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말많은 빅딜과 숨막히는 규제

  • 입력 1998년 6월 17일 19시 13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6일 국무회의에서 전례없는 어조로 내각을 질타한 이후 과천의 관가가 또 바빠졌다. 장관 주재의 대책회의가 잇달아 열리고 실무자들은 묘안을 찾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질책의 대상이 ‘재벌’이므로 재계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 역력하다.

김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강력한 자세로 국정을 챙기는 모습은 보기에 참으로 좋다. 조목조목 집어낸 지적들은 대통령의 안목과 자신감을 읽게 한다.

김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을 몰아세우며 언급한 여러 내용 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대통령의 경제관에 관한 항목들. ‘시장경제는 방관경제가 아니다’고 강조한 부분도 그 중의 하나다.

대통령의 평소 경제관을 생각할 때 이 부분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우선 ‘방관경제’라는 용어 자체가 생경하고 정부개입을 강화하는 시장경제의 개념과 논리가 무엇인지 혼란스럽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전체적인 문맥으론 개혁에 입각해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부처의 분위기를 독려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냉정하게 보면 ‘관료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다분히 있다.

‘빅딜’과 관련한 대목에선 특히 그렇다. 대통령이 격노해서 공개한 내용은 요지가 이렇다.

“퇴출기업 명단에 5대기업이 빠져 있어 돌려보냈다. 미국에선 얼마든지 빅딜을 하고 있다. 5대기업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이런 의사를 기업에 전달했고 자발적으로 의사를 전해왔다. 그래서 3개사가 합의했는데 한 회사가 거부해 좌절됐다. 약속했다가 뒤집는 것이 시장경제인가.”

우선 대통령이 말하는 ‘약속 뒤집기’는 시장경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강압에 대한 반발이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옳다. 정부의 막후조정을 통해 추진된 과정을 아무리 살펴도 3대 재벌이 자발적으로 의기가 투합해서 동의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살생부 작성도 금융기관이 알아서 한다고 정부는 노상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강압에 기업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강압에 의한 ‘이행약속’이 효력이 있다고도 할 수 없다. 미국에 빅딜이 있다고 하지만 그거야말로 규모의 경제를 창출해서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자발적인 제휴의 결과다.

이 점에서 우리의 빅딜은 무모하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누구도 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모양 갖추기’ 이상의 무슨 의미가 더 있는가. 빅딜보다 더 급한 기아 한보처리 문제가 표류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규제문제도 마찬가지. 수천가지가 없어졌다고 떠들지만 현장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얼마전 리조트 단지를 완공한 한 기업의 얘기를 들어보면 숨이 콱콱 막힌다.

사업착수에서 준공 사용 승인을 받기까지 6년 동안 1백80차례의 행정절차를 거쳐 도장만 4천8백60개를 찍었다고 한다.

왜 이렇게도 많은 도장이 필요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현행 법규상 아이스크림을 파는 집에선 간단한 맥주조차 팔 수가 없다. 맥주를 팔려면 단지 안에 점포를 따로 열어야 하고 물론 사업자 등록증도 별개로 받아야 한다. 단지 안의 골프장도 그늘집마다 별도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이 결과로 리조트 단지 하나에 사업자등록증만 40여개에 달한다. 이게 규제의 현실이다. 규제개혁 하나를 하더라도 현장을 좀 알고 덤벼야 국민의 박수를 받을 수 있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kung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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