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영/'벤처 혁명'은 시작됐다

  • 입력 2000년 1월 17일 20시 06분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 중 으뜸은 단연 벤처열풍이다.

매일 수많은 벤처기업들이 새로 태어나고 대기업들은 벤처로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경쟁적으로 새로운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있다. 벤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조차 코스닥을 통해 벤처열풍에 편승하고자 한다.

밖에서는 ‘다윗’ AOL이 ‘골리앗’ 타임워너를 인수했고 안에서는 거대재벌 삼성그룹이 ‘꼬마’ 새롬기술과 ‘대등한’ 위치에서 제휴를 체결했다.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20, 30대 벤처기업인들을 만나 보면 우리 경제가 상실해가고 있는 ‘역동성’마저 새삼 느끼게 된다.

반면 이같은 열풍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쪽도 있다. 과거 우리 경제를 견인해온 전통적 제조업체에서 고참 과장 이상의 직급을 가진 사람들이 그 주류다. 지난해말 코스닥의 주가 급등으로 상당수 정보통신업체 직원들이 우리사주를 통해 억대 샐러리맨이 되는 것을 보고 재벌계열 제조업체 부장인 A씨(45)는 “솔직히 일할 의욕이 안 난다”고 말했다. 20년 가까이 앞만 바라보면서 일했는데 갑자기 20, 30대 벼락부자들이 탄생하는 것을 보니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작 두려워하는 대상은 치고 올라오는 젊은 세대가 아니다. 어느새 변해버린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에 적응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처지가 두려움의 진짜 원인이다.

사실 벤처열풍으로 표현되는 최근의 사회현상은 일과성 바람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심대한 변화를 몰고 올 징후가 여러 군데서 감지된다.

코스닥 등록은 안 했지만 잘 나가는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B사장(38)은 “최근의 벤처신드롬은 경제의 재편성과 이를 통한 부의 재분배, 사회의 구조적 변화까지 수반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언한다. 그렇다면 이건 하나의 ‘혁명’의 시작이다. 그는 “요즘 벤처기업가들에게 가진 것이라곤 돈밖에 없다고들 말하는데 사실 돈은 많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내 벤처기업들의 수준은 아직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 문자 그대로 벤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기업이 대다수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품 논란과는 별개로 최근의 벤처신드롬이 코스닥의 뒷받침을 받아 이미 부의 재분배 기능을 시작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추세라면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 수십년간 유지돼온 한국경제의 재벌체제가 벤처들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른바 ‘부의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다. 재벌들이 앞다퉈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하고 벤처기업들을 ‘껴안는’ 것은 이같은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기업 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코스닥에 등록도 하기 전인 태동 단계의 벤처에 자금을 대주고 훗날을 기약하려는 엔젤투자 열풍은 사회 변화에 편승하려는 일종의 사회적 신드롬인 셈이다. 어쩌면 산업혁명에 맞먹는 변화를 몰고 올지도 모르는 대변혁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김상영<경제부기자>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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