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용병의 인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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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두 스포츠부장
이현두 스포츠부장
프로야구 감독들은 통상 시즌 개막 경기의 선발 투수를 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투수에게 맡긴다. 흔히 말하는 에이스다. 투수 놀음으로 불리는 야구에서 에이스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팀이 우승컵을 품으려면 수준급의 기량을 갖춘 에이스는 반드시 보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올 시즌 국내 프로야구 개막 경기에 나선 선발 투수 10명 중 국내 투수는 KIA의 양현종이 유일했다. 올 시즌 KIA를 빼고 나머지 9개 팀의 에이스는 모두 외국인 선수인 셈이다.

야구만이 아니다. 종목을 가리지 않고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외국인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외국인 선수가 팀의 1년 성적을 좌우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성적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국내 프로팀들의 외국인 선수 선발 잣대는 오로지 기량뿐이었다. 외국인 선수를 우승 청부사나 용병으로 부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돈을 주고 고용한 병사라는 용병의 사전적 의미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팀은 외국인 선수를 상전(上典)으로 모셔 왔다. 발표한 계약금보다 더 많은 뒷돈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꾀병을 부리며 태업하는 것이 무서워 외국인 선수들의 무리한 요구까지 들어줘 왔다. 자연스럽게 한국에 온 것을 ‘봉’ 잡은 것으로 생각하는 외국인 선수들이 늘어났고, 외국인 선수들의 안하무인 격 행동도 그 수위가 높아져 갔다. 그에 따라 외국인 선수들과 소속 팀의 갈등도 잦아졌다.

곪으면 터지기 마련. 3월에 결국 사달이 났다. 프로농구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팀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려오던 LG의 외국인 선수 데이본 제퍼슨이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스트레칭을 하는 일탈행동을 했다. 국내에서 뛰던 외국인 선수들 중에서 기량으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들었던 제퍼슨은 다음 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손가락 욕설 사진까지 올렸다. 제퍼슨은 곧바로 퇴출됐지만 팬들의 비난은 LG 구단에도 쏟아졌다.

제퍼슨의 분탕질은 뜻하지 않게 긍정적인 반향도 불러왔다. 외국인 선수 선발 때 인성을 중요하게 보겠다는 팀들이 늘어난 것이다. 다음 시즌에 뛸 외국인 선수를 고르고 있는 프로농구팀의 한 관계자는 “기량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팀을 먼저 생각하는 인성이 된 외국인 선수가 팀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프로배구 OK저축은행의 김세진 감독이 입증해 보였다. 지난 시즌 프로배구 삼성화재의 8년 연속 우승을 저지하며 창단 2년 만에 OK저축은행이 정상에 오른 데는 쿠바 출신의 외국인 선수 시몬의 힘이 컸다. 물론 시몬은 기량에서 세계 정상급이다. 그러나 김 감독이 시몬을 뽑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기량이 아닌 인성이었다. 김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시몬을 만났을 때 어떤 선수인지 살펴보기 위해 와인을 마시며 면접을 했다. 그런데 직접 물도 가져오고, 스스로 호텔 체크인도 하더라. 주위를 배려할 줄 알았다. 기량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갖춘 선수였다”고 말했다. “내가 바랐던 시몬 효과를 톡톡히 봤다. 시몬을 잘 데려와 기적을 일궜다”는 김 감독의 말처럼 시몬은 경험이 적은 어린 한국 동료 선수들을 다독이는 역할까지 했다.

인성을 갖춘 외국인 선수들은 소속 팀에만 이득을 주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의 주요 고객은 청소년이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의 말과 행동은 청소년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된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기량과 인성을 모두 갖춘 선수는 더없이 좋은 교사다. 더 바란다면 스포츠에서 불기 시작한 인성 중시 바람이 막말로 시끄러운 여의도까지 퍼져 갔으면 한다.

이현두 스포츠부장 ruchi@donga.com
#용병#인성#기량#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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