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시장님, 눈높이 낮추세요

  • 입력 2000년 1월 11일 21시 59분


지난해말 공개되기 시작한 시도지사들의 판공비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만 은근히 즐겨왔을 판공비의 세계를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된 ‘보통시민’들의 눈에 그것은 요지경 같은 세상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한끼 정도는 외부인사나 부하직원들과 몇만원짜리 식사를 했다. 그 비용은 개인 돈이 아니라 판공비란 명목의 세금으로 부담했다. 격려금이나 후원금 명목으로 남들에게 여유 있게 베풀지만 시민이 낸 세금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무슨 무슨 성금을 낼 때면 빠지지 않아 ‘좋은 일도 많이 하는구나’ 했더니 그 돈도 판공비에서 나간 것이었다.

광역자치단체장으로는 가장 먼저 판공비 사용내용을 공개한 사람은 고건(高建)서울시장이었다. 시민단체의 재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98년 7월 시장 취임 직후 스스로 판공비 공개를 준비해왔다.

사실 그는 판공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공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61년 고시에 합격한 그는 40년에 걸쳐 정부 요직을 섭렵했다. 37세에 전남도지사를 지낸 그는 역대 정권에서 교통 농수산 내무부 장관과 임명직 서울시장을 거쳐 총리까지 지냈다.

행정경험으로 그만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이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행정의 달인’이란 수식어는 결코 빈말일 수가 없다.

자신의 관리철학이자 직업관으로 청렴(淸廉)과 지성(至誠)을 꼽는 고시장은 민선시장으로 서울시에 복귀한 이후 부정부패 척결을 시정개혁의 핵심과제로 내세웠다.

그는 민원처리 과정을 온라인을 통해 공개하는 시스템(OPEN)을 시정에 도입함으로써 행정능력을 과시했다. 구청장들의 반발이 예상되는데도 서울의 25개 구청과 소방서 및 사업본부 등의 부패 정도를 조사한 ‘반부패지수’를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부패척결 의지를 과시했다. 판공비 공개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고시장이었으니 판공비 공개 이후 ‘보통시민’들의 반응에 섭섭한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오랜 관행을 혼자서 어떻게 무시할 것이며 ‘업무상’ 식사한 것을 가지고 비싸다느니, 상대가 누구였는지 낱낱이 밝히라느니 하니 말이다. 그나마 책정된 판공비를 80%밖에 쓰지 않고 20%나 남겼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시장의 판공비 사용은 시민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단체장들의 판공비 공개를 요구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민단체의 상근 간사의 한달 급여는 고작 100만원을 넘지 않는다. 변호사인 그 단체의 사무처장은 그보다 약간 많은 130만원을 받을 뿐이다. 서울시의 생활보호대상자 생계비 산출 기준에 주식비는 월 2만1628원으로 하루 700원꼴이다. 그들에게 시장의 판공비 사용내용은 어떻게 비칠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시장님, 눈높이를 낮춰 주세요. 행정의 달인답게 판공비를 개혁해 보세요. 그리하여 우리들의 시장님이 돼주세요.”

권순택<지방자치부 차장>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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