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사, 임금삭감에 불만 쌓여… 휘발유-라이터 미리 준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中경찰 “유치원버스 참사는 방화”

참혹한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사도 추모했는데… 지난달 9일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의 한 터널에서 불이 나
 전소된 중세국제학교 부설 유치원 통학버스(왼쪽 사진). 현지에 분향소가 마련됐을 때만 해도 운전사는 아이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피해자로 분류돼 영정이 어린이들과 나란히 놓였었다. 웨이하이=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웨이하이 한인회 제공
참혹한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사도 추모했는데… 지난달 9일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의 한 터널에서 불이 나 전소된 중세국제학교 부설 유치원 통학버스(왼쪽 사진). 현지에 분향소가 마련됐을 때만 해도 운전사는 아이들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피해자로 분류돼 영정이 어린이들과 나란히 놓였었다. 웨이하이=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웨이하이 한인회 제공

‘회사에 대한 오랜 불만이 해고 통지로 폭발했다.’

한국인 유치원생 10명을 비롯해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 유치원 통학버스에 불을 지른 운전사 충웨이쯔(叢威滋·55) 씨의 범행 동기는 이렇게 요약된다. 2015년부터 임금이 삭감돼 불만이 쌓인 상태에서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자 바로 다음 날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중국 수사당국이 사고 24일 만에 내놓은 결과다.

중국 산둥성 공안청은 2일 웨이하이 란톈(藍天)호텔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범행 당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해당 시간대 터널을 지났던 차량 280여 대의 블랙박스 등을 면밀히 분석했다고 밝혔다. 충 씨의 동선 파악과 아내를 비롯한 주변인 조사를 통해 충 씨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현장 감식을 위해 공안부 톈진(天津) 소방연구소, 사법부 사법 감증 과학연구소, 산둥성 공안청, 칭다오(靑島) 공안국 형사지대 기술처 등이 총동원됐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까지 철저한 조사를 지시해 중국 공안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치밀한 조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당국과 현지 수사당국에 따르면 버스 운전석 뒤 바닥이 최초 발화 지점으로 파악됐다. 버스 곳곳에선 연소된 휘발유 흔적이 발견됐고, 일회용 라이터 상단의 금속제 바람막이 부분도 발견됐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충 씨가 미리 준비한 라이터와 휘발유로 방화했다는 것이다. 버스가 추돌했던 앞차의 속도가 시속 25km 이하여서 과속으로 인한 화재일 가능성이 낮은 데다 버스 연료통에 발화 흔적도 없었으며 전기회로 결함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수사 당국은 충 씨가 범행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라이터와 휘발유를 구입하는 폐쇄회로(CC)TV 영상도 확보했다. 범행 보름여 전인 4월 20일 휘발유통을 들고 한 마트에서 라이터를 사는 모습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는 장면이 찍혔다. 충 씨가 버스 앞쪽 화물칸에 휘발유통을 넣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나왔다. 수사 당국은 충 씨가 버스 화물칸에 타이어 4개를 미리 넣어 놔 화재를 키웠던 것으로 보고 있다.

충 씨의 범행에는 회사에 대한 불만과 소극적인 성격 등이 복합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경제 활동을 했던 그가 임금이 삭감되고 해고 위기에 몰리며 심한 압박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충 씨의 부인은 전업주부이며, 최근 결혼한 딸도 무직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월 4000위안(약 66만 원)을 받던 충 씨는 2015년 3월 야간수당 등이 감소돼 40%가량 줄어든 2500위안(약 41만 원)을 받게 돼 불만이 높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4월 17일부터 줄곧 달력에 ‘×’를 표시하는 등 불안정한 상태였다”고 진술했다. 범행 전날 학교 버스의 관리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아 쌓였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

내성적인 성격도 배경으로 꼽힌다. 그는 평소 회사 동료를 비롯해 주변과 교류가 거의 없었으며 수사 당국이 확보한 통화기록과 문자메시지도 매우 적었다. 끝내 유언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고 당시 맞은편에서 오던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에선 충 씨가 인솔 여교사인 위나(于娜) 씨로 추정되는 어른과 몸싸움을 벌인 것으로 나타났다. 화재 후에도 아이들을 구할 수 없었던 한 이유로 추정된다.

위 씨는 사고 후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족 대표 김미석 씨의 딸 가은 양을 데리고 차량 밖으로 나온 뒤 발견됐지만 가은 양도 숨진 채 발견됐다. 여교사는 치료를 받다 12일 숨졌다.

하지만 수사 결과에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다. 당국은 버스 운전석 뒤를 발화 지점으로 꼽고 있지만 사고 당시 촬영된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운전석 쪽이 아닌 차량 오른쪽 앞부분에서 먼저 거센 불길이 이는 것이 확인된다. 충 씨의 시신이 버스 통로 중간에서 발견된 점도 의문이다. 불을 지르고 도망치거나 운전석에 있지 않고 왜 버스 중간까지 갔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고 버스가 국영기업인 웨이하이공공교통그룹여행 소속이라 중국 당국이 차량 결함을 비롯한 구조적 문제일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외교 당국에 따르면 중국은 충 씨가 라이터를 켜 휘발유에 불을 붙이는 결정적인 범행 장면이 담긴 동영상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유족들은 경찰이 공개한 영상에 담긴 정황 증거를 통해 수사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공안이 유족에게 추가로 공개한 동영상에는 충 씨가 버스 하단 트렁크에 놓아둔 33L짜리 통과 이보다 작은 통에 각각 휘발유를 담는 장면이 나온다. 또 사고 당일 오전 6시경 운전석 뒤에 휘발유통을 갖다놓는 장면도 공개됐다. 유족들은 이런 추가 영상을 확인한 다음 중국 공안의 수사 결과를 따르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예리윈(葉立耘) 웨이하이시 부시장 겸 공안국장은 배상 문제와 관련해 “이번 사고는 형사 사건으로 배상 책임도 중국 법에 따라 진행할 것”이라면서 “시 정부에서 전문 담당 부서를 만들어 배상 문제를 협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버스 화재로 숨진 아이들의 목숨을 운전사가 앗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학부모들의 불안감도 높아졌다. 4세 딸을 키우는 손미애 씨(31·여)는 “운전사를 채용할 때 도덕성 등을 따져보고 채용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고 말했다. 4월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의 대표 발의로 어린이 통학차량 운전자 자격을 제한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웨이하이=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윤완준·서형석 기자
#방화#중국#유치원버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