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39)

  • 입력 1998년 12월 2일 1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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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16)

재수생 때 나는 전경에게 쫓겨서 뛴 적이 있었다. 그때도 학원 마치고 나와 광화문통에 서서 구경만 했을 뿐인데 시위학생으로 오해받아한참을 쫓겼었다. 건물 안으로 숨으려 했지만 입구에서 지키고 있던 종업원들이 험상궂게 밀어내는 바람에 고고클럽 〈코파카바나〉로 해서 극장식당 〈월드컵〉, 〈유정낙지〉가 있는 골목을 정신없이 도망쳐다녀야 했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그때와 좀 달랐다. 상인들은 호객행위를 할 때처럼 시위대를 다투듯이 데려가 가게 안에 숨겨주었다. 그뿐 아니었다. 사복 체포조가 뒤쫓아와 숨어 있던 학생 하나를 끄집어내는가 하는 찰나, 그 이름도 용맹한 넥타이 부대가 미식축구 선수들처럼 우르르 달려들어 덮쳐버리는 것이었다.

다시 길로 나온 두환과 조국은 술냄새를 풍기며 시국에 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넥타이 부댄가 뭔가 왜 저렇게 겁이 없냐? 정강이에 돌 맞으면 얼마나 아픈데.”

“겁이 없는 게 아니라 더 이상은 못 참게 된 거지.”

“데모는 왜 하는 건데? 이놈의 세상은 알 수가 없어.”

“민주화란 말도 안 들어봤냐? 독재를 끝내라고 그러는 거야.”

“독재? 폭군 연산군 같이 말야?”

“그렇지. 연산군도 결국 중종이 반정을 일으켜서 짤리잖아.”

“아하, 태, 정, 태, 세, 그거? 연산군 다음에 중종이었냐?”

“중, 인, 명, 그렇게 나가. 중종이 잘못하니까 인조가 또 반정을 일으켜서 뒤집어엎는

거지. 역사란 다 그런 거야.”

나는 중종 다음의 '인'은 인조가 아니라 인종이라고 고쳐주려다가 내버려두었다. 조국은 저 알고 싶은 대로 아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우긴다. 그가 우기기 시작하면 인종 자신까지도 자기가 인조일지도 모른다고 헛갈리고 말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이미 그의 삶의 방식으로 굳어진 다음에야 굳이 오류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무식하다는 소리에 조국처럼 대범하기도 힘든 일 아닌가.

꽤 오랫동안 걸었지만 우리는 적당한 술집을 발견하지 못했다. 낮술 탓에 셋은 완전히 지친 모양이었다. 눈동자와 넥타이가 함께 풀어헤쳐지고 양복 저고리도 벗어부친 지 오래였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분노와 슬픔을 그렇게 온몸으로 표현하기도 힘들 것이다.

진압이 과격해졌고 시위대에서 더욱 많은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부상 학생과 시민을 치료하는 의대 봉사팀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 사이를 취재기자들이 바쁘게 누비고 있었다. 그제서야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가로수 잎 속에 숨어 구경하던 바람이 이따금 자리를 옮기느라 나뭇가지를 발로 차곤 했다. 세상 전체가 술렁였고 소리높이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뭘?

두환이 울기 시작했다. 소희가 죽었어, 소희가 죽었다구! 그때 우리들이 있는 바로 몇 미터 앞에서 최루탄이 터졌다. 승주와 조국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새출발 해야지. 임마, 인제 서른살인데 뭐. 우리 만수산 4인방도 이렇게 다시 뭉쳤잖아. 눈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나도 한마디 했다. 야, 저기 호프집 하나 있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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