의원으로서 국회의장을 맡은 적이 있다.”(이부영 한나라당 원내총무)

상식에 비추어 보면 둘 다 틀렸다. 여당이 할 수도 있고 제1당이 맡을 수도 있는 일이지, 꼭 어디서 해야 한다는 법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답은 국회의장은 국회의원이 뽑으면 된다는 것이다. 여야간에 합의가 되면 좋지만 안될 경우에는 각 당이 후보를 세워서 표결 처리하면 그만이다. 무소속 의원이라도 존경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의장을 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선생님의 지시 없이 반장을 잘만 뽑는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고참의원들, 소속 의원들을 ‘당론’ 없이는 밥숟가락도 못 드는 꼭두각시로 만드는 당 지도부를 보고 신인들이 뭐라고 할까? 하기야 예전에도 선거 때마다 신인들이 대거 진출했지만 그들도 얼마 가지 않아 대부분 ‘당론’에 코를 꿰어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곤 했다. 이번의 386은 어떨까? 두고 볼 일이다.

“수가 적다고 일을 못하느냐. 청와대에서 몇 차례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충청도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냐.”(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당선자 17명이 똘똘 뭉치면 못할 일이 없다.”(오장섭·충남 예산·자민련)

역시 용장(勇將) 밑에 약졸(弱卒)은 없는가 보다. 15대 선거 50석보다 33석이 적은 17석을 겨우 건져 놓고서도 자민련은 ‘수가 적다’는 사실만 불쾌할 뿐 ‘왜 수가 줄었는지’에 대한 성찰은 전혀 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자기성찰적 태도의 결여는 그 사람이 아직 유아기의 발전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가 된다.

▼고단자들이여 수준 좀 높이길▼

야당의 길을 가겠노라고, 민주당과의 공조는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하던 기백은 다 어디 가고 지금은 오로지 ‘우리 동네를 쑥밭으로 만든 이인제’와 그 배후 DJ에 대한 원한만 가득하다. 격분한 JP, 일부 언론보도에 따르면 그 사이 시내 모처에서 남몰래 DJ를 만났다고 한다. 다시 DJ와 공조를 재개할 것인가.자민련 당선자들, DJP가 합당하면 줄줄이 따라갈 것이다. 정말 유치해서 못 봐줄 일이다.

여야 3당의 정치 고단자들에게 부탁드린다.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제발 수준은 좀 올려 주세요. 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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