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더 꼬인 韓-러 갈등

  • 입력 1998년 7월 27일 19시 34분


정보담당 외교관의 추방과 맞추방으로 갈등을 빚은 한―러관계가 봉합되는 듯했으나 양국 외무장관회담 결렬로 더 꼬이는 양상이다. 그동안 누적된 대한(對韓)감정 때문에 러시아측이 ‘한국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많다. 사실이라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작은 마찰을 구실로 전체 외교관계까지 긴장상태로 몰아간다면 성숙되지 못한 자세다.

마닐라에서 박정수(朴定洙)외교통상부장관과 회담을 가진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무언가 새로운 요구들을 내놓았다는 보도다.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내 한국 외교관의 정보수집활동에 관한 규제안이라는 관측이다. 이는 외교관 상호추방 사건의 수습이 아니라 다시 거론하는 모양새다. 한국이 러시아측 요구대로 정보외교관 5명의 자진철수를 받아들인 것은 불필요한 외교소모전을 조기에 끝내고 미래의 건설적인 양국관계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러시아정부는 이 점을 성찰해야 한다.

러시아측은 또 한국이 맞추방한 러시아 정보외교관의 재입국도 다시 요구했다고 한다. 일단 ‘기피인물’로 출국조치된 외교관이 그 나라에 재입국한 사례는 아직 없다. 러시아 외무부가 이를 제기한 것은 사건의 수습보다도 ‘한국압박’ 작전을 준비해 왔다는 증거가 된다. 프리마코프장관의 태도는 다분히 기습적이었다. 한국측이 러시아어로 통역을 하는데도 러시아측이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통역한 것은 어느 외무장관회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무례다. 한국은 그만큼 외교적 수모를 당한 것이다.

러시아측의 무례는 냉전시대 대국주의 잔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6·25전쟁의 구원(舊怨)을 씻고 90년 한소(韓蘇)수교를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고뇌가 있었다. 당시 한국이 소련의 정치군사적 협력을, 소련은 한국의 경제협력을 각각 기대했으나 그 열기가 식은 것이 오늘날 한―러갈등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의 ‘남북한 등거리’카드설도 없지 않다. 장기적인 양국관계 모델을 정립하지 못했다는 증상들이다.

러시아측의 진의와 움직임을 사전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외무장관회담에 안이하게 대처한 외교통상부는 크게 자성해야 한다. 4열강외교의 한 기둥인 한―러관계에서 지피지기(知彼知己)를 못한 우리 외교역량이 한심스럽다. 러시아가 배제된 4자회담에 관해 러시아측에 소외감을 불식시킬 만큼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반도 안정에 대한 4열강의 중요성을 말로만 되뇌지 말고 한―러갈등의 조기해소에 외교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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