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325)

  • 입력 2000년 1월 16일 20시 04분


나는 그를 데리고 우리 동네인 분데스 플라츠 건너편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 로마로 갔지요. 동네 레스토랑엔 날마다 웬 노인 부부들이 그렇게 많든지. 그래도 그 집 음식은 맛있어요. 뚱보 주인은 앞치마를 입은 채로 주방 보다는 입구에 서서 동네 단골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적이 더 많아요.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서 붉은 포도주 시키고 음식 나오기 전에 갓 구운 밀가루 냄새가 싱싱한 빵을 뜯어 먹으면서 나는 영태에게 슬슬 말을 걸었지요.

어땠어?

복잡해. 한마디로 다 표현할 수는 없어. 감동과 절망이 반반이야.

그런 기회주의적인 대답이 어딨니?

어렵지만 버티며 살아낸 생활력이 눈물겹고 물샐 틈 없는 통제가 절망적이고 그래.

짐작은 했지만 뭐 별로 새로운 관점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선가 보니까 그들 스스로 제국주의에 대하여 바늘을 곤두세운 고슴도치라구 하더라.

꼭 남의 말 하듯 하는 구나. 그들은 우리가 잘 먹구 잘 사는 동안에 우리 몫까지 해낸 거야.

무슨 소리야. 우리두 가만있지는 않았어. 느림보이긴 했지만 거북이처럼 기어왔어.

우리두 변하겠지. 그렇지만 이행기가 다시 몇십 년은 계속 될거야.

앞으로 어떡할래? 또 사고를 쳤잖아. 넌 이 상태로는 순순히 귀국하지 못해. 이런 큰 변화의 시절에 미련하기는….

편 좀 들어줬다 왜. 나 같은 졸개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나는 조영수 학생의 이야기를 그에게 해주었어요. 영태는 내 말을 중도에서 끊지 않고 참을성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했어요.

물론 이런 식으로 끝나선 안되겠지.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기나 베트남 식으론 안돼. 개항 이래 백년이 걸린 싸움이었어.

송영태는 언젠가처럼 미친 듯이 터지진 않았지만 갑자기 굵은 눈물 방울을 툭툭 떨어뜨리더니 손바닥으로 닦고 손가락으로 눈을 부볐습니다.

나는 요즈음의 이 동네가 지긋지긋해졌어. 요리를 열심히 해놓고 식탁에 차려놓기만 하고서 불을 꺼버린 거나 같아. 배고픔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이제 와선 사람이 원래 그렇다잖아. 하여튼 사내가 눈물은 왜 짜니….

그러고는 둘 다 침묵. 먹고 마시고 담배 피우고 계산하고 일어났지요. 하는 수 없이 이 선생네 집에도 못가고 우리 집으로 돌아가서 나는 로프트 위의 내 침대에 그는 아래쪽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어요. 내가 뒤척일 때마다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가늘게 쇳소리를 냈어요. 그가 아래쪽에서 뜬금없이 묻더군요.

최미경 생각나?

가끔….

했다가 내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어요.

이 바보야 그앤 널 좋아했어.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구.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영태가 다시 조용하게 물었어요.

한 형… 정말 이희수씨 사랑하는 거야?

또 저런다, 아아 못참겠더라구요. 예전에 시장 순대국집에서 영화 찍는 폼으로 목소리를 깔던 게 생각나서. 하지만 가슴은 어쩐지 저려 오는 겁니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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