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9)

  • 입력 1998년 7월 28일 19시 27분


제1장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다 ⑨

수는 자신의 방 침대에 여기 저기 얼룩이 묻은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미흔도 자신의 침대 속에서 백지장같이 창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발 디딜 곳 없는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마트에서 사온 쇼핑 봉지들을 벽을 향해 힘껏 걷어 차 버렸다. 먼 곳까지 왔는데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흔은 자신의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이나 마트에도 거의 가지 않았다. 쇼핑은 내가 했다. 아침에 먹을 시리얼들이 가장 부피가 컸다. 쇠고기와 돼지고기, 생선, 시금치, 콩나물, 무, 오이, 파 양파, 마늘, 스낵, 빵, 핫케이크 가루, 그리고 세제나 속옷, 수의 양말과 학교에 가져 갈 준비물까지도….

저녁이면 미흔은 냉장고를 열고 그 속에 있는 재료들로만 한 두가지 반찬을 했다. 찬거리가 전혀 없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기하게도 한두 가지 반찬은 만들어 냈다. 냉장고 속에 있는 오래된 냉동 생선과 변색된 육류, 시들은 야채와 냄새가 다 빠진 멸치 따위를 꺼내, 볶거나 데치거나 조리거나 이것저것 뒤섞어 찌개를 만들어 놓았다. 무슨 의미도 없는, 그저 두어가지 반찬을 만드는 것으로 충분한 무의미한 행위들이었다. 물론 맛이랄 건 없었다. 그녀는 간을 맞추는 일조차 잊었는지 아니면 혀가 감각을 상실했는지 간을 맞추지 못했다. 극도의 무감각이 있을 뿐이었다.

미흔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부희 이야기를 하면서 부터였다. 미흔은 수를 데리고 부희의 빈 집 앞을 지나 마을을 지나고 언덕 위의 집으로 오는 코스를 차차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더러는 곧장 집으로 오지 않고 텅 빈 오후의 시골길을 시속 30킬로미터 정도로 천천히 달려 다른 마을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미흔은 말했다.

‘자다가 깨면 세상이 노래가 지워진 빈 테이프를 듣는 것 같이 고요해.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을까?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아. 그리고 아이들 재재거리는 소리도. 전화벨 소리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기척도 없어. 이따금 새 소리가 들리지. 하지만 새소리가 들리면 새 소리의 간격 사이사이로 나만 남겨두고 세상이 아득히 사라져버린 듯 더욱 적요해. 하루라는 것이 꼭 지워진 빈 테이프를 끝까지 듣고 또 듣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창틀 위에 앉아 계단처럼 아래로 펼쳐진 논밭들과 하얀 길을 내려다보아도, 한낮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아. 까치가 내려앉는 묵정밭과 무덤들, 벼가 자라는 연둣빛 들과 고래만큼 큰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내 숨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넌 살아 있다고 말하는 거야. 이곳이 좋아질 것 같아. 좋아.’

어느 날은 집에 가니 미흔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자정이 다 된 깊은 밤이었다. 미흔이 그렇게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사하라 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씻지도 않고 지친 몸을 소파 위에 비스듬히 부리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사하라는 73년부터 있었던 6년 동안의 가뭄으로 해마다 조금씩 더 넓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 사하라 사막에 테미안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의 어린 처녀가 낙타를 팔러 떠난 약혼자가 돌아오지 않아 망상과 두통병에 걸려버렸다. 병이 깊어지자 처녀의 부모는 집으로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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