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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2월 18일 19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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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얼굴에서 막연하게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인상 같다는 느낌을 받은 건 당연하겠지요. 나는 아버지를 반쯤 증오하고 자라나서는 그 때문에 자신을 미워하면서 아버지와 화해를 했으니까. 특히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두 해 동안 아버지를 간호하면서 그를 완전히 알게 되는 기간이었구요. 당신의 얼굴에서 그 낯선 지방도시의 사진관에서 ―배경에는 어렴풋하게 그려진 가로등과 달이 떠있고 앞에는 커튼과 흰 난간과 창문이 있는 가설무대 같은― 찍어 보낸 아버지의 얼굴에 어려있던 젊은 날의 허기와 무슨 열병같은 결연한 비장함이 엿보였다고나 할까요. 어째서 당신 말대로 고전적인 활동가들에게서는 폐병쟁이나 문학 퇴물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걸까요. 이를테면 화가 비슷해 보인다거나 외국처럼 무슨 전문가나 의사 비슷해 보이면 안되는지. 아, 미안해요. 당신을 비아냥거릴 뜻은 없었어요. 그렇듯 당신에게서 친밀감을 느꼈다는 표현이겠지요.
처음 갈뫼에 가서 나는 사실 그리로 이사할 생각까지는 없었답니다. 농촌사회에서 교직을 가진 여자가 어디서 뭣하다가 나타났는지 모를 사내와 함께 드러내놓고 동거에 들어갈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내놓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누가 믿겠나요. 첫날 우리는 함께 아궁이에 불을 넣었지요. 덧걸이 부뚜막이 얼마나 아늑하고 따스했는지 몰라요. 나는 얼결에 콧노래가 다 나왔지요. 아마 그 멜로디는 아버지가 산에서 부르던 곡이었을 걸요. 당신은 아궁이 속의 불길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내게 말했어요.
한 선생, 저는 사회주의잡니다.
내가 별로 놀라지 않고 물론 그때까지는 아직 유행이 이른 때였지만, 나야 집안에서 이미 산전수전 다 겪어놔서 이렇게 장난끼로 시큰둥하게 물어 봤지요.
벌써 그쪽에 확정을 하셨나요?
했더니 조금 겸연쩍었는지,
그 길루 가는 중입니다.
하는 거예요. 말을 꺼내놓고 보니 스스로 과장되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남자들의 그런 모양은 그렇게 보기 싫은 건 아니랍니다. 좀 철딱서니 없어보일지언정 어쩐지 마음이 놓이면서 좋아하게는 만들지요.
나는 그 첫 번째의 주말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갔는데요, 여자학교라 그런지 어린 여우들이 무슨 낌새를 맡았는지 내 얼굴이 달라졌대나 뭐래나. 아 정말이에요. 당신이 몇 번 저에게 물었지만 나는 처음에 당신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어요. 그저 친근하게만 느꼈을 뿐. 아무래두 당신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함께 그 문제를 토론해보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았지요.
다음 주말에 갔더니 당신은 그 창고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들었고 내 작업할 공간에도 바닥 공사를 해주었지요. 나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이사를 할 생각이었거든요.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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