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1차대전 발발]인류 최악의 재앙

  • 입력 1999년 9월 8일 19시 24분


99년 여름, 사라예보 거리에는 기분좋은 햇살이 내리쬐었다. 밀랴츠카 강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발칸반도를 휩쓴 10년 내전의 상처는 이 도시를 피해간 듯했다. 이슬람과 유럽풍의 낮은 건물들이 뒤섞인 시내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로웠다.

85년전 어느 여름날, 그날도 사라예보의 하늘은 높고 맑았다.

1914년 6월28일. 화창한 일요일 아침 도시를 뒤덮은 공기에는 그러나 뭔가 불안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긴장감은 끝내 몇시간 뒤 폭발하고 말았다.

오전 11시, 두발의 총성이 사라예보 하늘을 갈랐다. 20세 젊은이가 발사한 두발의 탄환은 강대국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 총성을 직접 들은 사람은 수백명에 그쳤다. 그러나 이 작은 총성은 불과 한달 뒤 지구촌을 뒤흔든 굉음으로 ‘증폭’됐다.

유럽은 마치 ‘객석’에서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착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반 세기 동안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던 인류는 삽시간에 전쟁에 휘말렸다. 인류가 그 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또 ‘피비린내 나는 20세기’의 개막이기도 했다.

그날 오전 10시. 사라예보 역에는 특별열차가 도착했다. 열차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 부처가 타고 있었다. 이곳에서 열리는 육군 연습을 참관하러 빈에서 온 황태자는 당당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로부터 병합 위협을 받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에겐 ‘정복자’의 거만함으로 비쳤다.

육군 연습 참관을 마치고 황태자 부처가 역으로 돌아가는 길. 급회전 코스에 접어든 차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두발의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첫발은 황태자비 소피의 복부를 관통했다. 소피가 앞으로 쓰러지는 찰나 바로 두번째 총탄이 날아왔다. 총탄은 대공의 심장 근처에 명중했다. 황태자의 입에서 “소피…”라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잡혔다. 가브릴로 프린치프. 세르비아의 20세 청년으로 비밀 결사 조직에 가입한 대학생이었다.

황태자 부처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15분 뒤 모두 사망했다. 시계는 11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계대전의 ‘초침’이 째깍거리기 시작했다.

분노한 오스트리아 황실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거기에는 굴욕적인 조건들이 제시돼 있었다.세르비아는 대부분 수락했지만 두가지는 거절했다. 7월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빈 시민들 앞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복수” “복수”를 외치며 환호했다.

오스트리아는 베오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독일이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지만 러시아는 슬라브 동족인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다. 러시아의 참전은 독일의 개입을 불렀고 영국 프랑스 등 ‘참전 도미노’로 이어졌다.

20세기 들어 군비확장과 영토확장 경쟁을 벌이던 유럽 각국에 사라예보 사건은 어쩌면 단순한 핑계거리에 불과했다. 트랙 출발선에 대기하고 있던 각국에 사라예보의 총성은 ‘출발신호’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사라예보 사건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몇가지 우연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결과였다.

페르디난트의 사라예보행은 ‘황태자의 비련’이 초래한 일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원래 오스트리아 황실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본래 황태자는 황제의 장남이자 그의 사촌형인 루돌프.

만약 루돌프가 살아 있었더라면 페르디난트의 운명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정세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루돌프는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해 아버지인 요제프황제와 의견 충돌을 하기도 했다.

황태자가 상심에 젖을 때마다 그를 어루만져 준 이는 마리아 베체라라는 17세의 아리따운 아가씨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에게 알려지고 만다.루돌프는 이미 결혼한 유부남.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루돌프는 마리아와 함께 휴양지인 마이엘링으로 떠난다. 사흘 뒤 두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함께 목숨을 끊었다.

“사랑의 도피를 위장한 연극”이라는 등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황태자 자리는 사촌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돌아갔다.

페르디난트는 형과는 성격이 딴판이었다.당당한 체구에 책보다는 군복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성격. 세르비아 합병 야욕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사라예보 방문도 세르비아를 가상적으로 한 군사연습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어쩌면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다. 피격되기 한시간 전 이미 한번의 암살 기도가 있었다. 역을 떠난 대공 부처가 6대의 오픈카 행렬에 올라타고 시내로 향할 때 프린치프의 동료가 폭탄을 투하한다. 10여명이 부상했으나 황태자는 화를 피했다.

당시의 기록은 황태자가 역으로 돌아가는 코스를 변경할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선도차의 운전사가 이 지시를 듣지 못했다.

불운을 피하지 못하고 쓰러진 황태자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 도로를 적셨다.

그 피는 이윽고 강물이 돼 유럽 대륙, 전세계로 흘러 퍼졌다.

〈사라예보〓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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