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관을 찾아서①]15대 이어온 조선 도공의 길

  • 입력 1998년 6월 14일 19시 39분


《4백년 전 일본에 조선의 도예를 전하고 조선 도공의 예술혼을 이어온 심수관가(沈壽官家)를 조명한 ‘4백년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 도예전’이 7월7일부터 시작된다. 동아일보사와 일민미술관이 정부수립 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마련한 기획. 작가 한수산(韓水山)씨가 일본의 심씨 도예원을 찾아 심수관가의 장인정신과 애환을 조망하는 시리즈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어제도 오늘도 가고시마(鹿兒島)에는 화산재가 뒤섞인 비가 내렸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다. 카메라며 녹음기를 챙겨넣고 자료들을 가방에 정리했다. 여관의 여인이 문 밖에 와 다다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작별 인사를 한다.

“다시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여인이 돌아가고난 후 그의말을 되새기며 비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고시마 본선 완행열차가 지나간다. 취재노트에 마지막 메모를 했다.

4백년의 시간이 이제 서울로 간다고 한다. 심수관가 14대, 그 4백년의 작품들, 그것은 하나의 서사시였다.… 길고 긴 로망. 그러므로 다만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것들을 만나야 한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아니, 그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때로는 울부짖고 때로는 흐느끼는, 때로는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며 한숨짓고, 때로는 자랑스럽게 ‘이제야 돌아왔습니다’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문외불출(門外不出)로 심수관가를 떠난 적이 없던 이 작품들을 만나는 감격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문득 처음 이곳에 와 심수관씨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비가 흩뿌렸었다. 나는 그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 4백 전의 선조들이 일본으로 끌려와 닿았던 해변과 그릇을 굽기 위해 처음 열었던 가마터들을 찾아다녔었다.

비 그친 저녁 어스름 속을 달려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던 길에 그는 작은 가게 앞에서 내렸었다. 잠시 후 승용차로 돌아온 그는 얼굴 가득 웃음이 번진 얼굴로 말했었다.

“손자가 이걸 가지고 싶다고 해서…. 장난감 권총입니다.”

인자한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는 우리 나이로 73세였다. 내가 불쑥 물었다.

“손자도 외아들인가요?”

대답은 의외였다. 손녀가 하나, 손자가 둘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16대만에 외아들이 아니군요.”

심수관 가계(家系)의 불가사의의 하나는 4백년간을 모두 외아들로만 이어져왔다는 점이다. 15대도 외아들이다.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좀 복잡합니다.”

그는 조금도 복잡하지 않은, 환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이 끝나던 1598년 12월, 당시의 사쓰마 한(薩摩藩) 시마비라(島平) 해안까지 끌려온 조선 도공들은 남녀 43명, 박, 차, 하, 심, 이…를 비롯한 18개 성(姓)을 쓰고 있었다. 남원(南原)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된 심수관의 선조 심당길(沈當吉)도 거제도를 거쳐 여기까지 끌려왔다. 지금 그 자리에는 1981년에 세워진 비석이 서서, 바닷바람에 젖으며 말없이 그날을 증언한다.

‘게이초(慶長)3년 겨울, 아득히 바람과 파도를 넘어서 우리의 선조 이 땅에 상륙하다.’

다음해 이들은 박평의(朴平意)를 중심으로 구시키노(串木野)에 가마를 연다. 바다를 넘어온 조선 도공의 씨앗 하나가 떨어지는, 사쓰마야키(燒)의 발원이었다.

첫째가 흙(粘土), 둘째가 기(技), 셋째가 가마(窯)라고 말한다. 도자기의 세계다. 거기 몸바쳐 4백년을 보낸 심수관 가문이다.

15대가 되도록 오직 외아들을, 그것도 다나이가들어서야하나씩 두게 되는 이 신비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단한세대도거르지않고묵묵히 도공의 길을 걸었다. 4백년을 오직 외아들에서 외아들로 이어져 내려온 도공 가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16대를 이어갈 그의 손자대에서 처음으로 아들 형제가 태어나 자라고 있다니.

그리고 이제 고국을 떠나 장렬(壯烈)했던 그 4백년의 작품들이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간다. 영혼의 귀향, 한 가문이 줄기차게 지켜온 14대의 도혼(陶魂)이 고향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수산(작가·세종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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