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리그(23)

  • 입력 1998년 11월 15일 19시 52분


▼ 국상②

밥을 먹을 때에도 조국과 승주는 미영을 둘러싸고 꽤나 떠들어댔다. 미영이 반찬으로 팔을 뻗을 때마다 잽싸게 그 그릇을 집어 미영의 앞에 갖다놓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찌개는 물론 깻잎, 김 따위의 밑반찬도 모두 미영의 앞에만 차려졌다. 운총 앞에는 김치뿐이었다. 운총이 길다란 잎을 찢으려고 일 분 넘게 김치와 씨름을 벌이고 있는데도 나무젓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끈질기게 김치를 찢었다. 김치의 섬유질만큼이나 질긴 여자였다.

우리가 서울역으로 돌아왔을 때는 어두워져 있었다. 거리의 분위기가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계속해서 불협화음의 이중창을 부르며 왔던 승주와 미영, 그 옆에서 비스켓과 사이다를 먹어대던 조국의 얼굴에도 그제서야 불안이 서렸다.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내가 재수하던 해 우리 가족은 모두 서울로 이사를 왔다. 우리 집은 화곡동에 있었다. 588번 시내버스의 라디오를 통해 나는 ‘유고’의 의미를 알았다. 그 말은 국문과 2학년생인 내 귀에도 무척 낯선 단어였다.

관광경영학과 3학년인 승주의 대학은 경기도에 있는 분교였다. 그러나 하숙집은 신촌에 있었다. 그날 승주는 독재자의 죽음을 경하한다 어쩐다 하며 밤새 소주판을 벌이는 옆방 하숙생들에게 ‘여자와 놀러 갔다와서 피곤하니 조용히 하라!’고 소리쳤다가 깡소주 한 잔을 얻어마셨다.

조국은 2년제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공대 편입을 준비중이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무직에다 주거부정이었다. 발 고린내를 유지한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던 그는 다음날 아침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이 대한민국 정치사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알았다. 아버지가 이제 공업입국의 시대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으니 특혜편입 제도도 없어질 거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제 전 어떡해요? 조국은 남아의 기상을 잃지 않고 씩씩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고 대답했다. 정말 모르는 것 같았다.

한편 운총과 미영은 점호시간 9시를 10분 앞두고 기숙사에 도착했다. 다른 날 같으면 지루하고 조용하기만 할 기숙사의 분위기가 웬일인지 몹시 수선스러웠다. 모두들 짐을 싸고 있었다. 학교는 당분간 문을 닫을 거라고 했고 그렇게 되면 기숙사도 당연히 폐쇄였다. 점호가 끝나자마자 운총은 탈춤반 선배이기도 한 같은 과의 4학년에게 가서 빌려주었던 책 〈8억인과의 대화〉를 돌려받았다. 그 방 1학년은 심수봉의 노래 테이프를 들으면서 크림 마사지를 하고 있었다.

운총은 생긴 그대로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그녀는 너댓 달에 한번씩 파마를 하고 간간이 외국어학원에 다녔으며 조동진과 성룡을 좋아했다. 거리에서 돌을 몇 번 던졌고 한 번인가는 전경에게 잡히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고 아무 약속도 받아낸 적 없으면서, 제대하기까지 3년, 복학하여 졸업하기까지 2년 반, 취직한 뒤 4년, 도합 9년 반을 혼자서 끈질기게 기다린 뒤 나와 결혼했다. 결혼식장에서 나는 생각했다. 애초에 승주하고 얽힌 내가 잘못이지.

<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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