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계 악습 ‘태움’ 필요악? “생명 다루는 직업…제대로 빠르게 가르치려고”

  • 동아닷컴
  • 입력 2018년 2월 19일 11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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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모 대형병원 간호사 A 씨(28·여)가 설연휴가 시작된 지난 15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그 배경으로 지목된 간호업계 문화 ‘태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자신을 A 씨의 남자친구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18일 페이스북 페이지 ‘간호학과, 간호사 대나무숲’을 통해 “제 여자구의 죽음이 그저 개인적인 이유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간호부 윗선에서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태움’이라는 것이 여자친구를 벼랑 끝으로 몰아간 요소 중 하나가 아닐까싶다”고 밝혔다.

또 여자친구가 평소에도 “출근하기 무섭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지” 등의 말을 자주했다며 숨지기 전날엔 자신에게 메시지로 “나 큰 일 났어, 무서워 어떡해”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태움이란 들들 볶다 못해 재가 될 때 까지 태운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은어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괴롭히며 가르치는 방식을 지칭한다.

태움은 선후배 간 훈계의 차원을 넘어 따돌림이나 신체적 폭력까지 동반되기도 한다. ‘태움’에 시달리던 간호사가 만성질환을 얻거나 유산해서 병원을 그만두는 경우도 다반사다.

생명과 직결되는 간호사의 업무는 작은 실수도 용납이 안 되고, 인력부족으로 인한 업무가중, 진상 환자나 보호자의 불만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태움이라는 악습이 사라지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2013년 ‘정신간호학회지’에 발표된 조사에 따르면, 간호사가 근무 기간 내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경우는 60.9%였고, 이 중 괴롭힘을 경험한 시기는 근무 경력 1년 이내가 58.1%를 차지했다. 입사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경험하는 경우도 14.0%에 달했다.

익명의 간호사는 당시 주간동아에 “내가 아는 간호사들은 잘하건 못하건 태움을 당했다. 실수한 걸 혼내면서 ‘너는 머리가 있느냐’와 같이 필요 없는 얘기를 덧붙이거나, 일부러 여러 사람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줬다. 심할 때는 ‘쟤 인사도 받아주지 마라’며 따돌리기도 했다. 수간호사가 작정하면 아래 간호사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현 상태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해결할 때까지 집에 보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간호사도 “혼잣말을 한다거나, 지나치게 긍정적이라는 이유로 태움을 당했다. 태움은 병원이 어디냐보다 선배가 누구냐에 따라 당할 수도 있고, 안 당할 수도 있다. 선배가 되면 태움을 당해봐야 제대로, 빠르게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후배들을 태운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면 긴장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태우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다.

간호학과 재학시절에는 선후배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던 한 간호사는 병원에 가니 상황이 달라졌다며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다른 직업에 비해 실수에 더욱 예민하고 주의할 수밖에 없다. 태움은 관습적으로 이어져온 것일 수 있지만, 간호사들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 발생하기도 한다. 날마다 교대 근무를 하면서 업무를 인수인계해야 하는 현 구조상 앞 근무 간호사가 맡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면 교대하는 간호사의 업무량은 더 많아진다”고 말했다.

신규 시절 태움을 당했으나 지금은 태우는 처지가 된 중견 간호사는 “간호사 사회도 군대만큼 폐쇄적이고 계급을 중시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그런 문화가 싫었는데, 병원 일이 힘들고 후배 간호사가 일을 잘하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안 좋은 모습이 나올 때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는 “미국 간호사라고 다를 건 없지만, 국내처럼 대놓고 후보 간호사들을 태우지는 않는다. 미국 사회는 개인주의적인 데다 고소가 일반화돼 있어 뒤에서 뭐라고 할지는 몰라도 대놓고 폭언하거나 집에 보내지 않는 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 고소당하기 십상이다.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병원 핫라인 등을 통해 신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5일 오전 10시 30분경 A 씨가 송파구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A 씨가 아파트 고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린 것으로 보고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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