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대선후보」의 笑劇

  • 입력 1996년 10월 28일 20시 24분


지금은 영어(囹圄)의 몸이 된 盧泰愚전대통령처럼 「부정직 시비」를 많이 불러일으킨 정치인도 흔치 않다. 일거에 국제적 명성을 얻은 6.29선언에도 숱한 뒷말이 따랐고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부정축재문제만 해도 다름아닌 「겉다르고 속다른」 행태의 소산이었다. 더욱 착잡한 사실은 盧전대통령의 경우 부정직한 술수를 마치 굉장한 정치역량으로 오판한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친구인 鄭鎬溶씨에게 광주문제의 책임을 물어 의원직을 박탈할 때도 그랬고, 5공청산에 이은 3당합당 때도 그는 표리부동(表裏不同)의 면모를 여지없이 발휘했다. ▼ 與 「투명경선」 의지 있나 ▼ 그러나 「盧泰愚식 정치」의 진면목은 뭐니뭐니해도 92년의 민자당 대통령후보경선 때 드러났다. 당시 그는 대선후보경선을 한국정치의 새 지평을 여는 금자탑인양 내세웠다. 아닌게 아니라 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집권여당내 대선후보경선에 쏠린 국민적 관심과 기대는 작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실상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盧전대통령은 줄곧 『나는 엄정중립』이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정인은 당선될 후보로, 특정인은 들러리 후보로 상정해 놓는가 하면 특정인은 아예 후보등록조차 막아버렸다. 뿐만아니라 대의원들에 대한 「외압설」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경선은 파국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정치의 새 지평을 여는 축제가 아니라 한마디로 볼썽사나운 소극(笑劇)에 불과했다.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자명하다. 지금 여권내에서 10명 가까운 대선후보들이 벌이는 레이스를 보며 「과연 92년과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권의 핵심인사들은 이미 『이번에는 대통령이 적임자에 대한 지지의사를 확실히 밝힐 것』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대통령도 당총재로서 엄연한 대의원인 이상 특정인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힌다고 해서 그 자체가 경선의 본질을 해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대의원들의 자유로운 총의(總意)에 따라 후보를 결정하는 「정직한 경선」을 국민앞에 보여줄 지도부의 의지와 제도적 뒷받침이 돼있느냐의 여부다. 이러한 요소들이 전제되지 않는 한 지금 강연이다 뭐다 하며 뛰고 있는 이른바 대선후보들도 소극의 주인공 신세를 면하기 어렵고 결국 국민들까지 우롱당하는 처지가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신한국당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무엇하나 확신을 갖기 힘들다. 「경선다운 경선」을 하겠다는 의지는 둘째치고 후보등록요건 등 제도적으로도 전망은 밝지 않다. 후보등록을 하려면 8개시도에서 각각 50명이상 대의원의 추천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의 권력현실상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룰-심판」부터 공정해야 ▼ 더구나 특정인에 대한 대통령의 지지의사가 확실하게 드러날 경우 줄세우기 압력과 들러리 후보의 사전결정과 같은 「92년식 경선」이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기야 『어떤 절차로 후보를 결정하든 당이 처해진 사정에 따라 하는 것이고 심판은 국민에게 받겠다』고 한다면 더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의 정직성」마저 도외시하는 상황이 되풀이돼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국민을 우롱하는 상황에서 결코 올곧은 정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기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룰과 심판부터 공정해야 한다. 李 度 晟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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