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배인준/금융시장의 「들쥐」

  • 입력 1999년 3월 28일 19시 43분


80년대 초 존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이 우리 국민에게 모욕적인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들쥐 같다”는 발언이었다. 한 마리가 뛰면 나머지도 덮어놓고 뒤따라가는 들쥐 습성을 우리 국민성에 오버랩시킨 것이다.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세계금융시장에도 ‘들쥐’가 많은 모양이다. “떼지어 다니는 각국 은행들의 무리 근성과 급격한 자본유출입의 위험성, 그리고 과다한 투자의 폐해―이것이 아시아 금융위기의 3대 교훈이다.” 97년 이후의 아시아 금융위기를 검증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지 26일자 기사의 요지다. 특히 국제자본의 무리 근성이 가장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들은 빌려준 달러를 빼가면 금융위기가 심화될 줄 알면서도 한 곳이 움직이면 모두 따라가는 동시다발적 자본회수로 위기를 확산시켰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제통화기금(IMF)병원 중환자실에 실려가기 직전인 97년 3·4분기(7∼9월)에 단기 해외차입 중 34억달러를 회수당했다. 단기차입 회수는 93년 4·4분기의 6억달러 이후 처음 일어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당국자들은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이 좋다는 소리만 되뇌고 있었다. 국제자본의 들쥐 생리가 빚어낼 재앙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국내 기업 및 금융부문의 들쥐 근성도 외환위기의 중대한 선행원인이다. 남이 투자하니 허겁지겁 따라 하고 남이 빌리니 뒤질세라 따라 빌린 결과가 빚투성이 과투자였다. 종금사 등이 앞다투어 달러를 단기차입해 장기대출한 것은 외환위기의 직격탄이었다. 1단계 외환거래 자유화가 예정대로 4월1일 시행된다. IMF병원 입원 때와 같은 외환시장 위기상황이 재현되지 않도록 국내외 ‘들쥐 현상’을 철저히 경계해야겠다.

〈배인준 논설위원〉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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