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사내 ‘낮술낭독회’ 10년 맞아… 한달에 한번 각자 마실 술-책 들고와
낭독땐 직책 호칭 없애고 이름 불러
멤버 고향집 찾아가 원정낭독까지
“탕비실서 안부 묻는 깨알같은 토크… 직장생활 버티게 하는 작은 힘이 돼”
민음사 사내모임 ‘낮술낭독회’엔 회사 생활의 상식을 비트는 세 가지가 있다. 회사 사람을 주말에도 만나고, 띠동갑 넘는 상사를 이름으로 부른다. 게다가 책 만드는 게 일인 사람들이 휴일에 모여 책을 읽는다. 하지만 이런 낯선 장면들이 모여 조직에 기분 좋은 나비효과를 퍼뜨리고 있다. 5일 민음사에서 만난 이한솔, 이정화, 신새벽 편집자(왼쪽부터).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회사 사무실 풍경을 떠올려 보자. 파티션 너머 김 대리, 요즘 일이 잔뜩 몰린 얼굴이다. 하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도 바쁘니까. 애써 모른 척 눈감는다. 그리고 며칠 뒤 들려오는 소식.
“김 대리 퇴사한대.”
누군가에겐 익숙한 직장인의 일상이다. 각자도생은 사회 생활의 기본값. 그런데 여기, 토요일 회사 동료들이 모여 ‘술 마시며 책 읽는’ 사내 모임이 있다. 출판사 민음사의 ‘낮술낭독회’다. 2017년 시작해 어느덧 10년 차. 회원 중 세 명은 지난달 18일 에세이 ‘낮술, 낭독’(세미콜론)까지 펴냈다. 포부도 당차다. “K직장에 낭독 모임을 전파하겠다”고 한다.
5일 서울 강남구 민음사에서 저자들이자 낮술낭독회 회원인 이정화(51), 이한솔(37), 신새벽(38) 편집자를 만났다. 이들은 사적인 자리에선 나이와 직급을 따지지 않고 반말, 이른바 ‘평어’를 예의 있게 쓴다. 막내 한솔이 “정화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식이다. 퇴근 뒤까지 수직적 관계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사내 모임을 멀리하는 시대, 낮술낭독회는 위계를 내려놓는 방식으로 반전을 꾀했다.
낮술낭독회는 술과 낭독, 사람을 좋아하는 정화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현재 회원은 7명, 모두 여성이다. 평균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오후 2시쯤 각자 읽고 싶은 책과 술 한 병을 들고 모인다. 돌아가며 책을 낭독하고, 열심히 듣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눈다.
꽤 고상한 모임 같지만, 이 모임 ‘찐’하다. 새벽 2시에 파하는 건 예사고, 아침 해장까지 하고 헤어진 적도 있다. 서로의 집은 물론 고향집에도 간다. 지리산, 경기 안성, 경남 통영까지 원정 낭독회도 다녔다. 어느새 몇몇 회원의 남편들도 객원 멤버가 됐다. 퇴사자도 낮술낭독회엔 온다고 한다.
직장 동료에, 그 배우자까지 함께하는 모임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들은 그 비결을 “낭독의 매직”에서 찾았다. 정화는 “처음엔 다들 주저한다. 그런데 낭독이 시작되면 공기가 확 달라진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올라온다”고 했다. “내향적인 사람들이 의외로 낭독을 잘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낭독이 말을 트는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극내향인으로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 역시 ‘변신’, ‘유형지에서’ 같은 작품을 낭독으로 처음 발표했다.
왜 하필 ‘회사 사람들’과 놀게 된 걸까. 새벽은 “주역에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회사에서) 너무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이런 새로움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 있었다”고 했다. 14년 차 편집자인 그는 “낭독회를 시작했을 무렵, 조직 분위기가 지금처럼 활기차지 않았다. 서로 말도 잘 안 하고, 밥도 각자 먹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떠올렸다.
궁해서 시작한 모임이 어느새 회사 생활의 숨통이 됐다. 한솔은 이를 윤활유에 빗댔다.
“탕비실에서 스몰토크 잘하는 직원 있잖아요. ‘주말에 뭐 했어요?’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사실 그런 대화가 조직을 굴러가게 해요. 회사란 결국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니까요.”
이제 이들은 낮술낭독회를 회사 밖으로 ‘전파’할 준비를 하고 있다. 북토크는 물론, 신중년 대상 모임, 사회 초년생 모임, 과장·팀장·대리 모임도 구상 중이다. 낭독이 처음인 이들을 위한 팁도 전수했다. 여러 곳에서 발췌한 짧은 문장을 열 개쯤 준비해 제비뽑기처럼 골라 읽는 것. 그렇게 읽은 문장을 서로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회사 사람들과 술 마시며 책 읽기.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지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김 대리가 퇴사 소식으로만 기억되는 일은 줄어들 테니.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