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45)

  • 입력 1997년 2월 17일 20시 15분


독립군 김운하 〈16〉 어떤 서랍이든 자주 열지 않으면 그 안의 것들은 언젠가 잊어버리게 되고 만다. 그러다 나중엔 열고 싶어도 그 서랍은 너무 깊이 닫혀 있어 아무리 열려고 해도 잘 열리지 조차 않게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아니라 해도 잠시 전 이 남자가 말했던 대로 안타까움도 우리의 그런 기억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제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그때 열일곱 살이었던 한 여자 아이가 스물두 살의 한 여자로 성장하기까지의 아름다움으로만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억이 희미해져 가면 그땐 아저씨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나는 새 서랍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땠을 것 같아요?』 『모르니까 묻는 거지요』 그녀는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직 이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던 한 소녀의 사랑과 성장에 대하여. 독립군은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때로는 턱을 괴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처음 만나 이야기하는 남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하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독립군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녀의 아름답고도 아픈 예전의 기억들이 아니라 그런 아름다움과 아픔이 아직 다 정리되지 못한 그녀의 내면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마워요』 이야기를 다 하고 나서 그녀는 두 손을 펴 가볍게 눈 주위를 누르며 말했다. 잠시 전 이야기를 할 땐 그러지 않았는데, 눈가로 손을 올리자 그곳에 물기가 묻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가요?』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요』 『몰랐어요. 내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뇨. 그래서 더 이야기할 자신이 생겼는지 몰라요』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세상에 대한 우리 이해가 더 깊어지겠지요』 밖으로 나오자 이른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자, 타요. 다시 역까지 모셔드릴 테니까』 그녀는 그의 등 뒤에 앉아 아까처럼 그의 허리를 잡았다. 『오늘 만나서 기뻤어요』 『저도요』 어딘가 한가닥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결이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간질렀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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