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1년 7월 16일 18시 2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16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권좌에서 내려 온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퇴장 무대는 21년전 그의 시대 개막을 알린 모스크바였다.
2대 IOC위원장으로 30년간 재임했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에 이어 역대 두번째 장기 집권에 성공했던 그는 모든 장기 집권자가 그렇듯이 영욕의 시대를 보내왔고 그에 대한 평가 또한 명암이 교차한다.
그가 1980년 모스크바총회에서 IOC위원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치밀한 계산과 당시 소련의 욕구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966년 스페인 프랑코 독재정권의 후원을 등에 업고 IOC위원이 된 그는 1975년 프랑코 정권이 무너지자 2년 뒤 올림픽 개최를 눈앞에 둔 모스크바대사로 부임했다. 당시 스페인정부는 그를 빈(오스트리아)대사에 임명하려 했으나 모스크바총회에서 IOC위원장에 당선되려던 야욕을 갖고 있던 그는 모스크바대사를 고집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서방국가의 불참으로 올림픽 개최가 불확실해진 소련 정부는 IOC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이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끝에 그 대가로 소련과 공산국가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고 무난히 위원장에 올랐던 것.
올 초 독일의 ‘스포르트 인테른’이 33개국 스포츠전문가 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68표를 얻어 축구스타 펠레와 쿠베르탱을 누르고 20세기 최고의 체육인에 선정되기도 한 그는 올림픽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만든 위원장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실제 1976년 몬트리올대회가 10억달러의 손실을 본 반면 그가 위원장으로서 처음 치른 1984년 로스앤젤레스대회는 2억달러의 흑자를 내며 최초의 흑자 올림픽으로 기록됐다. 이 때문에 로스앤젤레스가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을 때만 해도 로스앤젤레스시의회조차 “시의회 예산을 한푼도 쓸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대회 개최를 희망하는 도시가 적었으나 로스앤젤레스대회 후에는 사정이 정반대가 됐다.
하지만 상업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그를 향한 비난의 주무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상업화에 너무 집착해 올림픽 정신을 훼손한 인물이 바로 사마란치라는 것. 그를 비난하는 측은 그가 위원장 취임 후 상업주의에 반대하는 위원들을 교체하고 프로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다국적기업의 요구 사항을 충실히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너무 상업화를 추진하다 그의 이름을 빗댄 ‘사마추어리즘’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때는 대회 기간 내내 도시 전체가 광고판으로 가득차 ‘코카콜라 올림픽’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 1998년 그 자신 또한 휘말려 들어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IOC위원들의 뇌물수수사건도 이같은 상업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높다. 그는 결국 이 사건으로 1999년 미하원 청문회에 불려나간데 이어 지난해 2월에는 미국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의 조사까지 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같은 비난에 대한 그의 강변 또한 만만치 않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기 동안 IOC가 재정면에서 세계적 거대 기업으로 성장한 점을 강조하며 “80년 당시 파산상태에 가까웠던 IOC재정이 4년간 수입이 35억달러, 올림픽 공식 스폰서료가 5000만달러에 이를 만큼 좋아졌다”고 말했다.
그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은 독재에 가까운 장기집권. 그는 3선 임기가 끝나던 97년 77세가 돼 IOC위원 정년 초과로 위원장에서 물러나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는 1995년 위원장의 권한을 이용해 정년을 80세로 고침으로써 위원장 4선 관문을 통과했었다.
그는 또 지난해까지만 해도 차기 위원장 선거에서 자신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공언해왔으나 올 들어 자크 로게를 공공연하게 지지하며 IOC내에 자신의 입지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이 때문에 퇴임 후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여생을 보내며 회고록을 완성하겠다는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IOC위원은 거의 없다.
<이현두기자>ruch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