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룡

구자룡 기자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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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자룡 기자입니다.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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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7~2024-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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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 反中 총통 당선, 한-중 소통 더 중요해졌다”

    대만 총통 선거에서 반중(反中) 성향 민진당 후보가 당선돼 양안 및 미중 갈등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북한은 새해 벽두 서해 포사격과 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남한 정복을 헌법에 넣자고 노골적인 협박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16일 대만 총통 선거의 의미를 분석하고 올해 한반도 안보를 점검했다. 신정승 동서대 석좌교수(전 주중 대사), 문흥호 한양대 명예교수, 신성호 서울대 교수(국제학연구소장)가 참석했다. 사회는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 중국의 선거 개입 논란 구자룡 소장=대만 총통 선거에서 중국의 개입 논란이 가장 큰 화두였다. 마잉주(馬英九) 전 총통의 ‘시진핑(習近平) 신뢰’ 발언은 반중 정서만 부추겼다는 분석이 많다. 라이칭더(賴淸德)가 당선돼 민진당이 차이잉원(蔡英文) 총통 8년에 이어 3연임 집권하게 됐다. 문흥호 교수=라이칭더와 국민당의 허우유이(侯友宜) 후보를 친미와 친중으로 구분하거나 총통 선거를 미중 대리전으로 보지 않는다. 국민당은 친중이 아니다. 국민당은 몇십 년을 공산당과 전쟁했다. 국민당 원로인 마 전 총통도 미국이 키운 사람이다. 대리전도 아니다. 시진핑 체제에 대한 대만인들의 반감이 심해 중국의 개입은 반드시 역풍을 초래한다. 홍콩의 국가보안법 파동 속에 치러진 2020년 총통 선거는 시진핑이 차이잉원 재선의 일등공신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만이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 유권자들이 느끼는 국가적 매력은 중국이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민진, 국민 양당의 경쟁을 미중의 대리전이라고 할 수 있나. 구=홍콩 국가보안법 사태 같은 ‘북풍’이 없고 민진당 집권 4년에 대한 불만과 피로감으로 입법원에서 민진당이 다수당을 국민당에 내주었는데 총통은 민진당을 선택했다. 문=2020년 이후 4년이 지났지만 ‘반중의 관성’이 남아있다. 시 주석이 헌법을 고쳐 3연임하고 과도한 권력 집중과 사회 통제를 강화한 것에 대한 반감도 친중 성향 국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다고 본다. 신정승 전 대사(신 전 대사)=친중 후보 당선을 위해 중국이 여러 공을 들였다지만 과거보다는 군사적 시위 수위를 낮추는 등 자제한 것 같다. 그럼에도 라이칭더의 지지율이 40%로 낮고, 민진당이 다수당을 국민당에 내준 것 등을 보면 중국의 인지전 등이 어느 정도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선거 이후 양안 관계 신성호 교수(신)=대만해협에서의 현상변경 사태 발생은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다. 대만 독립을 반대하는 것이다.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 중국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으로서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선거 직후 조 바이든의 첫마디가 “우리는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였다. 문=그는 선거를 ‘독립과 통일’에서 ‘민주와 독재’의 프레임으로 바꾸었다. 중국을 직접 거론하지 않으면서도 중국 같은 공산당 체제와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굳이 독립이나 대만공화국 건설 같은 것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구=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독립은 죽음이다’라고 한 것은 라이칭더가 ‘대만은 이미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더 이상 독립도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 아닌가? 문=대만은 이미 ‘독립적인 정치실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 법률적인 독립을 말한 것은 아니다. 독립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유권자 성향 변화도 반영됐다. 젊은층은 현실성 없는 독립 문제에 집착하기보다 대만의 자주적인 정치 실체 유지를 중시한다. 신 전 대사=군사적 시위, 양안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통한 압박, 우호적인 혜택 축소 등 중국의 반발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다만 미중 정상이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갈등 관리에 이해를 같이했다. 미국은 대선에 들어갔고 중국은 국내적으로 경제 사회적으로 불안 요소들이 있어 대만 변수로 폭발적인 갈등 국면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문=세계의 지도국을 꿈꾸는 중국은 국제사회의 반중 여론을 매우 신경 쓰기 때문에 ‘비군사적 준법투쟁’, ‘총성 없는 대만 죽이기’가 예상된다. 선거 직후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나우루가 대만과 단교한 것이 한 사례다. 중국이 사전 계획한 의도적인 라이칭더 깎아내리기다. 신 전 대사=라이칭더 총통 당선자가 민주를 통해 국제사회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이에 대한 대응이라고 생각된다. ● 미중 갈등에 새우등 터진다는 불만 구=민진당 후보가 당선된 뒤 미국이 대표단을 보냈다. 중국을 자극할 수 있지 않나. 신=대표단이 전에 비해 좀 더 고위급이지만 다 전직들이다. 행정부보다 의회 그리고 연말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더 문제다. 민주·공화당이 반중에는 한목소리다. 트럼프가 중국과 전쟁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우크라이나에서처럼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 트럼프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에게 바이든의 스캔들 조사를 도와주면 군사적으로 보호해 주겠다고 해서 젤렌스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추진한 것이 전쟁을 불러온 한 요인이 됐다. 신 전 대사=대만인 중에는 미국의 국내 정치적 이유 또는 대중 압박 카드로 대만을 이용하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 같다. 낸시 펠로시의 대만 방문도 중국에 대만 포위 군사훈련의 빌미만 제공했다고 본다. 문=대만 청년층이나 지식인들은 미국을 좋아하면서도 ‘미국이 대만의 유일한 희망인가’ 혹은 ‘우리의 미래를 미국에 맡겨도 괜찮은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미중 이해관계에 따라 레버리지로 사용될 뿐이라는 자괴감도 있다.● 바이든 “대만 독립 지지 않는다” 문=선거 직후 바이든의 ‘대만 독립 반대’ 발언은 시진핑과 라이칭더를 동시에 겨냥한 것이다. 미국으로선 시진핑의 무력 시위, 라이칭더의 독립 고취 가능성을 동시에 제어해야 한다. 신=미국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모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어 전선이 확대되면 감당하기 힘들다. 한국산 포탄을 빌려 우크라이나에 보내야 할 정도로 현실적인 문제다. 경제적으로 미국은 중국과 디커플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디리스킹으로 전환했다. 올해 대선이 있는데 경제가 나빠지기 시작하면 어느 나라나 집권당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구=중국도 내부 경제 사정이 만만치 않아 대만 제재에만 몰두할 수 없는 형편이다. 신 전 대사=반대로 대만과의 갈등을 관심을 돌리는 도구로 삼기 위해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하게 대응하고 심지어 군사적 도발까지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구=라이칭더는 당선 회견에서 ‘교류를 통해 봉쇄를 대체하고 대화로 대결을 대체하고’ 등 양안 교류 메시지도 냈다. 문=대만은 중국이 ‘이상핍정(以商逼政)’, 즉 경제적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것을 싫어한다. 양안 교류는 일방적 시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 주석은 대만과 인접한 푸젠(福建)성에서 무려 17년을 근무해 누구보다 양안의 ‘융합발전’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 ● 트럼프 당선 가능성의 파장 구=1월 15일 공화당의 아이오와 코커스를 시작으로 미 대선의 막이 올랐다. 신=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아져 관심사는 바이든과의 본선이다. 트럼프는 사법 리스크, 바이든은 경제위기 리스크가 가장 크다. 트럼프 우세론이 높지만 경제가 특별히 악화하지 않으면 바이든 재선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구=대만 민진당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고 미국에서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양안 관계는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닌지. 문=‘트럼프와 라이칭더’는 최악의 조합이 아니다. 오히려 트럼프는 바이든보다 대만 관련 안보 공약에 더 신중할 것이다. 라이칭더는 당선됐지만 40%의 낮은 지지율, 대만 입법원의 여소야대 ‘3당 정립(鼎立)’ 상황으로 운신 폭도 좁다. 신 전 대사=라이칭더 자신도 강경했던 양안관계에 대해서 입장을 변화시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 양안과 한반도 구=대만 선거 결과는 한반도와도 무관치 않다. 문=민주를 내건 민진당 후보가 총통에 당선돼 민주 진영과의 연대와 가치 동맹이 강조되면서 우리에게도 일정한 역할 분담이 주어질 수 있다. 가치 이념을 강조하는 우리 정부로서는 외면하기 힘들 것이다. 신 전 대사=북한의 군사 위협이나 도발이 없이 한반도 정세가 안정되어 있으면 중국에 대해 한국이 중국에 소위 가치문제로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북한은 남한을 적대국가로 만들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우리로서는 군사적 대비 못지않게 외교, 특히 중국과의 소통이 더 중요한 때다. 민진당 후보가 당선된 상황에서 대만 문제에 대한 우리의 메시지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구=올해 북한은 서해 포격, 고체연료 극초음속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 그리고 김정은의 ‘남한은 주적’ 등 말이 험악해지고 있다. 김정은의 ‘전쟁 결심’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경고도 나온다. 신=김정은은 한미의 압박 조치, 연합훈련이나 핵 자산 전개 등을 통한 군사적 압박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점차 발언들이 강해지는 것 같다. 문제는 우발과 오판이다. 양쪽에서 군사적인 움직임들이 많아지면 의도치 않은 상황과 오판으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김정은이 미국과 ‘헤어질 결심’을 했는지이다. 북한은 과거 여러 위기 상황이 있었지만 미국과는 전면전을 피하려 했고 김일성 이래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했다. 헤어질 결심을 했다면 이제 뭐든지 할 수가 있어 통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트럼프 당선 여부에 따라 남북, 미-북 관계에 격변이 일어날 수 있다. 남북 관계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서도 중국과의 긴밀한 소통이 필요하다. ● 북한 문제 연계 고리 대만 문=트럼프와 김정은의 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소외되자 시진핑은 2019년 6월 급하게 평양을 방문하고 북-중 전략적 밀착을 강화했다. 미국이 대만 문제로 중국을 압박하면 북한 문제로 미국을 힘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대만에서 크게 양보하지 않는 한 중국도 북핵 대응 등에 적극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하에서 대만해협과 한반도의 안보가 연계되는 것은 숙명이다. 지금도 중국은 북한의 잦은 군사적 도발을 의도적으로 방관하고 있다. 신 전 대사=북한이 엊그제 IRBM을 시험 발사했을 때 중국 외교부 대변인으로부터 오래간만에 ‘한반도의 평화 안정을 바란다’는 말이 등장했다. 방관하던 중국이 우려를 시작한 것은 아닌지 관심이다. 최근 만난 중국 측 인사는 한반도 정세를 우려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한국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신=김정은이 일본의 최근 지진에 대해 위로 전문을 보냈다. 한미일 관계 강화 속에서도 일본은 북한과 막후에서 외교적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일본이 중국이나 북한과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참고할 만하다. ● 한반도와 양안, 어디가 더 위험한가 구=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이어 동북아가 다음 화약고처럼 주목받는다. 대만 학자들 중에는 양안과 한반도 중 대만이 더 위험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군사 충돌 가능성만을 놓고 보면 한반도가 큰 것 같지만 전면전 가능성은 한반도가 낮다고 본다. 워낙 군사력 균형이 팽팽하기 때문이다. 문=양안 관계에서 통일과 독립은 현실성 없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약 12만 명의 대만인이 중국인 배우자와 결혼해서 ‘양안가정’을 꾸리고 있다. 대륙에서 경제활동하는 대만인도 100만 명에 달한다. 양안관계와 남북관계는 구조적으로 차원이 다른 문제다. 신=한국에는 한미 군사동맹이 있고, 미군 2만8000명을 포함 외국인이 100만 명가량 살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미국은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잘 모르겠다. 미군의 파병 같은 군사 조약적인 의무도 없다. 신 전 대사=민진당이 집권하면 전쟁 난다는 것은 국민당의 선전 논리다. 대만은 바다로 대륙과 나뉘어 있고 주로 산악지대라는 지리적 조건 등으로 중국의 침공이 쉽지 않다. 미국에 지정학적 중요성은 한반도보다 크다. 전쟁이 나면 2049년 중화 부흥의 꿈 실현 목표도 몇십 년 후퇴할 수밖에 없다. 대만에서의 무력 충돌이나 전면전이 쉽지 않은 요인들도 많다. 정리=구자룡 bonhong@donga.com윤융근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 기자 yunyk@donga.com}

    • 202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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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일 대만 총통 선거…중국의 문무(文武) 개입과 미국 의심론

    중국의 ‘원공우허’ 선거 개입 “원공우허(文攻武嚇·문공무하)로 중국은 1996년 이후 계속 대만 선거에 개입했다.”13일 치러지는 대만 총통 및 입법원 선거에서 최대 쟁점과 화두는 중국의 선거 개입이다. 타이베이에서 4일 만난 웡밍셴(翁明賢) 단장대 명예교수는 중국의 개입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대만이 총통을 직접 선거로 선출하기 시작한 1996년 이후 계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문무(文武)의 방법이 모두 동원됐다는 것. 문은 선전 여론전 통일전선전술 등을 지칭하고 무는 무력시위로 투표에 영향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통 선거를 4일 앞둔 9일 중국은 대만 상공을 지나는 위성을 발사했고, 대만 당국은 경보를 발령됐다. 중국은 1996년 총통 선거에 나선 리덩후이(李登輝) 국민당 후보가 ‘두 개의 중국론’으로 사실상 대만 독립을 내세우자 선거 전 대만해협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하지만 이같은 ‘북풍(北風)’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리 총통은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2020년 현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재선된 데는 홍콩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의 강경 대응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중국은 4년 마다 치러지는 대만 총통 선거에서 강력한 변수가 되고 있다. “민진당 후보 당선 가능성에 개입 확대” 주장 웡 교수는 “이번 선거에서 더욱 중국의 개입이 격렬하고 여러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독립 성향의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정부가 8년간 집권한 데 이어 다시 민진당 이 집권하면 양안 관계는 더욱 멀어질 것이라고 중국은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만은 2000~2008년 천수이볜(陳水扁·민진당), 2008~16년 마잉주(馬英九·국민당), 2016~24년 차이잉원 총통(민진당)까지 8년씩 교대로 집권해 왔다. 차이 총통은 중국의 ‘일국양제(一國兩制)’의 기조를 담은 ‘92공식(共識)’을 인정하지 않아 냉랭한 관계가 지속되어 왔다. 13일 선거에서 현 부총통인 민진당의 라이칭더(賴淸德)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 중국의 ‘원공우허’가 더욱 활발하다는 것이 웡 교수의 분석이다. 웡 교수는 중국 인민해방군 비행기가 비행금지구역에 진입하거나, 중국 당국이 비용을 내고 대만의 촌장(村長) 이장(里長)들의 대륙 방문을 진행토록 하는 것을 대표적인 선거 개입 사례로 지목했다. 다만 국민당 지지자로 타이베이에서 만난 장훙위안(張弘遠) 즈리과기대 부교수는 촌장 이장 초청 행사가 양안 교류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것으로 선거 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웡 교수도 중국이 ‘대만 독립을 지지하면 전쟁이고, 반대하면 평화’라는 원칙을 나타내고 있지만 대만 선거에서 총통 선거 외의 지방선거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고 풀이했다. 웡 교수 인터뷰에 동행한 장영희 박사(충남대 평화안보연구소)는 ‘성균차이나 브리프’ 최근호에서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선택’(민진당), ‘전쟁과 평화 사이의 선택’(국민당)의 프레임속에 진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독립 성향의 민진당과 친중 국민당간에 중국에 대한 태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 박사는 “민진당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되면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만남을 갖고 싶다” “중국과 전제조건없이 대등하게 교류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대만독립의 아이콘’이어서 라이칭더가 집권하면 양안(중국과 대만)간 긴장은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대만 선거, 미중 대리전 아니다”일부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전쟁이 격화하면서 대만 총통 선거가 미중간의 대리 전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은 친중 성향의 국민당 허우여우이(侯友宜) 후보를 지지하고, 미국은 라이칭더 후보를 지지한다는 논리다. 이에 대해 웡 교수는 “대만은 어느 정당의 총통 후보든 모두 선거가 있기 전 미국을 방문해 조야의 인물들을 만나고, 미국이 생각하는 대만 정책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며 미국이 일방적으로 어느 후보를 지지한다는 견해에는 의견을 달리했다. 웡 교수는 “미국의 양안 정책 기조는 크게 세 가지다. 중국은 무력행사를 하면 안되고, 대만은 독립을 해서는 안되며, 양안 인민은 평화적으로 협상하고 담판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대만은 어느 후보도 독립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웡 교수는 다만 대만이 독립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법률적인 의미로 별도의 ‘대만민주공화국’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대만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미중 패권 갈등의 사이에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어 민진당 출신의 뤼수롄(呂秀蓮) 전 부총통은 “대만은 갈등에 개입되지 말고, 중립화의 길을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뤼 부총통은 ‘하나의 중국’이 아닌 ‘하나의 중화(中華)’를 강조한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나 중화민국(대만) 모두 ‘중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양안도 통일이 아닌 ‘양안의 통합(integration)’을 추구해 양안의 교류를 강조한다. 이는 중국의 일국양제를 정면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대만인들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인식을 절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웡 교수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중국의 강대국화(强起來)를 추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고 풀이했다. 이는 미중 사이에서 중립 노선을 고수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웡 교수는 그렇지만 “중국과 군사적인 방면에서 오판을 피하기 위한 소통이 중요하며 중국으로 하여금 대만이 법률적으로 독립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만의 ‘미국 의심론’(疑美論)북핵 위협이 높아지면서 한국은 미국과의 확장안보체제에서 미국의 핵우산을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가 큰 관심이다. 김정은이 핵으로 뉴욕과 워싱턴을 위협하면서 남한을 공격하려 할 경우 이들 도시의 희생을 무릎쓰고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지 이른바 ‘드골의 의심’이다. 왕훙룬(汪宏倫) 중앙연구원 사회학연구소 부소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만에서 ‘미국 의심론(疑美論)’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고 말했다. 미중간 패권 경쟁이 치열해졌을 때 미국이 어느 정도 대만을 보호해 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의구심은 언제나 있었지만 ‘미국 의심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구촌 곳곳에서 지정학적 갈등이 불거지고 미국이 개입해야 하는 곳이 늘어나면서 미국의 개입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소 야대되면 견제와 심판의 의미” 왕 부소장은 이번 선거에서 총통은 민진당 후보 당선 가능성이 높지만 입법원은 야당인 국민당이 다수당이 될 것이라는 여론 조사가 나오는 것에 대해 ‘견제 심리와 심판’의 의미가 있다고 분석했다. 왕 부소장은 박빙의 상황이어서 결과를 봐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총통과 입법원 선거에 대한 유권자의 선택이 다를 경우 이는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당 독주를 싫어했던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의회 격인 입법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진당은 현재 전체 113석 중 61석, 야당 국민당은 38석을 차지하고 있으나 국민당이 앞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국민당이 과반을 넘기지 않더라도 다수당이 된다면 이는 지난 8년 민진당 집권으로 중국과 긴장 관계가 이어지면서 불안이 커지고, 민생 경제 정책에도 불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왕 부소장은 평가했다. 타이베이=구자룡 기자·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4-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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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합 안보위기와 북핵 위협, 국론통일이 최대 억제력”

    우크라이나에 이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3차 위성발사와 9·19 군사합의 파기로 한반도에서도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복합 위기가 몰아치고 있는 한반도의 안보정세와 이-하 전쟁의 의미를 분석하는 전문가 토론회를 가졌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 성일광 한-이스라엘학회장, 송웅엽 전 주이란 대사(조선대 객원교수)가 참석했다. 사회는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 北 위성발사로 9·19 파국 맞은 한반도 구자룡 소장=북한의 위성 발사로 ‘핵주먹에 눈을 달았다’는 말이 나왔다. 위협 수준이 얼마나 높아진 것인가. 남성욱 원장=군사 정찰위성 발사는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 날개를 단 격이다. 정밀 타격 탄도미사일을 보유해도 목표 지점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김정은은 두 차례 위성 발사 실패로 족집게 과외가 필요했는데 마침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대규모 포탄이 필요한 러시아가 ‘일타강사’처럼 지원하고 나선 꼴이다. 푸틴이 김정은을 보스토치니 우주센터에 왜 데려갔겠나. 정찰위성은 궤도 안착, 송수신, ‘서브 미터’(1m 이하의 해상도)의 사진 전송 등 3가지가 필수 요소다. 북한이 위성 기술에 부족한 것이 있어도 극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성일광 학회장=하마스의 기습 테러로 러시아와 이스라엘 관계가 껄끄러워졌지만 이스라엘의 높은 과학기술은 구소련 붕괴 후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러시아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양국 사이도 좋은 편이다. 이스라엘이 레바논과 시리아에서 군사 작전을 하는데 러시아가 크게 개입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북한의 위성 발사 후 북한의 9·19 군사합의 사실상 파기, 남한의 일부 효력 중단 대응이 있었고, 휴전선의 감시초소(GP) 재무장으로 국지적인 무력충돌 우려도 나오고 있다. 남=9·19 군사합의는 비핵화를 위한 4·27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해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비핵화에 진전이 없어 9·19 합의의 명분은 상당히 쇠퇴했다. 냉전시대 미소 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이 그렇듯 군사합의는 검증이 필수다. 9·19에는 그런 장치가 없다. 선의에만 기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더욱이 북한이 군사합의를 위반한 사례도 수백 회다. 역설적인 얘기지만 김정은이 9·19 군사합의를 안 지키겠다고 해서 우리로서는 짐을 덜었다. 명백한 북한의 위반에도 민주주의 국가로서 합의를 안 지키기에 부담이 있었다. 다만 GP 중무장에 따른 군사적 긴장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 “카타르 같은 중재자가 없다” 송웅엽 전 대사=말 그대로 복합적인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긴장이 고조돼 전쟁으로 비화할 때 중요한 요소는 중재자다. 한반도에는 그런 세력 또는 주체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성=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에 있는 작은 국가 카타르는 지정학적 위치를 잘 활용하고 있다. 하마스가 이란과 사이가 잠시 틀어졌을 때도 재정적 지원이나 주요 인물에게 안가를 제공하는 등으로 신뢰를 쌓았다. 미국의 공군기지도 있다. 미국이 탈레반이 재장악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할 때 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은 카타르가 마음에 안 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마스와 대화할 수 있는 대화의 채널도 필요해 카타르의 중재 활동을 활용하는 것 같다. 구=북핵 위기 중재자로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기도 한다. 남=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전승절 70주년에 톈안먼 성루에 올라 중국의 중재자 역할에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그날 저녁 중국 학자가 중국은 절대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나에게 보내왔다. 북핵 30년에 중국의 중재역할론을 말하고 있지만 국제 정치의 맥락과는 맞지 않는다. 여러 세력이 공존해 다극화되어 있는 중동과 달리 동북아는 4강에 매몰된 시스템이다. 주전 선수가 4개국뿐이어서 누가 중재를 하기 어렵다. 송=카타르의 중재 역할은 전임 하마드 국왕의 탁월한 영도력에서 비롯되었다. 이란과 공유하고 있는 북부 가스전 개발로 경제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고, 적극적 개혁과 개방정책 실시로 카타르는 중동 내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부상했다. 카타르는 국가 수립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하마스도 무슬림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카타르의 중재력은 미군 공군기지 수용을 통한 안전보장 위에 이란, 사우디, 하마스 등과의 긴밀한 유대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러시아 의식하는 한국과 이스라엘 구=러시아와의 관계를 의식하는 점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이 유사점이 있는 것 같다. 성=이스라엘은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대러 제재에 반대한 것처럼 러시아 눈치를 살핀다. 첨단기술 협력 등으로 양국이 사이가 나쁘지 않다. 푸틴과 네타냐후의 개인적 관계도 좋다. 이란이 시리아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시리아의 방공망은 러시아가 사실상 운영하고 있다. 러시아가 제대로 마음먹으면 이스라엘 전투기가 작동을 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엄청난 압박에도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지원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러시아 출신 유대인 정당도 있다. 이스라엘의 제2의 언어가 아랍어가 아니고 러시아어라는 말까지 있다. 러시아어 방송과 신문도 있다. 미국의 압박에도 이스라엘은 이런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에 나름대로 버티고 있다. ● ‘이란-러시아-북한 커넥션’의 위협송=이란과 러시아의 긴밀한 군사 협력, 특히 드론 분야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부각되고 있다. 이란의 드론이 북한에도 전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런데 이란의 드론 기술이 미국의 드론 기술에서 넘어갔을 수도 있다. 2011년 12월 이란이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서 미국이 운영하던 최첨단 드론(RQ-170 센티넬·별명 칸다하르의 야수)을 재밍(전자파 교란 등 기술)으로 통제권을 탈취한 뒤 ‘리버스 엔지니어링’(역설계를 통한 재조립 생산)을 통해 제작하는 방법으로 기술을 획득했다. 이란-러시아-북한 간 삼각관계를 타고 이란의 드론 기술이 러시아와의 합작을 통해 북한에도 전파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 기습테러, ‘정보 실패’가 문제 성=이번 하마스 기습에서 문제는 기습 공격보다 이스라엘의 정보 실패다. 정보부가 정보를 올렸지만 ‘하마스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전쟁보다 경제 개발에 더 주력할 것이다’라고 오판하고 방심한 것이다. 남=전쟁은 다 기습이다. 이스라엘은 1년 전부터 하마스 도청을 중단한 데다 ‘정보의 정치화’도 문제였다. 정보기관이 경고를 해도 정보의 ‘파이널 유저’(최고 정책결정자)가 편견 등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네타냐후 총리가 가장 문제였다. 송=이스라엘의 정보 실패 덕분에 하마스로서는 기대했던 것 이상의 기습 효과를 거두었다. 하마스는 군사적으로는 타격을 입었지만 테러 기습을 통해 국제사회에 자신들이 주장하는 대의를 널리 알리면서 존재 의지를 과시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 유례없는 ‘인도적 휴전’구=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인질과 죄수를 석방하면서 잠정적으로 ‘인도적 휴전’을 하는 것은 보기 드문 광경이다. 성=서로의 필요가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인질 240여 명이 석방되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긴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마스는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필요했다. 2011년 길라드 샬리트 상병이 5년간 갇혀 있다가 풀려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1000명 이상을 풀어줬다. 그때 이번 테러를 총지휘한 예히야 신와르도 22년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이스라엘 인질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하 전쟁과 미국 대선 구=이-하 전쟁 결과에 따라 내년 미국 대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의 지지를 높이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송=미국 대선은 1년가량 남았다. 이-하 전쟁은 진행 중이지만 일단락되면 트럼프와 가까운 네타냐후는 총리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4차 중동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이 승리했지만 초반의 실패를 책임지고 정권이 바뀌었다. 제1차 걸프전 직후 1991년 개최된 마드리드 회의처럼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릴 수 있다. 이를 통해 합리적인 평화안을 도출할 경우 바이든의 재선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남=외교는 대통령의 영역이다. 앞으로 미국 대선까지 1년가량이나 남았다. 이 기간 외교를 통해 반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 대선의 결과에 대해 민주 공화 후보 중 누가 당선될지 두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어 대비해야 한다. 트럼프에게 400명의 전문가가 참여해 외교 안보 국방에 관한 1차 보고서를 제시했다고 한다. 방위비 대폭 증액 등 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항목들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정권이 교체되면 바이든 정부와의 ‘워싱턴 선언’ 등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벌써 로비에 들어갔다는 말도 있다. ● 미국에 목소리 내는 이스라엘 구=6·25전쟁에서 한국은 작전권도 내주었고 정전 협상 과정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미국에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남=시큐리티(안보)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개인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한 것은 지금으로 치면 우주에 가서 공부하고 온 것에 가까운 개인기다. 그랬기 때문에 휴전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에버레디 계획’으로 하야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 네트워크의 힘과 시오니즘 전쟁을 보면서 우리도 애국심과 자강의지가 안보를 지킨다는 것을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 정치가 양극화돼서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구=자강을 훼손하는 요소가 양극화 혹은 국내적인 분열이라는 뜻인지. 남=우크라이나가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항전 의지로 뭉치지 않았으면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1930년대 초반 대기근 때 단합해 모스크바에 저항했던 기질이 피에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자강에 플러스알파가 있는데 바로 ‘동맹’이다. 전 세계에서 홀로 자주국방을 하는 나라는 없다. 다만 ‘동맹은 공짜가 아니다’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송=이스라엘은 미국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에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지 않았다. 조약에 따른 구속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외교는 내치의 연장’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국가다. 이는 유대인의 막강한 파워에서 비롯된다. 우리도 그러한 역량을 갖추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성=전후 ‘두 국가 해법’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생각이 다르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안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하 확전 막은 요인들 구=확전 혹은 5차 중동전쟁 우려가 초반에 나왔다가 수그러졌다. 성=무엇보다 관심사는 헤즈볼라였는데 미국이 두 개의 항모전단을 지중해에 투입해 억제 효과가 컸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공격할 때 활용하려는 헤즈볼라를 이번과 같은 사태에 소모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하마스에 심정적으로 동조한다지만 아랍 주변국은 전쟁에 관심이 없다. 이집트나 요르단은 자기들 먹고살기도 바빠 이스라엘과 전쟁할 상황이 아니다. 송=키신저는 오래전 중동 문제에 대해 ‘이집트 없이 전쟁 없고 시리아 없이 평화 없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처럼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수교해 더 이상 중동 전쟁은 없어졌다.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아직 수교를 안 해 평화는 오지 못했다. 이란은 직접 개입에 따른 확전을 원치 않으며, 헤즈볼라 등 ‘저항의 축’을 활용한 간접 개입의 수준을 조율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궁지에 몰린 네타냐후가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헤즈볼라를 자극해 확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 최고의 안보 대비는 국론 통일과 단합 구=하마스의 기습 공격 중에 북한의 위성 발사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북한의 도발, 확전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할 상황이다. 남=지금은 국제 정치의 ‘체제 전환기’다.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파워가 약해지면서 도처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분쟁이 터져 나오고 있다. 70년간 지속된 한반도 평화도 어느 순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전쟁이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안보에 관해 국론을 통일하고 협력하는 것이 절실한 시기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정리=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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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혀서는 안되는 6·25[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서울 신촌을 오가는 버스에서 ‘연희 104고지’ 정거장을 문득 본 적 있지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5월 초 지인 2명과 함께 찾아가 보니 주택가 뒤편으로 단 비탈길 입구에 빨간 글씨로 ‘해병대수도서울 탈환 104고지 전적비’가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면 작지 않은 공터 한 켠에 전적비가 우뚝 세워져 있고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탈환을 위한 해병대의 경인지구 작전 지도가 소개되어 있다. 인천상륙 이후 13일만에 서울을 탈환할 때 두 번 뺏고 뺏기는 육탄전속에 최후의 고비였던 연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기자가 근무하는 서대문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전 70년’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니고 연희고지 만큼이나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미국에서 6·25 전쟁은 오랜 기간 잊혀진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6·25가 몇 년에 발생한 전쟁인지 모르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시리즈는 정전 70년을 맞은 올해 ‘6·25가 그렇게 잊혀져도 되는 전쟁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틈틈이 현장을 다니며 주 2회씩 마감을 하다보니 어언 시리즈를 마쳤다. 6·25가 잊혀지지 않고 나아가 ‘북핵 위협’ 시대에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시리즈의 보람으로 삼으려 한다. ● 공간이 주는 영감과 상상력 전국에 흩어져 있는 6·25 전투 현장의 전적비 위령비 충혼탑 충혼비 기념관 박물관 등 흔적을 찾아다녔다. 처음 찾아간 곳은 6·25 발발 후 한국에 첫 파병된 미 보병 24사단 선발대 ‘스미스 특임부대’가 북한군과 처음 전투를 벌인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평화공원’. ‘초전기념관’이 있다는 이곳에 가면서 ‘70여년 전 전투가 있었던 곳의 돌덩이(기념비 충혼비 등)를 본들 당시의 복잡했던 전황을 이해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자료를 하나라도 더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기념공원의 시계탑 조형물을 보고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1,2차 대전을 통해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미군이 이름도 잘 안 알려진 한반도 북쪽의 ‘공산 괴뢰 집단’의 군대와 만나 첫 전투에서 버틴 시간이 불과 6시간 반이었다니! 시계탑 조형물 등을 세워놓은 죽미령 평화공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영감과 상상력이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때 이후 현장에서 보이지 않게 충전된 기운이 조금은 무모하게 시작한 ‘현재를 찾는 과거로의 긴 여정’을 지탱해 준 에너지가 됐다.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국가수호 현충시설’은 1312건이다. 독자들이 가까이에 있는 어느 곳이라도 한 곳에 들러 6·25에 대한 관심을 갖는 실마리를 찾기를 기대한다. ● 현리 위령비의 서늘함 전투과 상처의 흔적을 찾아 하나 하나 현장을 갈 때마다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대표적인 곳이 ‘현리 전투 위령비’였다. 마을 뒷산을 오르는 듯 산길을 따라 올라 현리전투 위령비를 찾아갔을 때 뭔가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현리전투에서의 참혹한 패배로 전사한 장병들을 화장한 곳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는데 영령들이 주위에 있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경기도 가평의 설마리 전투에서는 영국 글로스터 대대가 사실상 옥쇄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내용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추모공원에 귀환한 병사가 부인과 딸을 만나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추모공원에 새겨진 벽화처럼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만난 병사는 사실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국군은 용감했다 6·25 전쟁 3년의 전황을 분석하는 많은 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미군에 비해 한국군이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다 군의 기강도 엉망이었다. 실전 경험과 지도력을 갖춘 장교가 거의 없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공중증(恐中症)’으로 중공군만 보면 달아나기 바빴다. 미군이 제공한 고가의 무기와 장비도 내팽개쳐 중공군 손에 넘어가게 했다. 중공군은 미군이 아닌 중동부 전선의 한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등등.이번 시리즈 취재를 위해 현장을 다니면서 그게 다는 아니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의정부 축석령을 지키던 2사단과 육군포병학교 교도대 등은 북한 전차와 만나 50m까지 전차가 근접해 포격을 가한 뒤 적의 전차포 사격으로 전사했다. 근접 포사격은 육탄 돌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개전 직후 홍천 전투에서 6사단 19연대 11명의 육탄돌격대는 수류탄만 들고 적의 전차를 타고 올라가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집어 넣었다. 휴전 협상 중 고지전 혈전이 벌어지던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 30연대의 삼용사는 수류탄을 들고 적의 기관총 진지에 들어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잘 된 것은 미군탓, 안되면 한국군 탓’하는 미 8군 사령관이 있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한국군이 부족한 것도 많았지만 한국군만을 탓할 것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열악한 상황속에서 분투했던 국군에 대해 애틋하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볼 때도 됐다. ● 새삼 다시 본 ‘단둥의 6·25’베이징특파원 시절 김정일의 방중이나 북한의 핵실험 등으로 북중 관계에 변화 조짐이 보일 때 접경 도시 단둥에 종종 갔다. 단둥 시가지 뒤편의 항미원조기념관에도 종종 들렀다. 그런데 이번에 시리즈를 위해 단둥에 가서 ‘단둥의 6·25’를 새롭게 보았다. 과거 단둥에 갔을 때는 현재의 북한을 보기에 바빴다. 북중 교류, 제재를 피하는 밀수, 탈북자, 달러벌이 일꾼 등을 수소문하고 다니느라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단둥은 현재는 북중 교역의 최대 관문일 뿐만 아니라 6·25 전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곳이었다. 미국 폭격으로 끊어진 다리 ‘압록강 단교(斷橋)’ 위에 중공군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도하하는 장면의 조각상이 생생했다. 압록강 상류에는 중공군이 도하하기 위해 부교를 놓았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6·25 이후에도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끝나지 못한 데는 단둥에서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중공군의 참전과 무관지 않다. 한중 교류 30년이 지났으나 중공군의 ‘정의롭지 못한’ 6·25 참전의 업보는 쉽게 없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 ‘6·25 국제연대의 힘 살려야’우크라이나 전쟁은 일요일 새벽 느닷없이 발생한 6·25 전쟁 같은 무도한 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벌어질 수 있음을 새삼 일깨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세계 많은 국가가 불법적인 침략이라고 규탄한다. 그럼에도 미국과 서유럽 국가 등이 무기를 지원하고 군수 물자나 의료 장비 등을 지원하지만 전투 병력을 직접 파견한 국가는 없다. 6·25 전쟁 때는 어땠나. 발발 24시간만에 유안안보리가 ‘북한의 남침은 평화의 파괴’ ‘북한군의 침략중지 및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 요구’ 등을 요구했고, 이틀 후 회원국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같은 결의에 따라 미국 178만 9000여명, 영국 5만6000여명 등 연인원 195만 여명이 참전했다. 전사자만 3만7900여명이다. 6·25 당시 한국 지원은 ‘16+6+38=60’이다. 전투병 파병 16개국 외에 의료지원 인원 파견 6개국, 물자지원국이 38개국이다. 캐나다 총리는 파병을 결정하면서 “특정 국가와의 싸움이 아니라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다수의 국가가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하나로 뭉친 것은 유사 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지금은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은 마비된 것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소련이 침략국인데다 중국이 편을 들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다. 올해 정전 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행사는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행사로 열렸다. 70년 전 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리고,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던 국가들은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하다. 한국이 그들을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연대의 끈을 굳게 할 공통의 유산이 있는 귀중한 우호 우방국가들이다. 한 때 ‘잊혀진 전쟁’이었던 6·25는 이제 한국과 세계 각 국을 잇는 귀중한 자산으로 만드는 것은 피로 지켜낸 이 땅을 물려받은 우리의 몫이다.참고문헌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각 장의 뒤에 참고문헌을 소개했다. 6·25 전쟁의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주요 문헌을 분야별로 소개한다. ◇ 6·25 전쟁의 정책 결정자, 지휘관, 직접 참관자가 쓴 자서전 회고록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시대정신, 2009.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3권, 책밭, 2020.신화봉 지음, 『휴전선이 열리는 날』, 한국논단, 1993.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정일권 지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광명출판사, 1996.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정수영 옮김, 『운명의 1도』, 후아이엠, 2014.터너 조이 지음,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 펑더화이(彭德懷) 지음, 이영민 옮김, 『나, 펑더화이에 대해 쓰다』, 앨피, 2018.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지문각, 1968.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6·25를 학술적이고 논쟁적으로 분석하기보다 대중적인 이해를 돕기 위한 책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미디어, 2017.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0. 남시욱 지음, 『6·25 전쟁과 미국』, 청미디어, 2015.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바브 드러리 & 톰 클라빈 지음, 배대균 옮김, 『장진호 전투』, 진한엠앤비, 2017.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 지음, 최필영 윤상용 옮김, 『이런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9.윌링엄 R. 맨체스터 지음, 박광호 옮김, 『맥아더 2』, 미래사, 2016.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 『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조셉 굴든 지음, 김병조 발췌 번역, 『한국전쟁 비화』, 청문각, 2002.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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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일 첫 별도 회담 … 자유주의 질서 파수꾼 역할 해내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정상회의를 가졌다. 한미일 3국 정상이 별도의 회의를 갖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이사장 남시욱)은 회의의 의미와 한반도 안보를 주제로 22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전문가 토론회를 가졌다. 안호영 전 주미 대사(경남대 석좌교수),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미주연구부장),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통일학연구원장)가 참석했다. 사회는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이 맡았다. ● 한미일 ‘뉴노멀 시대’ 구자룡 소장=정상회의 후 ‘정신’(공동성명) ‘원칙’ ‘공약’ 등 세 가지 문건을 발표한 것은 이례적이다. 안호영 전 대사=통상 공동성명과 ‘팩트 시트’를 낸다. 3국이 회담에 얼마나 중요성을 부여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3국 관계는 ‘뉴노멀의 시대’를 맞았다. 박원곤 교수=‘협의에 대한 공약’ 문건 제목을 ‘듀티(duty·의무)’가 아닌 ‘공약(commitment)’으로 한 데는 복잡한 속내가 있다. 한미일이 동맹이 아니면서 동맹 같은 최대치의 안보 협의체를 구축하려다 보니 복잡한 문서들이 만들어졌다. 김현욱 교수=‘공약’ 뒤에 ‘디스클레이머’(면책조항)를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추후에 삼각동맹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지만 한일 모두 부담스럽다. 구=바이든 취임 이후 처음으로 캠프 데이비드에서 회의를 가졌다. 김=의전과 형식보다 실질적인 협의를 하고 3국 공조가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는 성과를 내겠다는 의도를 반영한다. 내용도 충실했다. 군사 안보뿐 아니라 대부분의 어젠다가 다 들어갔다. 국제표준, 글로벌 공급망 정보 시스템 구축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3국이 주도를 하고 지역도 글로벌 차원이다. 이런 ‘소다자협의체’는 없다. ● ‘변곡점’ 맞은 변화의 시대 구=회의의 성과는 3국 간 ‘전방위 글로벌 협력체’ 구축으로 요약된다. 박=공동 기자회견의 모두발언에서 정상들이 탈냉전 이후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가 나와 있다. 바이든의 ‘인플렉션 포인트(inflection point·변곡점)’, 윤 대통령의 ‘미증유의 복합 위기’, 기시다의 ‘법의 지배에 입각한 자유롭고 열린 국제 질서의 위기’.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도전을 받고 있다는 기본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세계 질서 변화의 성격에 기본적 인식이 일치한 것이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의미다. 안=바이든 발언의 핵심인 ‘변곡점’이 ‘원칙’ 문서에 포함되지 않았다. 3국 협력체가 어디에 대항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직면한 시대를 ‘신냉전’이라고 하면 쉽게 개념화가 되는데 그 표현을 안 쓰려다 보니 ‘변곡점’이라고 한 것 같다. 김=‘원칙’ 초반 ‘인도태평양 지역과 그 너머’라는 구절은 한국의 외교와 한미동맹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2009년 한미가 ‘포괄적 전략 동맹’을 맺었지만 글로벌 차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가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면서 NATO 회의에 참여했다. 이제 외교의 지평과 한미동맹의 범위가 실질적으로 포괄적 전략동맹화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한미일 협의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은 경각심 가져야 구=‘공약’에서 ‘도전 도발 위협’에 대해 3국이 신속하게 협의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북한에 주는 메시지는? 박=문서를 제대로 읽었다면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미국은 ‘통합 억제’를 추구하는데 높은 수준의 3국 협의체는 나토와도 연결된다. 이번 문서에 ‘멀티 도메인’은 우주와 사이버까지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한미일이 이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안보협의를 하고 범위도 나토까지 포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북한이 이전에 한미 동맹만 상대한 것과 다르다. 4월 워싱턴 선언이 나왔을 때 북한 김여정이 바로 담화를 냈는데 이번에는 반응을 못 하고 있다. 복잡한 상황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성명’에서 북한이 뒤에 나오지만 구체적인 액션 플랜은 북한에 대한 것이 가장 많다. 순서만으로 우리의 관심사가 뒤로 밀렸다고 볼 것은 아니다. ● ‘특정 국가 배제 협의체 아니다’ 김=바이든 정부가 인·태 전략으로 오커스(AUKUS·호주 미국 영국의 안보협의체)와 쿼드(Quad·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국 협의체)도 만들었지만 잘 굴러가지 않고 있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는 군사협의체를 원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미국은 한미일 협력체에 기대를 가지고 있고 군사협의체로 발전시키고 싶어 한다. 안=미국의 인·태 지역에 대한 ‘안보 아키텍처’ 구상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한국 일본 호주 등과의 양자 안보동맹이었다(‘허브 앤드 스포크’). 이제 ‘소지역주의’로 가고 있다. 한미일 협력체도 3국 국명의 영문을 조합한 이름을 붙여야 정체성이 뚜렷해진다. 김=‘원칙’ 문서를 보고 처음에는 개념이 막연했는데 자세히 뜯어보니 공통의 목표와 지향점이 뚜렷하다.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국제법과 국제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거론한 것은 이를 위반하고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협의체가 특정 국가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 읽히면 안 된다.● ‘플래시 포인트’ 개입 불가피 구=앞으로 남중국해나 동중국해 대만해협 등 북핵 외 현안들에 대해 한국이 개입, 관여하게 되나. 박=‘플래시 포인트’, 즉 남중국해와 대만 등에 위기가 발생하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플래시 포인트에서 분쟁이 발생하면 전진 배치된 미군 전력을 활용하게 돼 있다. 이제 대만해협에 미국이 어떤 작전 계획을 갖고 요구해 오면 어디까지 대응할 수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 안=대만에서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한반도가 개입된다,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탁상공론이다. 이제 대만해협의 안보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김=남중국해 ‘자유의 항행’ 작전에 한국이 군함은 아니어도 상선 정도는 들어가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 ‘한미일 3국 핵우산’은 아니다 구=이번 회담으로 ‘한미일 공동의 핵우산’은 안 만들어진 건지? 박=그렇게 되려면 동맹으로 엮여 나토(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대응하는 것이 핵심) 수준이 돼야 되는데 ‘아시아판 나토’로는 못 간다고 본다. 나토는 바르샤바 조약기구라는 명백한 적이 있었다. 한일이 중국을 명백한 적대 대상으로 할 수는 없다. 미국도 (중국을 공동의 적으로 하려는) 꿈을 가졌지만 10여 년 전부터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됐다. 그래서 이번 같은 협의체가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김=유럽은 냉전시대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서유럽 국가들을 통합했다. 반면 동북아에서는 한일 간에 ‘협의 공약’을 하는 데도 여러 ‘면책 조항’을 붙여야 하는 상황이다. ● 고심하는 중국 구=3국 정상회의 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나 관영 언론에서 ‘중국에 먹칠, 난폭한 내정 간섭’ 등 반발이 나오고 있다. 박=그럼에도 ‘불에 타 죽을 것’ 같은 거친 표현은 없다. ‘대만해협에서 힘을 통한 현상 변경’ 같은 중국이 민감하게 보는 아킬레스건을 빼버리니 우리가 늘 알던 반발 표현들만 나왔다. 이번에 중국 견제의 방향성과 의지를 보였지만 중국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어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처럼 반응하기 어려운 데다 ‘피크 차이나’라는 말처럼 중국이 크게 반발할 여력이 없는 것도 중국의 반발 수위가 낮은 배경으로 보인다. 청년 실업률, 부동산 위기 속에서 중국이 확전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반응이 안 나오는 것은 중국을 보고 수위를 맞추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김=11월에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미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간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뭔가 실질적인 소득을 얻고자 한다. 중국은 더 이상 주변국들에 이전처럼 경제적 위협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구=북한 미사일 정보 실시간 공유 등은 미사일 방어(MD) 시스템 구축과 비슷한데 중국의 반발도 거의 없다. 사드의 X밴드 레이더 하나 돌린다고 보복을 한 것과 대비된다. 안=사드 때는 전략적 모호성을 취했다. 이제는 전략적 명확성을, 그것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 차원에서 하니까 훨씬 대응이 쉬워졌다. 중국이 ‘진흙탕’ ‘바둑돌’ 소리를 하면서 한국에 압력을 넣어도 우리의 기본 입장을 견지해야 한중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회담 전 문건에 ‘중국’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대통령실에서 브리핑했는데 들어갔다. 안=3국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가 자유민주주의, 인권, 법치주의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국제질서다. 여기에 역행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며 그 예시로 들어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미중 사이가 좋아지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구=그래도 대통령실 브리핑이 불과 2, 3일 만에 뒤집혔다. 박=2016년 7월 국제중재재판소에서 남중국해의 영유권 주장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했기 때문에 미국이 ‘중국’을 넣기를 원하고 한국이 동의했을 것이다. 한국이 양보만 한 것은 아니다. 과거 미일 성명 등에 들어가 중국이 발끈한 ‘대만해협에서 힘을 통한 현상 변경’ 그리고 ‘신장위구르’ 얘기는 빠졌다. 김=최근 워싱턴에서 만난 미국 부처 관료들이 매우 자신만만해했다. 대중국 견제가 성공적이어서 중국 경제가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미중 경쟁 구도가 기울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한미일 3자 협력체가 만들어졌다. 이번에 중국이 경제적 압박을 할 경우 공급망 재편 등 공동 대응하는 것들이 많다. 이런 상태에서 중국이 한국이나 일본에 경제적 보복 협박 등을 해도 효과를 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 한일 관계 ‘방화벽’의 중요성 구=이번 3국 회의는 윤석열 정부 들어 한일 관계가 개선된 것이 바탕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때문에 정상회의 후 기시다 총리에게 일본이 좀 더 성의 표시를 해야 한다는 질문도 나왔다. 이번 ‘3인의 약속이 3국의 약속’으로 지속성을 가질지 변수는 일본이 아닐지. 안=한일 관계에서 역사와 다른 경제적 관계 등은 서로 분리해서 나간다는 것이 1965년 이후 대한민국의 기본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난 정부 5년간 그런 ‘파이어 월(방화벽)’이 무시됐다. 아베 신조 전 총리도 마찬가지여서 한일 관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윤 대통령이 그걸 복원한 것이다. 박=대일 관계에서 문재인 정부 실정 중 하나가 도덕적 우위를 놓치고 완전히 훼손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기시다가 원래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전에 한국에 안 오려고 했는데 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일본이 큰 부담을 갖게 될 것이다. 김=지난 정부에서 강제징용 문제가 대법원 판결까지 갔기 때문에 한일 관계에서 역사와 안보 협력이 나란히 가기 어려웠다.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어려운 결단을 했다. 한국은 도덕적 우위를 넘어 전략적 우위까지 점했다고 생각한다. ● 협의체의 지속 가능성이 과제 구=3국의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정책이 많이 바뀔 수 있다. 이번에 구축한 3국 협의체가 정권 교체 후에도 지속될 만큼 소위 ‘불가역적 제도화’가 될 수 있을지. 박=그래서 2차 한미일 정상회의가 한국에서 열리면 형식이 중요하다. 내년 상반기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붙여서 열리기보다 이번처럼 독자적으로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미일 협의체 이게 뭐야!’라고 할 수 있다. 김=‘한반도 통일’이 3자 회의의 문서에 들어간 것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주변국이 한반도 통일에 대해 지지하는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 연말 한중일 정상회의 가능성 구=3국 회의에 대한 중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연말 한중일 정상회의에 대한 기대가 높다. 박=한중일 회의는 중국에서는 총리가 오니까 경제 문제를 많이 얘기할 수 있다. 중국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한중일 3국 회의에 중국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분위기다. 안=동남아 어디에서든 열리는 국제회의에 바이든이 참석한 뒤 한국에 들러 한미일 정상회의를 할 수도 있다.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정리=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정리=윤용근 기자}

    • 202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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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의 수호자들’(下)[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밴플리트(1892〜1992)는 8군 사령관에서 유엔군사령관으로 영전해 자신의 상관이 된 리지웨이에 비해 육군사관학교 2년 선배다. 두 사람은 2차 대전 중에도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리지웨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밴플리트가 8군 사령관으로 투입된 것은 그가 그리스에서 1948년 2월부터 1950년 7월까지 공산게릴라 소탕 작전을 완벽하게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마셜 국방장관의 강력한 추천을 트루먼 대통령이 수용했다. ● 그리스 공산 게릴라 토벌한 밴플리트밴플리트가 부임한 1951년 4월은 공산측과 휴전이 모색되던 때였다. 7월부터는 정전 협상이 시작됐다. 그가 1953년 2월 떠날 때까지 약 2년간 미군 수뇌부는 ‘승리’보다는 ‘패하지 않는 전쟁’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런 분위기는 ‘승리말고는 대안은 없다’는 맥아더와 소신이 같았던 밴플리트와는 맞지 않았다. 그는 휴전 정책이 군사적 승리를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했다.(남정욱, 11쪽) 그는 휴전 협상중에도 전선의 북상을 원했다. 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1951년 4월과 5월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를 폈으나 격퇴된 것도 밴플리트의 ‘공산 게릴라 토벌’ 같은 단호한 대응 때문이었다. 밴플리트는 부임 직후 서울 광화문에서 마포 한강변까지 155mm와 105mm 야포 400문을 세워 놓고 밤낮없이 포격을 가했다.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말이 있다. 좌표를 찍어 적정량을 쏘는 것이 아니라 물량 공세를 펴는 것이다. ‘400문 야포’ 시위도 그 중 하나였다. 서울 재탈환을 목표로 한 대규모 중공군 공세 앞에서 서울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미 의회 등에서 탄약 소모량이 너무 많다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의 대공세는 밴플리트의 2년 재임 기간에는 다시는 펼쳐지지 않았다. 다만 휴전 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 수세적인 리지웨이가 1년간 유엔군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그의 공격적인 계획은 종종 제동이 걸렸다. 리지웨이가 소극적이고 수세적으로 대응한 대표적인 조치가 밴 플리트가 최북단 통제선으로 설정한 와이오밍선(연천∼고대산∼화천) 이북으로 진격할 때는 도쿄 사령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것이다. 밴플리트의 탈롱스 작전(맹금 발톱작전), 랭글러 계획(대타격 작전) 등은 동부 전선의 방어선을 밀어올리거나, 평강〜금성〜고지 선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모두 승인을 받지 못했다. 작전 제약 속에서도 휴전선이 지금과 비슷한 위치로 형성된 것은 밴플리트의 공세작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한다. 그리스에서 공산 게릴라 토벌의 경험은 1951년 말 백선엽 지휘하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도 적극 나서도록 했다. ● 밴 플리트, 이승만과 가장 가까웠던 미 사령관한국을 관할하는 미국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은 서로 껄끄러운 일이 많았다. 인간적인 요소가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주로는 서로의 지위와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상대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워커는 개전 초기 낙동강까지 밀려만 가는 것에 이승만은 불만을 나타냈다. 북진과 통일에 모두 거부감을 가졌던 리지웨이와는 ‘물과 기름’이었다. 밴플리트는 한국에 부임해 처음 이승만을 알게 됐지만 애국과 열정을 존경해 자국의 국가지도자처럼, 이승만은 친자식처럼 대할 정도로 친밀했다.(남정욱, 89쪽) 그는 지휘 계통상 작전 활동 제약으로 군사적 행동을 하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을 이해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밴플리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8군 사령관을 마치고 떠날 때는 태극무공훈장을 주었다. 밴플리트는 1953년 3월 전역 후 아이젠하워로부터 주한 미 대사직을 제안받았으나 바로 거절했다. 부임하면 직책상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맞서야 했고 휴전을 반대하는 그의 소신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국 국방과 한미 우호의 초석닦은 은인(恩人)밴플리트는 6·25 전쟁 3년간 6명의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중 가장 긴 2년간 근무했다. 중공군의 2차례 춘계 대공세를 격퇴한 후에는 휴전회담속에 지리한 고지전을 이어가던 때였다. 밴플리트는 향후 분계선이 될 대치 전선을 밀어올리는 공세를 펴면서도 한국군 전력을 증강하는 많은 조치들을 취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초급 장교 육성을 위해 육군사관학교를 4년제로 전환하고 국군 20개 사단의 증편, 국군 장교들의 미 군사학교 유학 등이 대표적이다. 백선엽은 105mm 포 밖에 없었던 한국군이 1952년 4월 한국군 포병으로 이뤄진 155mm 포 4개 대대를 보유한 2군단의 재창설은 한국군 현대화에 큰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88쪽) 한국에서 38년의 군경력을 마친 밴플리트는 한국을 제2의 조국이라고 여기며 한국과 한국군의 발전,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해 헌신했다.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여한 ‘코리아 소사이어티’라는 민간단체를 만들어 한국을 지원하고 한미 우호 증진에 기여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2년부터는 한미우호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밴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미국의 카터와 아버지 부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키신저, 이건희 정몽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한국 육군사관학교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밴 플리트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1960년 미 사령관으로는 유일하게 동상이 건립됐다. ● 이승만 제어하면서 존경한 클라크 사령관 클라크 사령관(1896∼1984)이 유엔군사령관으로 부임한 1952년 5월 7일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수용소장을 포로로 잡는 폭동이 일어났다. 휴전협상의 마무리를 위해 파견된 그의 임무가 얼마나 험난한 지 첫날부터 잘 보여주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이 휴전 회담 기간에 땅굴을 파는 등 방위선 구축을 위해 이용했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회담은 결국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회담 중 수풍댐이나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한 것도 그 때문이다. 클라크는 휴전 회담을 위해 넘어서야 할 장애가 한국의 안전보장 없는 휴전을 단호히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유일한 무기는 힘’이라고 생각한 그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대해 누구보다 공감했다. 미 정부의 지휘를 받는 신분이자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역할 때문에 정전 협정에 끝내 협조하지 않으면 이승만을 하야시키는 ‘에버레디 계획’까지 세우고 이승만이 협정의 조건으로 요구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반대했지만 이승만의 반공 신념에는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존경을 나타냈다. ● ‘맥아더 확전론’에 공감한 클라크클라크는 부친이 참모학교 소령일 때 맥아더가 중위로 집에 찾아오면서부터 친교가 있는 사이. 1951년 2월 현장 실태 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만난 맥아더는 압록강 이북 중공군 기지 공격을 막는 워싱턴 합참을 비판하는 얘기를 들었다. 훗날 1974년 출판된 자서전 ‘댜뉴브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중공군이 개입한 이상 압록강 이북에 적의 안전지대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맥아더의 견해에 완전히 동의했고, 그후에도 견해를 바꾼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전임자인 리지웨이와 동기로 밀접한 관계라고 했지만 한국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클라크, 65쪽) 클라크는 자신이 미 정부의 지시와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역사는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이승만이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훗날 자서전에서 극찬했다.(클라크, 19쪽). 그가 유럽 전선 ‘다뉴브’에서 겪은 공산주의자의 경험 때문이었다.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도 ‘승리없는 휴전에 서명한 첫 미군 사령관’이라며 불명예스럽게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다. ● ‘휴전을 위한 군정가 테일러’테일러(1901∼1987)는 휴전 협상 막판인 1953년 1월 부임했다. 2차 대전 중 101공수사단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고 베를린 봉쇄 사태 당시 서베를린 주둔 미군 사령관을 역임한 맹장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포병 출신으로 7개 언어가 가능한 명석한 인물로 군정가로도 손꼽혀 그의 임명은 휴전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평가했다.(백선엽, 2009, 317쪽) 군의 경제적 운용을 강조해 탄약과 물자의 소모에 강력한 통제를 가한 테일러는 중공군 격퇴를 위해 적정량을 따지지 않고 포탄을 퍼부었던 ‘밴플리트 탄약’과는 달랐다. ● 포로 교환으로 3년 만에 돌아온 딘 24사단장딘 소장은 북한군과의 초전인 죽미령 전투에 투입된 미 24사단 사단장으로 한국에 왔다가 대전 전투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실종’됐다 포로가 됐다. 그는 “전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것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다”라는 신념이 있어 2차 대전에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포로가 적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에서 자신이 포로가 됐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유일한 미군 장성이다.(최상진, 41쪽) 딘은 부대가 대전에서 북한군에 3면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직접 3.5인치 바주카포를 들고 전차에 맞서기도 했으나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전에서 처음 고립될 때는 17명의 미군 병사와 함께 있었지만 부상한 병사에게 물을 구해주러 나섰다가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진 뒤 혼자가 됐다.지리를 모르는 딘 소장은 60km 떨어진 무주까지 이동했다. 그는 완주군에서 주민 한 모씨에게 돈을 주고 대구로 가는 길 안내를 맡겼는데 그가 북한군에 밀고해 포로가 됐다. 한 씨는 전쟁 후 체포돼 5년형을 받았다. 그는 처음에는 전주 형무소에 갇혔다가 나중에는 평양, 압록강 인근의 만포진 포로수용소, 심지어는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 포로 생활을 했다. 3년이 넘는 시간이었다. 휴전 후 돌아왔다. 그는 만포진 수용소에게서 안흥만이라는 북한군 장교에게 몰래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백선엽이 부산에서 5연대장을 할 때 부하였으나 전쟁 직후 북한군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백선엽 2권, 217쪽)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1953년 9월 4일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진 뒤 투항한 북한군 중좌 이학구와 포로교환으로 귀환했다. 미 의회는 1951년 1월 그에게 미군에 최고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최상진, 45쪽). 그는 포로 경험 등을 담은 자서전 ‘General Dean’s Story’(1954)를 남겼다. 6·25 전쟁을 함께 한 종군기자들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 주한 미국 대사관 기자실. 한국 부임 11개월 가량된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는 ‘인민군이 올해 가을까지는 공격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공격임박설이 끊이지 않아 그날 새벽에도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인 ‘G-2’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때 대사관 복도에서 황급히 오가는 한 정보관과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망할 놈들, 8사단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38선을 넘어온 모양이야?”제임스는 기자실에서 1시간 반 가량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당시는 실제 싸움이 없는데 과장된 보고들도 많았다. 그는 아시아에서 오래 근무한데다 평소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아 대사관에서 긴급히 열린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한 장교가 (개전 소식을) 워싱턴에 급히 알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제임스는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와 긴급으로 송고했다. 6·25 전쟁 첫 외신 보도였다.(굴든, 55쪽)냉전이 열전(熱戰)으로 전환되고 2차 대전 후 5년 만에 미국 소련 중공 등 강대국이 참전한 가운데 3년 여 계속된 6·25 전쟁의 현장에는 때로는 목숨을 건 많은 종군 기자가 있었고 특종도 쏟아졌다. ● 맥아더 동행 기자보다 빨리 인천상륙 특종AP통신의 신화봉 기자는 부산에 있으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특종 보도했다. 1950년 9월 15일 오후 1시 50분 ‘유엔군이 오늘 아침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는 뉴스를 맥아더 사령부가 공식 발표하기 9시간 전 부산발로 보도했다. 맥아더의 상륙작전에는 도쿄 사령부 출입기자들이 동행해 현장에도 있었으나 이들보다 부산에 있던 신 기자가 먼저 보도한 것이다. 정일권 소장은 후일 회고록 ‘전쟁과 휴전’(1986)에서 상륙작전 이틀 전 신 기자가 보도해 북한이 사전에 알았을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자신은 미 제5 해병연대 정보통으로부터 듣고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사전보도하면 ‘이적행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 때문에 실행된 후를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작전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온 환자를 인터뷰하고 해군 관계자를 통해 확인했으며 정일권 소장 명의를 빌려 보도하기 위한 노력 등을 기울였다고 자세히 소개했다.(신화봉, 132쪽) 정일권은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참모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뒤 회의에 참석했던 K모 소령과 늦게까지 신 기자가 술자리를 하다 내용을 듣게 됐다고 했다. 정 총장 이름으로 발표한 것도 임의로 이름을 쓴 것이라며 옆에 있었으면 총을 빼들었을 것이라고 했다.(정일권, 131쪽) 하지만 신 기자는 2000년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 총장을 설득해 정 총장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 알고 보도 안한 기자들인천상륙작전에서 9m 높이의 인천항 벽을 올라가는 것이 큰 과제였다. 사령부가 일본의 여러 공장에 200개의 알루미늄 사다리를 주문했다. 도쿄 사령부의 기자들은 인천에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외부로 누설하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맥아더의 대변인이었던 로우니는 밝혔다.(로우니, 71쪽)맥아더 사령부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대동강 철교 폭파’ 사진 특종6·25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는 ‘폭파된 대동강 철교’다. 이 사진을 촬영한 AP통신의 막스 데스포 기자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데스포는 전쟁이 터진 1주일 후 급파돼 3년 동안 줄곧 한국전에 종군했다. 그는 1950년 11월 말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하던 미군과 함께 움직일 때 수천 명의 피난민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넘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이 사진은 미군이 1950년 12월 4일 다리를 폭파한 이후 남은 구조물로 아슬아슬하게 필사적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떠내려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글쓰는 기자는 몇 명 있었지만 사진 기자는 자신 혼자였다고 했다. 날씨가 추운데다 적의 추격으로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잠깐 동안 찍은 8장의 사진 중 한 장이 부서진 철교 사진이었다. ● ‘귀신잡는 한국 해병대’, 마거릿 히긴스 종군 여성 기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는 개전 직후 도쿄에서 건너와 1950년 말까지 취재했다.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둘러보고 도쿄로 돌아가는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호에 동승해 맥아더로부터 ‘미 지상군 파병’ 얘기를 듣고 특종을 낚았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을 취재한 뒤 돌아가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을 집필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1950년 8월 17일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대대 병력을 섬멸하고 경남 통영을 탈환하자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기사를 써서 지금도 해병대 애칭으로 쓰인다.(‘1129일간의 전쟁’, 533쪽). 히긴스는 한국전쟁 보도에 대해 “준비 안 된 군대가 겪은 절망과 공포의 순간들을 사실 그대로 전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을 미국내에 조성하는 것”이라고 했다.(히긴스, 135쪽) 6·25 개전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장이었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남자 야전복을 입은 히긴스 기자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김백일 군단장을 통해 한국군 전선을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안내를 하게 됐다. 히긴스를 대대본부로 데려갔더니 총격전이 벌어지는 일선을 보고 싶지 대대본부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다시 500m 이상 전방 능선까지 가서 소대 병사들이 적을 향해 사격을 하는 곳으로 갔다. 히긴스는 병사에게 요즈음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다. 병사가 하루 세 끼 주먹밥 한 개씩을 먹는데 반찬은 소금이라고 대답했다. 더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묻자 “임무가 적을 격퇴시키는 것인데 개인적인 소원이 있겠느냐”고 해서 강 전 총리는 통역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강영훈, 151쪽) 히긴스는 은퇴한 뒤 1965년 베트남을 여행하던 중 풍토병에 감염돼 치료받다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2010년 히긴스의 딸 린다 밴더블릿씨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군인도 아닌 그를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해 예우했다. ● 반공포로 석방 특종 UP 통신 이상규 기자는 1953년 6월 18일 새벽 부산 동래에서 일을 보고 부산으로 나오다 포로들의 탈출 광경을 목격했다. 서울 취재본부인 내자아파트에 전화를 기사를 불러 5시 40분 경 1보가 타전됐다. 이날 부산 마산 광주 논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 석방이 개시된 것은 오전 2시경이어서 3시간이 채 되지 않아 첫 보도가 나갔다.(이용호, 117쪽) ● 아이젠하워 극비 방한 스토리로 퓰리처상 1952년 11월 한국 전쟁의 명예로운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그해 12월 2일부터 5일까지 극비 보안속에 한국에 왔다. 수행 기자는 6명이었는데 기자들은 가족들에게도 출장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기사는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떠난 후 보도하도록 했다. 동행 기자 중 AP통신의 돈 화이트헤드 기자는 아이젠하워의 극비 방한 기사 ‘거대한 속임수(the great deception)’로 1953년 국내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2년 11월 29일 새벽 5시 30분, 두 사나이가 뉴욕의 모닝 사이드 드라이브 60번지 저택문을 통해 별이 총총한 차가운 밤거리로 급히 걸어나왔다. 추위를 막으려는 듯 코트깃을 세운 그들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재빨리 오르자 차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비밀경호원 에드워드 그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평화 열차(peace train)’ 휴전협상 취재 판문점 휴전회담을 위해 유엔군 대표단 숙소 및 지원시설을 갖춘 전방기지가 문산역 인근에 설치돼 ‘문산 베이스 캠프’라고 불렀다. 문산역 구내에는 11개의 객차 침대차 식당차 조리실로 구성된 유엔측 기자들의 전방취재 공간이 마련됐는데 이를 ‘평화 열차’라고 불렀다. 서울 내자(內資) 아파트에는 각 외신 언론사의 사무실이 있어 두 곳이 휴전회담 취재의 두 포스트였다. 한국 전쟁 중 이 두 곳을 거친 외신기자는 500명 이상이었다. 내외신 기자들은 서울에서 문산까지는 각 자의 지프차, 문산에서 판문점은 헬기를 타고 다녔는데 회담 초기에는 평화열차에서 숙식을 하다, 회담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관심이 많이 줄었다.(이용호, 109쪽) ● 6·25 전쟁 순직 종군기자 18명 한국기자협회는 6·25 전쟁을 취재하다 순직한 한규호 서울신문 기자 등 국내외 기자 18명(국내 1명, 외국 17명)의 추념비를 건립했다. 전국 일선기자들의 성금과 사회 각계 지원을 받아 1977년 4월 27일 파주 통일공원 내에 추념비를 마련하고 매년 추도식을 갖고 있다. 최기원 홍익대 교수가 설계한 추념비는 타자기 모양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 위에 저널리스트의 머리글 ‘J’자를 본 딴 텔리타이프 종이가 높이 솟은 형상이다. 추념비 윗부분에는 승리의 월계수와 기자정신을 상징하는 펜을 쥔 손, 한국전쟁을 뜻하는 지구가 조각돼 있다.한규호 기자는 개전 직후 북한군이 국군 복장과 견장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서울에 남아있던 한 기자는 신문 보도로 이름이 알려져 북한군에 체포돼 피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참고 문헌>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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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유의 수호자들’(上)[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지하 전시실에는 ‘자유의 수호자들’과 ‘새벽의 침략자들’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수호자는 한미의 대통령과 장군들, 침략자는 북-중-소의 최고 지도자와 군사령관들이다. 6·25 전쟁이 3년 넘게 계속되면서 정치 및 전쟁 지도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1952년 11월 대선에서 당선돼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민주당의 20년 집권이 끝났다. 31년 철권통치를 해온 소련 스탈린도 1953년 3월 75세로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의 정치 파동속에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북한 김일성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6·25 전쟁을 지휘한 유엔군사령관은 맥아더 해임 뒤 리지웨이와 클라크가 뒤를 이었다. 미 육군과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병력, 그리고 작전권을 이양한 한국군을 지휘했던 미 8군 사령관은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그리고 테일러 등 4명이었다. ‘자유의 수호자’ 정치 지도자와 군 사령관들은 공산측 불법 침략 격퇴 목표는 같았으나 방법론과 군사 작전의 범위, 작전 성향 등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전쟁 수행과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 트루먼과 맥아더트루먼과 맥아더의 상호불신과 불화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의 <17회> ‘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 편에서 다룬 바 있다. 두 사람의 충돌에는 개인적 성장 배경과 직업적 경험 차이, 군인과 정치인, 정치 진영의 차이, 대통령과 전쟁 영웅으로서 각자가 가진 대중적 지지 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두 사람의 긴장과 갈등은 맥아더의 해임으로 일단락됐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대통령과 전쟁 지휘관이라는 상하 관계에서 나타난 커다란 이견과 갈등은 6·25 전쟁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여파는 인천상륙작전, 북진, 만주 폭격, 원폭 사용, 대만 국민당 군대의 참전 허용 여부 그리고 휴전회담까지 주요 고비마다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사안을 관통하는 것은 ‘전쟁에 승리 외에는 없다’며 필요하면 핵사용과 만주 폭격을 주장하는 확전론(맥아더)과 소련의 개입 등 제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막는 등 ‘전장의 승리보다 전략적 정치적 판단이 우선해야 한다’는 제한론(트루먼)의 차이였다. 여기에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우선 순위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도 변수로 작용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정확히 예측, 대비하지 못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다시 밀려 내려왔다. 한 때 37도선까지도 밀렸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이른 뒤 휴전론이 높아질 때 맥아더는 물러났다. ● 퇴임 후 ‘사라지지 않은 맥아더’맥아더는 의회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고 했으나 그는 퇴임 후 사라지지 않았다. 1년 간 미국을 종횡무진하며 미국의 위기를 역설하고 다녔다. 군복에 훈장을 모두 매달고 전국을 다니며 때로는 변덕스런 정치적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가 트루먼을 맹렬히 비난할 때마다 그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렸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과 조금씩 멀어졌기 때문이다.(맨체스터, 561쪽) 그의 연설 중에는 ‘서유럽 방어의 제1선은 엘베 강도 아니고 라인강도 아니다. 그것은 압록강이다’라며 아시아 우선주의를 견지했다. 자신의 해임을 두고 트루먼과 논쟁을 벌이는 등 ‘평생 군인’에서 우익의 신념을 대변하는 당파적 정치가가 되었다. 그의 ‘반 트루먼 행정부’ 유세에 트루먼은 “맥아더는 가짜클럽이 있다면 출마도 필요없이 회장이 되었을 것” “진실이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역공했다. 트루먼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점령군사령관으로서 전후 일본을 창설한 맥아더를 제외하는 것으로 뒷끝을 보였다. 맥아더는 1952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를 반대하고 태프트와 손잡고 대권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크고 하얀 집’(백악관)에 대한 정치적 희망이 무너진 뒤 민간 기업 ‘스페리 랜드’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주주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때론 자신을 ‘원로 정치가’로 언급하기도 했다.(맨체스터, 587쪽) 케네디 대통령은 맥아더를 ‘숭앙’해 자주 백악관으로 초청, 조언을 들었다. 맥아더는 “아시아 땅 위에서 미군 병사가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1964년 4월 뉴욕 월도프의 호텔에서 급성신부전 등으로 생을 마감해 ‘노병은 사라졌다’.● 사후 재평가 받은 트루먼 2021년 미국 정치전문매체 C-SPAN의 조사에서 트루먼은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 6위에 올랐다. 링컨 워싱턴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아이젠하워에 이은 것이다. 6·25 전쟁 기간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이 모두 40여명 미국 대통령 중 5,6위를 차지했다. 트루먼은 ‘우연히 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에 오르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재선 임기를 마친 뒤에도 인기가 높지 않았다. 그는 사망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비로소 냉전시대의 초석을 닦았던 많은 업적이 새삼 부각됐다. 영국 처칠 수상이 그에게 “서양 문명을 구했다”고 한 말에 걸맞는 평가를 뒤늦게 받았다.(강성학, 8쪽)트루먼은 1945년 4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두 차례 임기 동안 많은 결단을 내렸다. 유엔 창설, 포츠담 회담, 일본 원자탄 투하, 마샬 플랜, 이스라엘 건국 산파,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 NATO 창설, 수소탄 개발 결정 그리고 한국전 참전과 유엔군 결성 등. 북한의 침략에 신속한 미군 투입 등으로 6·25 전쟁에서 한국을 구한 것에 비하면 한국내의 평가는 높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의 동상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의 한 켠 미군 참전비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인천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려보며 랜드마크가 된 맥아더 동상과도 차이가 있었다. 정전 협정 70년을 맞은 7월 27일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표: 전쟁 3년간 유엔군 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변화>유엔군 사령관주한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이름 재임 기간이름재임 기간더글라스 맥아더1950년 7월〜1951년 4월월튼 H. 워커1948년〜1950년 12월매슈 B. 리지웨이1951년 4월〜1952년 5월매슈 B. 리지웨이1950년 12월 25일〜1951년 4월 12일마크 W. 클라크1952년 5월〜1953년 10월제임스 A. 밴 플리트1951년 4월 14일〜1953년 2월 11일맥스엘 D. 테일러1953년 2월 11일〜1955년 4월 1일 ※미 8군 사령관은 1957년 이후 유엔군 사령관이 겸임 ● 낙동강방어선을 지킨 ‘불독 장군 워커’워커(1889〜1950)는 1950년 7월 14일 전황이 최악일 때 도쿄에서 부임했다. ‘죽느냐 지키느냐(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방어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지켜냈다. ‘워커 라인’이 무너지지 않아 인천상륙작전 및 북진 반격이 가능했다. 번쩍거리는 철모와 강한 인상처럼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초기 급박한 전황을 지켜낸 ‘불독 장군’이었다. 하지만 워커는 주변에서 두루 신뢰를 받지 못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갈 때 미 육군은 8월 초 리지웨이 중장을 한반도에 파견해 워커의 지휘 방식을 조사했는데 워커의 참모들이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데 놀랐다고 한다. 일부 연대장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병사들은 투혼을 발휘하던 2차 대전 때와 달랐다. 워커 파면 얘기까지 나올 만큼 맥아더나 참모들은 워커를 신뢰하지 않았다.(핼버스탬, 219쪽)워커는 낙동강이 급박하다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맥아더는 알몬드 소장의 미 10군단 지휘권을 워커에게서 분리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국군은 왜 잘 싸우지 못하냐며 내놓고 불평을 한데다 매너가 고분고분하지 않아 심기를 건드릴 때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따금 “버릇없는 친구였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워커와 후임인 리지웨이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잘된 것은 미군 탓, 잘못된 것은 국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고 했다.(백선엽, 2009, 175쪽) ● 공중증(恐中症) 극복한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 리지웨이(1895〜1993)는 워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12월 27일 한국에 왔다. 그는 오른쪽 가슴 멜빵에 수류탄을 차고 있어 별명이 ‘철의 가슴(Old Iron Tits)’이란 별명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독일군 후방에서 공수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맥아더가 육사 교장시절 체육 교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선택과 천거로 워커 후임으로 왔다고 했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1월호, 124쪽)그가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때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북진했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밀려 내려오던 때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26일 중공군은 38선을 돌파해 내려왔다. 그는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침체되고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데다 전황에 따라서는 한반도에서 철수를 검토하는 상황에 부임한 것이다. 그는 유엔군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중공군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그의 ‘위력(威力) 수색’은 섬멸을 위한 전초전격이다. 화력을 갖춘 수색 부대를 적진 깊숙이 투입해 적의 반응을 보고 직접 타격도 가하는 수색 및 기동타격전이다. ‘울프 하운드 작전’으로 불린 수도권 위력 수색에 이어 한강 이남까지 범위를 넓힌 ‘썬더 볼트’ 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때는 직접 헬기로 현장을 순시하면서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자신감을 되찾게 했다. (백선엽 3권, 172쪽)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유리하면 밀어붙여 요충지를 점령하고 불리하면 빠르게 물러나 는 리지웨이의 전술을 중공군이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아 놓는 ‘자석 전술’이라며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토로했다. 중공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공격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맞춰 대응하게 했다. ‘중공군이 가장 두려워한 장군’이었다.(훙쉐즈, 215쪽) ● 맥아더와 다른 길을 간 리지웨이 트루먼 대통령과 확전론, 휴전에 대한 견해 차이 등으로 맥아더가 해임돼 후임으로 임명된 리지웨이가 워싱턴의 뜻에 맞춰 맥아더와 다른 지휘 노선을 보인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리지웨이는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 권한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리지웨이, 228쪽) 리지웨이는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 반격을 가해 섬멸작전으로 남진을 저지했다. 하지만 중공군과 대치 상황으로 변한 뒤 유엔군사령관이 되었을 때는 전략적 중점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백선엽 장군은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리더십 덕분에 1·4 후퇴로 내주었던 서울을 되찾고 남쪽으로 밀려가던 전세를 뒤집어 반격해 올라가게 됐다고 했다. 다만 유엔군사령관으로 옮겨간 뒤에는 ‘합참의 지시에 충실해 한반도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에만 몰두했다’고 평가했다.(백선엽 1권, 169쪽). 그의 수세적이고 제한전쟁에 머무는 전략으로 예성강 너머의 개성이나 동부 전선에서 금강산 일대를 차지하려는 작전에 모두 반대했다고 백선엽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이던 1950년 10월 평양∼원산 선까지는 못가도 예성강까지는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가 과거 통일국가로서 전통을 갖고 있어 휴전도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과거에도 마한 진한 변한 3국의 세 갈래로 나눠진 적이 있다는 말까지 하면서 공격적인 전선 끌어올리기 작전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백선엽, 2009, 253쪽)특히 1951년 6월 경 미군이 가진 제7함대 등 전력이라면 동부전선을 마음껏 북상시켜 압박할 수 있다며 밴플리트 8군 사령관도 적극 관심을 보인 고저(庫底) 상륙작전을 불허했다. 이는 한미 4개 군단이 참가해 원산 동남쪽 30km 고저를 점령하는 등 동부 전선을 훅 끌어올리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양구군 해안면과 금강산을 거점으로 하는 적군을 포위 섬멸해 동해안 북위 39도까지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리지웨이는 미 합참에 올리지도 않고 자신의 선에서 차단해 버렸다. 그런 리지웨이는 북진 통일까지 꿈꾸던 이승만과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에는 반대 신념이 확고했다. 공군이 만주 지역을 공격하면 공군의 자연적 소모와 전투 손실로 유럽의 미군이 약 2년동안 적의 공군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설사 확전으로 맥아더가 추구하는 승리가 한국에서 달성돼도 다른 곳에서는 균형을 깨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아시아에서 무너지면 유럽도 위험하다며 아시아를 중시한 것과 대비된다.(리지웨이, 207쪽) 전사한 장군과 장군의 아들6·25 전쟁 3년 중 많은 장병들이 희생됐다. 고위 장성들은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거나 부대 시찰을 위해 이동 중 자동차나 항공기 사고 등으로 순직했다. 장군의 아들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 워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1호선 도봉역 2번 출구를 나와 도봉로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면 대로변 검은 돌 위에 4개의 별이 새겨져 있다. ‘미 육군 대장 월튼 해리스 워커 전사지’ 표지판이다. 표지석 윗면에는 실제 전사한 곳 주소가 ‘도봉 1동 596-5 번지’로 안내되어 있다. 표지석에서 100여m 떨어진 이면 왕복 2차로길인 ‘도봉로 169나길 55’의 건물에 낯익은 워커 장군의 사진이 2층 벽에 새겨져 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며 했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는 말이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곳에 걸려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경 의정부 남쪽에서 손수 지프를 운전했다. 이날 미 24사단 소속 외아들 샘 워커 대위 등에게 북진 전공으로 사령관 표창장을 줄 예정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아들에게 줄 표창장이 있었다. 그는 중앙선을 넘어온 국군 6사단 2연대 소속의 민간인 수리공이 몰던 쓰리쿼터 트럭에 측면을 받혀 차가 뒤집어지면서 차체에 깔려 야전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부관 등 동승자는 중상을 입었다. 워커는 사후 대장에 추서됐다. 아들 샘 워커도 1977년 최연소 육군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 사상 처음으로 부자 4성 장군이 됐다.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洪學之)는 ‘워커가 후퇴하던 길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는데 상대의 후퇴길이 어느 정도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 정확한 전사를 기록하기보다 적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자신들 편의에 맞게 꾸민 것이다.(훙쉐즈, 174쪽) 심지어 북한중앙통신은 2년여가 지난 기사에서 워커가 인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고 날조했다. ● 헬기 사고, 작전 중 사망 미국 장교들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1894〜1951)은 1951년 1월 31일 제9 군단장으로 부임해 3주만인 2월 24일 ‘킬러 작전’을 전개하며 ‘남한강 도하 작전’을 지휘하던 중 여주 북쪽 한강변에서 헬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킬러 작전’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하고 반격의 전환점이 된 지평리 전투(2월 13〜15일) 이후 적에게 휴식과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공세작전이었다. 사고 현장인 경기도 여주에는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와 ‘무어 장군길’이 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장성은 워커 중장과 무어 소장 두 명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아들은 모두 142명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워커와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은 부자(父子) 모두 함께 전장에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미 3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미군 고위 장성의 자녀 중 사상자는 35명이었다.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아버지의 항공 지원하에 육상에서 장진호를 돌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하갈우리에서 전사했다. 클라크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대위는 세 번이나 부상을 입어 제대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129일의 전쟁’, 414쪽) 장진호 전투에서 호수 동쪽을 맡았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매클린 연대장은 적군을 아군으로 오인해 접근하다 붙잡힌 뒤 사망했다. 그는 중공군 80사단에 포위돼 철수 작전을 벌이던 1950년 11월 29일 장진호 동쪽 풍류리강 안곡에서 남쪽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보고 후방에서 오는 예하 2대대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며 접근했다. 그는 중공군 병사들에게 끌려간 뒤 연락이 끊겼다. 그는 포로가 되어 이동하다 12월 초 부상당한 상처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뒤에 알려졌다. 동료들은 그를 도로 옆에 묻어주었고 실종 8개월 후 그에게 수훈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애플먼, 189쪽) ● 밴 플리트 2세의 마지막 편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중위는 아버지가 미 8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그는 1952년 4월 4일 B-26 폭격기를 몰고 압록강 남쪽 80km 지점의 북한 순천 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포를 맞고 실종됐다. 그는 밴 플리트가 결혼 10년 만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밴플리트 중위는 2년 전 결혼한 부인과 사이에서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을 찾는 일로 다른 장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며 적지에서의 수색 작업 중단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요청했다.밴 플리트는 자신의 아들을 잃은 뒤 자신처럼 한국전선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남정옥, 105쪽) 아버지처럼 전장에서 가족에게 자주 편지를 썼던 밴 플리트 중위는 실종 보름 전 역시 어머니에게 ‘군인의 아내에게’로 시작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아버지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어 주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승무원(항공사, 폭격수, 기관총사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남정옥, 101쪽)밴 플리트 2세처럼 6·25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미군 조종사는 1920명에 달했다. 한미동맹친선협회가 밴 플리트 대위(사후 대위 추서)의 흉상을 오산 공군기지에 건립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2022년 9월 정부세종청사 내 보훈처 건물 5층 회의실 명칭을 ‘밴플리트홀’로 바꿨다. ● 백의종군하다 전사한 채병덕 장군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육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인 6월 30일 해임됐다. 채 소장은 백의종군을 자청해 후방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임무인 경남지구 편성군사령관이 됐다.그는 7월 23일 호남을 통해 영남으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오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24일 부산과 마산의 병원에서 모은 가벼운 부상병으로 1개 대대를 편성해 떠났다. 그 때 갓 태어난 아들 이름을 ‘영광의 진격’이라는 뜻의 영진으로 짓고 하동으로 떠났다. 채병덕은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 7월 27일 전사했다. 아군의 군복과 장비를 착용한 북한군을 검문하기 위해 접근해 “적인가 아군인가?” 라며 묻자 바로 총격을 가했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에는 전사비가 세워졌다.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1951년 3월 27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여주 미 8군 전진 지휘소에서 한미 양국의 사단장과 군단장을 전원 소집했다. 이날 여주회의를 마치고 경비행기 편으로 강릉으로 귀환하던 김백일 1군단장(소장)이 악천후로 탑승기가 대관령 산중에 추락했다. 유해는 5월 9일에나 발견됐다. 김백일 소장은 흥남철수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용문 준장(1916〜1953)은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때 6·25가 터졌다. 서울에서 부대가 와해되자 남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폈고 서울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뒤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북한군 동향을 파악하다 이듬해 6월 준장으로 군에 복귀했다. 1953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정전 협정 체결을 한 달여 앞둔 그해 6월 24일 남원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검사장 출신 전 자민련 소속 이건개 전 국회의원의 부친이다. <참고 문헌>강성학 지음, 『대한민국의 대부, 해리 S. 트루먼』, 박영사, 2021.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3권, 2020.윌링엄 R. 맨체스터 지음, 박광호 옮김, 『맥아더 2』, 미래사, 2016.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향군』 1991년 1~3월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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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에서 잊혀진 사람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994년 10월 23일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해상을 표류하던 60대 초반의 남성이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 1호 탈북국군포로 조창호 소위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 다수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북한은 숨기고 남한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 죽어서도 이름 없는 탈북국군포로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는 약 8만2000여명, 이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나머지는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북한 내 국군포로는 2014년 56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된 후에는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창호 소위 이후 2010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한국으로 왔다. 고령으로 일부만이 생존해 있다. 탈북국군포로는 북한에도 가족이 있어 살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 부고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억류한 뒤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해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국군포로로 강제노역 건설대가 조직됐다는 사실은 2000년 7월 탈북한 유영복 씨의 증언과 수기집 ‘운명의 두 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탄광에서 임금은 커녕 안전장치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차별 속에 지낸 사실이 몇몇 탈북 국군포로의 수기에 나와 있다. 허재석 씨는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에서 “국군포로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안전교육도 시키지 않고 바로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일 낮은 막장에서는 기온이 40도까지 올라 숨쉬기도 힘겹고 땀을 비 오듯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고 증언했다.(허재석, 34쪽)더욱이 국군포로는 본인이 평생 ‘43호’라는 낙인이 찍혀 차별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식에게도 이어졌다. 자식들도 ‘43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진학이나 군입대, 취업 등에서 차별을 받는다. ‘국군포로’는 북한 사회에서 영원한 반동분자로 남아있다.(유영복, 195쪽) ● 북한의 부인, 남한의 무관심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고 부른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의 일부로 분류해 협의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휴전협정상 명백히 ‘국군포로’이고 북한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이 많은 귀환 포로를 통해 확인됐는데 별다른 송환 노력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초까지 군사정전위 등을 통해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사실상 손을 놨다.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희망을 걸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 후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왔지만 국군포로나 납북자는 거론되지도 않았고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납북 피해자 17명을 귀환시키기 위해 북일 접촉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내세우는 것과 대비된다. 15명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회담 직후 귀국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서도 3명의 미국 국적 억류자가 돌아왔다. 유영복 씨는 “북한이 (북한 억류 국군포로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니까 대화가 전혀 안 돼 하나도 안 데려왔다”며 “그럼 과연 유사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 나가라 할 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이혜민, 87쪽) ● 탈북국군포로, 김정은 상대 재판 잇단 승소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5월 김성태(91) 씨 등 5명의 탈북국군포로가 북한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위자료 50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했다. 북한은 김 씨 등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며 억류한 반국가 단체로 북한의 행위는 고통을 준 불법행위라며 판결 이유를 밝혔다. 김 씨 등은 2020년 9월 소송을 함께 냈으나 소송이 오래 지연돼 3명은 작고하고 유영복 씨는 거동이 불편해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2020년 7월 한재복 씨 등 2명이 낸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명령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었다. 미국 워싱턴DC 연방법원도 2021년 2월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해 23억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나포 당시 고문, 가혹행위 등에 대해서 승조원, 승조원 가족, 유족 171명에게 배상하도록 했다. 워싱턴DC 연방법원은 2018년 12월에도 북한 여행 중 억류됐다가 풀려난 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 가족들에게 약 5억113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 미국은 선박 몰수, 한국은 안면몰수?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북한을 상대로 한 배상 소송에서 승소 판결이 나오고 있지만 판결 집행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한재복 씨 등은 승소 금액을 받기 위해 국내 매체들이 북한 방송 영상 등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를 걷어 온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을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법원의 추심명령도 받아냈다. 그런데 서울동부지법은 2022년 1월 “경문협이 공탁한 저작권료는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작가 등의 소유”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법적으로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능력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다 고등법원은 경문협이 저작권료 지급에 관한 내용을 북한 측과 합의서에 명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심 명령 집행을 신청한 한재복 씨 등의 신청을 각하했다.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구충서 변호사는 “북한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기관은 정부 기관이고, 이 기관이 경문협과 계약으로 권한을 위임해 사실상 북한 정부의 소유인 저작권료를 배상금으로 할 수 있다”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추심 집행 명령 소송은 대법원에 올라가 있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북한이 억류한 국군포로에 대한 강제 노역 등 행위에 대한 북한 당국이나 김정은의 배상에 대해 국내 법원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법정에서 복잡한 법리 논쟁을 벌이는 사이 고령의 탈북국군포로 사망자는 늘어 2023년 8월 현재 80명의 탈북국군포로 중 12명만 남아있다.반면 미국은 북한을 대상으로 한 배상 판결에서 승소한 뒤 배상 집행을 위해 북한 선박을 몰수했다.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2019년 7월 법원에 북한 선박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 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몰수 소송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 선박은 북한이 보유한 두 번째로 큰 대형 화물선으로 고철값만도 300만 달러에 이른다. 그해 10월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해당 선박에 대한 몰수 판결을 내렸다.대학 3학년이던 웜비어는 2016년 1월 북한 여행 중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웜비어가 이듬해 6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귀국 6일 만에 사망하자 웜비어의 유족은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6·25 기획 납북’‘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사에 6·25 전쟁이 남긴 상처 중 ‘강제 납북’의 사연이 그대로 담겨있다.북한은 전쟁 중 모든 점령 지역에서 남한 사회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에 대한 납치 계획을 세웠다가 조직적으로 납치하는 ‘기획 납치’를 자행했다.납치 대상은 ‘저명인사’, 북한에 적대적인 ‘우익인사’, 남한 사회 요직에서 활동하던 ‘지식인 계층’ 등 크게 세 부류였다. 저명인사들은 납치된 뒤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동원됐다. 당시 언론에는 각급 법원 판사 38명이 행방불명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동아일보 1950년 11월 12일 자)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민족대표로 참가했던 김규식, 손진태 서울대 문리대학장, 미군정청 민정장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안재홍,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기자로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 국학자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었다.북한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병력 손실이 커지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점령지에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청장년을 강제 징집했다. 북한의 인재 납치는 북한 체제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고 남한에는 인력 활용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납북 피해자는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 ‘전후(戰後) 납북자’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이산(離散)의 아픔에 그치지 않는다. 납북 가족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고 일부는 간첩으로 남파되는 등의 공작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도 생겨났다. 심지어 납북이 월북으로 오인되는 일까지 있어 사회적 불명예와 차별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납북자기념관, 78쪽) 북한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생사 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어 납북자 구출을 위한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납북, 납치가 6·25 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에도 계속됐다. 북한은 협정 이후 어선 비행기 납치와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500여명의 ‘전후 납북자’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어선 납치가 대부분이지만 백주 대낮 여객기 납치도 있었다.(납북자기념관, 146쪽)1987년에는 ‘동진 27호’ 어선이 납북됐다. 가족 일부는 몇 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최연소 선원 임국재 씨는 3차례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 KAL 납치 ‘특수이산가족’이 된 미귀환자그간 정부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섰던 국군포로 송환에 손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후 납북자’ 중 대한민국 상공에서 납치해 간 여객기의 승무원과 승객들도 사실상 방치했다. 1969년 12월 11일 오전 9시 반 강릉발 김포행 첫 비행기 YS11A가 권총을 소지한 채 탑승한 간첩 조창희(당시 42세)에 의해 납북됐다. 64인승 쌍발기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했다. 1970년 2월 14일 KAL기 납치 피해자들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으나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2001년 2월 26일 평양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에 KAL 승무원 성 모 씨가 김일성대 교수인 남편, 20대의 아들딸과 함께 ‘특수이산가족’으로 나와 남측의 모친을 만났다. 다른 미귀환자 10명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 尹 정부, ‘납북자 대책반’윤석열 정부는 통일부에 납북자와 국군 포로, 억류자 문제 담당 기구를 장관 직속으로 신설해 운영하기로 했다.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에 납북자 전담부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가 나온 지 사흘 후 신임 김영호 장관이 취임하면서 통일부가 내놓은 방안이다. 납북자 전담 기구에 대해 “통일부 조직의 어젠다이자 장관의 어젠다로 챙기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정전 70년을 맞으면서 가장 큰 현안으로 남았던 납북자 및 가족들의 인도적 비극과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로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는 가운데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에서 어떤 진전이 있을지 관심이다. <참고 문헌>유영복,『운명의 두 날』, 도서출판 WON, 2010. 이혜민 지음,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깊은 바다 돌고래, 2023.허재석 지음,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 원북스, 2008.『잊지 않기 위하여』,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2019. 김강녕, ‘한국의 국군포로문제 해결노력과 향후 과제’ 『한국과 세계』, 제1권 2호, 2019.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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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처투성이 정전협정 70년[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교동도의 분단과 휴전의 상처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면 나타나는 교동도(喬桐島)의 대룡시장. 과거가 마치 영화세트장처럼 남아 분단과 휴전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될 때 황해도 연백군(현재는 연안군과 배천군)의 남쪽은 경기도에 편입됐지만 1953년 7월 휴전 이후 북한 땅으로 남았다. 피란 온 3만여 명의 연백군 주민들은 돌아가지 못하고 고향 연백시장을 본떠 전통시장 거리를 조성했다. 단층 가게와 좁고 굽은 골목, 이발관 다방 과잣집 등의 예스러운 간판 중에 ‘황해도 연백차떡’ ‘연백 강아지떡’처럼 고향인 연백을 넣은 것도 종종 눈에 띈다. ‘교동 이발관’은 피란민 1세대인 지모 씨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내려와 60여년 같은 장소에서 일했던 곳으로 지금은 자손들이 간판은 그대로 두고 술빵과 국수 등을 팔고 있다. 교동도 인사리의 북진나루에서 북한 황해남도 호동면까지는 불과 2.6km. 북쪽 해안에서 육안으로도 북한 땅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경계선이 교동도를 남한 속의 북한 땅으로 만들었다. 북한 해안을 마주 보는 고구리 해안에는 ‘UN8240 을지 타이거 여단 충혼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충혼탑에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육군 을지 제2병단과 유격군 8240부대 타이거 여단 이름의 방공 유격대 용사들의 넋이 잠들어 있다’고 씌어 있다. 섬 곳곳에는 방공 대피소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북한에서 군인이나 주민이 바다를 헤엄쳐 넘어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 철조망도 쳐 있다. 서해에서 전쟁의 상처를 간직한 분단의 최전선이다. ● 해상의 휴전선 ‘북방한계선(NLL)’교동도 북쪽 해안을 지나는 NLL은 휴전협정 서명 한 달가량 지난 8월 30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해상에서의 정전협정 관리를 위해 설정한 것이다. 휴전협정 당시 육상 군사분계선은 설정됐지만 해상경계선은 별도의 협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는 구체적인 내용을 즉시 북측에 통보했다.(남도현, 374쪽) NLL은 우리 군의 해양 작전 북방한계선을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의 서해 5개 섬과 북측 관할 옹진반도의 중간지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1972년까지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 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는 서해의 말도를 시작으로 12개의 좌표를 표시해 놓고 오랜 기간 관리해왔다.육상 군사분계선 설정 원칙은 협상 체결 당시의 전투경계선이었다. 해양에서도 NLL 설정 당시 아군이 장악하고 있던 도서와 바다를 연결해 분계선을 긋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다 북한은 육상 전력에 비해 해군력은 약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NLL은 남한 해군이 이 선을 넘어 북쪽으로 가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NLL 설정 당시 NLL 북쪽의 서해와 동해에는 국군이 상당수 섬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군사령관이 한국군에 제시한 제한이었다. NLL 설정으로 해병대가 피와 땀으로 차지했던 옹진반도 북서쪽의 초도와 석도, 원산 앞바다의 여도 명도 등 전략적 요충의 섬들이 NLL 북쪽에 있다는 이유로 북한에 내주게 됐다. 그럼에도 북한이 뒤늦게 시비를 걸고 나온 데는 휴전협상에서 합의 문서로 해양한계선을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전 70년이 되었으나 분쟁과 갈등의 ‘휴화산’처럼 남아있다.(남도현, 391쪽)● 중공군에 배운 땅굴, 휴전선 침투 ‘두더지 작전’ “여러분은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명백한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임진각을 찾는 관광객들이 도라전망대와 함께 찾는 3호 땅굴을 안내하는 가이드가 외국인들에게 설명하는 말이다. 6월 찾아가 본 3호 땅굴 전시관의 설명 자료에는 높이가 2m지만 일반에 개방된 ‘도보 관람로’의 땅굴은 높이가 1m 남짓에 불과했다. 천장이 모두 바위여서 성인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하고 안전모를 착용하지 않으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포격과 공중 폭격 등 화력을 피하기 위해 땅굴을 팠으나 북한군은 휴전선을 지하로 침투하기 위해 두더지 작전을 펴다 발각된 것이다.4개 북한 땅굴 비교 1호2호3호4호발견시기1974년 11월15일1975년 3월19일1978년 10월17일1990년 3월3일위치경기 연천 고랑포 동북방 8km강원 철원 북방 13km경기 파주 판문점 남방 4km, 서울에서 52km경기도 양구 동북방 26km 비무장지대제원지하 25~45m, 폭 0.9m, 높이 1.2m지하 50m, 폭 2.2m, 높이 2m, 길이 3500m지하 73m, 폭 2m, 높이 2m, 길이 1,635m지하 145m, 폭과 높이 1.7m, 길이 2,052m특이점레일 3.5km와 궤도차 설치·지하 폭음소리로 지하수 개발용 시추장비 투입해 발견·탐사 중 지하수 분출로 발견북한 남한 굴착 억지. 폭약 장치 방향, 남고북저의 배수로 경사 등으로 북측 굴착 확인·남측 출구 3방향, 시간당 3만 명 병력과 야포 차량 이동 가능·남쪽에 3갈래 출구, 시간당 3만 명 이동 가능출처 : 파주 DMZ 전시관 ● 협정이 무색한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쪽 초소를 가리는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지휘하던 유엔군 소속 미군 아서 조지 보나파스 대위와 마크 토머스 배럿 중위가 갑자기 달려든 북한 병사들에게 도끼로 머리를 맞아 후송 중 사망했다. 북한 병사 30여명의 무차별 공격으로 한국과 미국 장병 9명이 부상했다. 미군은 미루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잘라버리는 ‘폴 버니언’ 작전을 벌였다. 북한의 반발에 대비해 미국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 B-52 전폭기 3대,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출동했고, 제7함대 항공모함 미드웨이를 동해로 보냈다. 한국 특전사는 북한 초소 4곳을 초토화했다. 유엔 측 경비대대 캠프 이름도 ‘캠프 보나파스’로 바꿨다. 사건 후 충돌을 막기 위해 공동경비구역(JSA) 내부에 남북 경계선이 그어졌다. ● 누더기가 된 정전협정 2022년 12월 북한 무인기 5대가 사흘간 서울과 경기 인천 상공을 휘젓고 돌아갔다. 국군은 자위권 차원에서 무인기 ‘송골매’ 2대를 군사분계선 북쪽 5km 상공까지 올려보냈다고 밝혔다. 유엔사령부는 “남북 무인기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했다. 정전협정은 체결 70년을 맞은 오늘도 끊임없이 위반 논란을 빚고 있다.정전협정에 따라 양측은 1953년 7월 30일 임진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감호에 이르는 155마일(약 248km)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방 약 2km 폭의 비무장지대(DMZ)에서 군사력 철수를 마쳤다. 8월 2일에는 서해 5도 이외 동해안과 서해안의 DMZ 이북 도서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모두 돌아왔다. 군사분계선을 따라 남북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주가 약 200m 간격으로 1292개가 설치됐다. DMZ 내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허용되지 않으며 군사정전위 허가 없는 인원 출입도 금지됐다. 전쟁 3년, 협상 2년이 걸려 가까스로 맺어진 정전협정. 군사분계선과 DMZ를 두고 정화(停火·총격을 멈춤)를 보장하며 정전을 유지 관리하기 위한 군사정전위, 중립국감독위를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총격 포격 폭침 항공기 테러 등 무력도발이 계속됐다. 군사정전위가 관할하는 ‘남북한에 새로운 무기를 들여와서는 안 되며 기존 무기 교체도 1:1로 해야 한다’(협정 2조 13항) 등 많은 조항은 사문화됐다. 중립국감독위 4개국 중 2개국은 북한 쪽이 폴란드와 체코를 지명했다. 탈냉전 후 북한이 지명한 공산국가들이 자유진영으로 돌아오자 북한은 두 국가 대표를 추방해 중감위 활동이 무력화됐다. 심지어 북한은 2013년 3월 한미연합훈련을 빌미로 협정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했다. 일방의 선언만으로 폐지되지는 않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시기에 재래식 무기의 증강과 충돌을 막기 위한 협정은 수명을 다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그럼에도 휴전선과 DMZ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유엔사가 관리하는 협정을 통해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빚어지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어 왔다는 평가가 많다.(‘2023년 정전협정 및 한미동맹 70주년 학술회의’ 자료집, 42쪽)국방부에 따르면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년 동안 한국군 4268명, 미군 92명 등 모두 4360명이 무장 충돌 등으로 전사했다. 연평도 포격이나 천안함 폭침 등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대규모 무력 충돌은 없었고 전쟁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피와 희생으로 정전이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적군 묘지’와 유해 송환정전 70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 전쟁 국군 전사자 유해 7위가 73년 만에 하와이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유일하게 신원이 확인된 고 최임락 일병은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북한이 수습해 1995년 미국으로 송환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북한 당국의 안내로 장진호에서 브라운의 유해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남방한계선 남쪽 5km 경기 파주 적성면의 ‘북한군과 중국군 묘지(적군 묘지)’에는 6·25 전쟁 사망하거나 그 후 무장공비 등 109구의 북한군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묘지 방향이 임진강 건너 북녘땅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돌아가지 못한 고향 땅을 죽어서라도 바라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문관현, 362쪽) 제2 묘역에 안장됐던 중공군 유해 541구는 2014~6년 3차례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6월 중국 방문 중 중공군 유해 송환 의사를 밝혀 이듬해부터 중국으로 보내졌다. 중국은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조성해 안장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송환됐으나 횡성지구 전투 등에서 수습된 ‘무명인’ 유해는 몇 구가 그대로 남아있다. 북한군과 중국군 모두 초기에 조성했던 봉분은 모두 없어지고 평면 대리석 표지석으로 바뀌었다. 적군묘지 조성은 적군이라도 사망했을 경우 매장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정 추가의정서 34조에 따른 조치다. 정전 70년의 세월 속에 전사자에 대한 상호간 예우는 지켜지고 있는 모습이다. ● ‘끝나지 않은 전쟁’다부동 전적기념관 내부 전시의 마지막 항목이 나가려는 발길을 잡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다. 4차례 땅굴 굴착, 울진 삼척과 강을 잠수함 무장공비, KAL 858 폭파 등 테러가 있었다.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그리고 연평도 포격 등은 ‘전쟁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6차례의 핵실험이다. 북한은 정전 70년을 맞은 6월 27일 밤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괴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불리는 화성-17호와 화성-18호 등을 과시하는 대규모 야간 열병식을 가졌다. 여기에는 중국 리훙중(李鴻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과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도 참석했다. 이날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이 열린 부산 ‘영화의 전당’은 6·25 전쟁에 처음 파병된 미 지상군 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처음 도착한 곳이다. 한반도의 안보 시계는 마치 7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린 듯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곧 끝날 것 같지도 않은 것이 엄중한 현실이다.한·미·중, 영화 속의 6·25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방문한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국빈만찬이 열렸을 때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이 ‘나의 조국’이라는 곡을 연주했다. 이 노래는 중국이 195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로 제작한 영화 ‘상감령’의 주제곡. 중국에서는 국가와 비슷하게 여기는 곡이다. 2008년 ‘중화부흥’을 주제로 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다.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의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부근에서 있었던 상감령 전투는 중공군이 6·25 전쟁에서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로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전투다. 가사는 어떤가.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 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승냥이와 이리’는 물론 미군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가사의 의미를 모르고 곡조만 들었을 것이다. 요즘 같은 미중 갈등 시대라면 백악관에서 연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영화로 되살아나는 6·25 ‘인천상륙작전’(2016)은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KLO)가 상륙작전 직전 인천에서 기뢰 부설 등을 포함한 북한의 정보를 수집해 유엔군에 전달하고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팔미도의 등대를 밝히는 과정에서 다수의 대원들이 희생되는 내용이다. ‘국제시장’(2014)은 흥남철수부터 베트남 전쟁 파병까지 한국군이 치렀던 두 개의 전투가 모두 배경으로 등장한다.영화 ‘고지전’(2011)은 정전협정 발효 순간까지 최후의 전투를 벌였던 상황을 가상의 애륵고지 쟁탈전을 통해 보여준다. 정전협상이 타결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발효까지 아직 12시간 이상 최후의 전투를 벌여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장면들이 긴 잔영을 남긴다.‘포화속으로’(2010)는 1950년 8월 11일 학도병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옥쇄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 ‘장사리-잊혀진 영웅들’(2019)도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양동 작전을 위해 영덕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펴다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던 학도병 부대인 ‘명부대’의 활약과 희생을 소재로 했다. 1977년에도 ‘학도의용군’이 개봉됐다. ‘태극기 휘날리며’(2005)는 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3년의 전쟁 기간을 한 형제의 궤적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낙동강방어선을 포함한 주요 전투들이 두루 나오고 길거리에서 모병관에 의해 학도병이 충원되고, 형제가 북한과 남한 군대로 갈라서게 되는 등 전쟁의 여러 측면을 담아 ‘6·25 전쟁 종합판’이다. ‘웰컴투 동막골’(2005)는 산간 오지 동막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와 우연히 이곳을 지나게 된 3명의 인민군, 2명의 국군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 마지막 전투였던 베티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로는 ‘베티 고지의 영웅들’(1980), ‘격퇴’(1956)가 있다. ‘전장과 여교사’(1966)는 개전 직후인 7월 초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격파한 ‘동락리 전투’를 소재로 했다. 당시 동락초 김재옥 교사가 국군에게 북한군의 동향을 알려 전투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빨간 마후라’(1964)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배우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영화로 공군을 소재로 했다. 1952년 경남 사천기지에서 강으로 이동한 제10전투비행단 소속 조종사 9명의 활약을 담았다. 주인공인 편대장 나관중 소령은 6·25 전쟁 중 203회 출격 기록을 세운 공군 조종사 유치곤 장군을 모델로 했다.(김용호, 162쪽)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시가전 등을 담았다. ‘5인의 해병’(1961)은 귀신 잡는 해병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전쟁영화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통영과 인천상륙작전 등과 함께 해병대의 ‘5대 대첩’으로 불리는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지구 전투(1951년 6월)와 김일성고지 전투(1951년 8월) 등이 배경이 됐을 것이라는 관측이다.(김용호, 147쪽) 백선엽장군기념사업회 등은 백선엽 장군의 다부동 전투 등을 다룬 영화 ‘나를 쏴라’(가칭) 제작을 추진 중이다.● 미국, 장진호 영화만 몇 편미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전쟁은 인기도 없고 잊힌 전쟁이었다. 그런 탓에 할리우드 제국을 거느린 미국에서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도 거의 없다. ‘도라 도라 도라’(1970),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미드웨이’(2019) 등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대작들이 잇따라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혹한과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성공적인 철수를 했다고 자부하는 장진호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눈에 띈다. ‘디보션’(2022)은 장진호 전투에 공중 지원에 나섰다가 비상 착륙한 뒤 사망한 해군 첫 흑인 조종사 제시 브라운을 소재로 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 나온 ‘장진호 전투’(1952년)의 원제는 ‘후퇴는 무슨!(Retreat hell!)’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흥남으로 철수한 미 해병대 장교가 자신들은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후방으로 전진하는 작전을 펴고 있다며 한 말에서 따왔다. ‘싸우는 젊은이들’(1961)도 장진호 전투에서 벌어진 해병대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생 들어보지 못했고 처음 와보는 곳에서 치러야만 했던 미군들의 희생을 그리고 있다.(김용호, 126쪽)1962년 제작된 ‘맨츄리안 캔디데이트’는 미군 포로가 중공군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를 암살하도록 세뇌를 당해 공산주의자의 조종을 받는 암살 기계가 된다는 내용이다. 1959년 리처드 콘든의 소설 ‘만주가 만든 대통령 후보’를 원작으로 한 것이다. ● 중국, 애국심 고취 영화 제작 잇따라 중국에서는 미중 갈등 속에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적이 되어 싸웠던 ‘항미원조’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장진호’(2021년)는 미중 갈등 속에서 애국심에 편승해 많은 중국인들이 관람했다. 중국은 병사들의 희생과 영웅 정신을 그린 것으로 혹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을 퇴각시켰다고 선전한다. ‘장진호 수문교’(2022)도 장진호에서 흥남으로 철수할 때 지나야 하는 황초령의 수문교 쟁탈전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1953 금성대전투’(2020년·원제 금강천)는 정전협정 체결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도 화천 북쪽에서 벌어진 금성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미군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등 중공군의 참전을 정당화하는 전형적인 선전물 영화다. 영상물등급심의위원회에서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아 국내 수입이 추진되자 여론이 악화돼 수입사가 상영을 철회했다. 중국 관영 중앙(CC)TV가 40부작 드라마로 방영했던 중공군의 참전 과정을 영화 ‘압록강을 건너다’도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졌다.<참고문헌> 남도현 지음,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0. 문관현 지음, 『임진스카웃』, 정음서원, 2022.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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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전 보장 없는 휴전 없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측이 더욱 전진해 오는 서곡이 되리라고 확신해 정전 조인을 반대했다’(이승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결이 끝나지 않는 한 한국의 평화적 재통일은 어렵지 않나하는 염려가 있다’(아이젠하워)‘사상 처음으로 승리없는 전쟁의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군사령관이 됐다. 패배감을 느꼈다. 조인 후 형언할 수 없는 좌절감에 소리없는 눈물마저 흘렸다’(클라크)정전협정에 서명하면서 전투가 끝난 안도와 평화에 대한 희망보다는 비감함이 서려있듯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협정은 맺어지고 전쟁은 일단 끝났다. 하야를 무릅 쓴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분투와 저항은 ‘한미동맹조약’으로만 멈추게 할 수 있었다. ● 스탈린 사망으로 고비 넘다 포로 교환 기준 등을 두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해 협상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3월 15일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현재 분쟁 중이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는 협상 원칙하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말렌코프 정부는 6·25 전쟁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 온 포로의 무조건 송환 원칙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포로 문제 등을 빌미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서 외교적 이득을 보려했으나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말렌코프 정부의 정전 선회는 미국이 취할 조치 중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분석도 있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포함한 전쟁에서 승산이 없는 소모적인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선즈화, 581쪽)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가 원자탄두를 오키나와에 배치하고 이의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아이젠하워가 국내외로부터 전쟁을 확대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김계동, 373쪽)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전쟁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는 통설과는 다르게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하루키, 537쪽)● 전황 따라 오락가락한 마오쩌둥과 김일성 마오쩌둥(毛澤東)은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참전한 뒤 38선을 넘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할 때는 “미군은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철수하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4월 22~30일, 5월 16∼20일)마저 실패로 돌아간 뒤 “싸우면서 담판하고, 담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오는 소모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분석이 있다. 3월 11일 스탈린의 장례식 참석차 모스크바에 온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소련 지도부에 정전 협정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측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판초프, 551쪽) 김일성은 1951년 5월 마오쩌둥이 6차 대공세 이후 정전으로 선회한 후에도 신속한 승리를 주장하며 6월말에서 7월 중순까지 중조 연합군이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가 전쟁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차라리 중국인 도움없이 전쟁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선즈화, 563쪽) 그러던 김일성은 미군기에 의해 북한 주요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1952년 이후 마오에게 휴전을 호소했으나 이번에는 마오가 듣지 않았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제압하겠다고 했다. 중공이 버틸수록 북한은 더욱 황폐화됐다.(정일화, 552쪽)● 아이젠하워의 강온 양면 휴전 전략 1952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명예로운 휴전’을 공약으로 제시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정권이 교체된 것도 협상 진전의 요인으로 꼽힌다. 아이젠하워는 협상에 적극적이면서도 휴전을 위해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국군 증강, 미 제7함대의 대만중립화 해제로 중공에 대한 심리적 압력 가중, 그리고 덜레스 국무장관을 시켜 한국의 교착상태가 지속된다면 핵사용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중소 관리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힘을 바탕으로 한 강온양면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이용호, 116쪽)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측이 아이젠하워 당선 이후 휴전 협상에 적극 나선데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미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 전쟁에 전력투구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클라크, 19쪽)● ‘12분만에 끝난 정전 협정 서명’ 1953년 7월 27일 10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정전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159회 만이었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된 정전협정문 각 6부, 모두 18부에 양측은 각각 12분씩 서명을 마친 후 단 한마디의 인사말 없이 회담장을 떠났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오후 1시 문산 극장,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사령관은 평양과 개성에서 각각 서명했다. 한국 대표는 협정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협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날 밤 10시 모든 전선의 포성이 멎었고 1129일간의 전쟁은 중지되었다. 7월 31일 김일성은 평양에서 중공군 지도부도 초청한 축하 만찬을 열고 훈장도 수여했다. 8월 3일 회창 중공군 사령부에서도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훙쉐즈 부사령관은 참전명분인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훙쉐즈, 439쪽) 침략으로 3년간 한반도가 황폐화되고 한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미국 등 유엔군이 확전을 자제해 정권을 유지하고 응징당하지 않은 것을 승리로 여기는 그들만의 셈법이었다. <표> 휴전협정 시기 양측 병력 유엔군공산군국군 60만명북한군 47만명미군 등 34만명중공군 135만명94만명182만명출처 : 김철수, 274쪽● 판문점에 웬 피카소의 ‘비둘기’? 회담 당시 판문점은 초가 서너채만 있는 농촌이었다. 3천평의 터를 닦고 천막을 지어 회의장으로 사용했다. 공산측이 천막을 제공하고 유엔은 전기와 난방시설 공사를 맡았다. 지금의 판문점보다 약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협정 조인을 위해 공산측은 회담 장소 북쪽에 강당같은 목조단층 건물을 지었다. 기와지붕 처마밑 삼각형 부분에 피카소의 ‘비둘기’(1949년 작)를 본뜬 두 마리의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었다가 유엔군측 항의로 지웠다.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피카소의 비둘기로 평화를 애호하는 것처럼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은 협정을 조인했던 건물을 ‘평화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있다. 더우기 1976년 도끼 만행 사건 때 사용된 무기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영문 위키) ● 이승만, ‘미군 철수하면 공산측 다시 쳐들어온다’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미국의 방어선 밖으로 밀려나고 해방후 주둔했던 미 24군단 3개 사단이 전차 한 대 안 남기고 떠나 북한의 남침을 불러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51년 6월 휴전 협상 분위기가 높아지자 북한군의 무장해제와 중국군의 철수 등 조건을 제시하며 휴전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한 것은 휴전 이후 외국 군대의 철수 때문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철수해도 강 하나만 건너면 다시 올 수 있지만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가면 전쟁이 발생했을때 다시 군대를 추슬러 올 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1953년 4월 9일 아이젠하워에 보낸 서신에서 ‘중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상태로 휴전되면 한국 정부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지 않는 동맹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며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에는 “중국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협정을 맺으면 한국군을 유엔지휘권에서 철수시켜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클라크가 한국군의 작전권 이양 약속을 어기고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설득했으나 ‘자살을 의미한다고 해도 국군은 싸움을 계속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클라크, 460쪽)● 이승만 하야 작전 ‘에버레디 계획’스탈린 사후 휴전회담은 1953년 6월 8일 ‘포로의 자발적 송환에 입각한 중립국 송환위원단 관련 협정’ 체결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에 함께 이승만의 휴전 반대도 더욱 거세졌다. 국군이 독자 행동을 하겠다는 것에서 나아가 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 석방 엄포까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이승만의 강경 자세를 꺽고 설득하기 어렵다고 본 미국은 유엔사령부에 의해 주도되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세웠다.이는 이승만의 반대 속에 정전협정이 타결됐을 때 ①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② 독자 행동을 하거나 ③ 유엔군에 공공연하게 적대적이 되는 경우에 대비한 유엔군의 행동 계획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불복종하는 한국의 군부 및 민간 지도자를 감금한 뒤 유엔군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 골자다. 체포 대상 민간 지도자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포함된다. 유엔사령부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 또는 민간 지도자 중 명령 불복하는 자들을 감금하며, 유엔사에 의한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남시욱, 66쪽)이는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클라크 사령관이 입안했다가 여야 타협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실행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 전복 계획’을 보완한 것이다.미 국무부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대신 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5월 30일 미국·필리핀 방위조약이나 호주 뉴질랜드와 맺은 엔저스(ANZUS) 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맺는 것으로 이승만 달래기에 나서면서 이승만 하야 계획에서는 물러섰다. ● 이승만의 초강수,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체결이 진전되면서 한국내 휴전 반대 분위기도 높아졌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국회는 129대 0으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급기야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를 예고없이 석방했다. 부산 거제 등 전국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한 밤중에 대탈주가 벌어졌다. 3만 5천여명의 반공포로 중 2만7388명이 4일에 걸쳐 석방됐다. 연초부터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시켜 은밀히 포로석방계획을 준비하다 결행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사망하고 81명이 부상했다. 아이젠하워는 유엔사령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공개된 무력행사라고 비판하면서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클라크는 휴전 협정 체결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나온 반공포로 석방에 당혹해 하면서도 한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자세히 기록했다. 국민들이 탈출한 포로들을 모두 숨겨주고 음식과 술 담배를 제공하는가 하면 한국 경찰들은 탈출한 포로를 검거하려는 미국 병사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클라크, 467쪽)반공포로 석방은 공산측이 유엔군 포로를 석방하지 않고 맞대응하면 협상을 파탄낼 수도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협상은 더 이상 궤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반공포로 석방을 유엔군사령부와 한국이 공모했다고 공격하고 유엔군이 한국군을 통제할 수 있는지 문제 삼았지만 협상 열차를 멈추게는 하지 않았다. ● 클라크의 이승만 존경거제포로수용소에서 공산 포로들이 도드 포로수용소장을 억류한 날인 1952년 5월 7일 유엔군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한 클라크 사령관의 가장 큰 임무는 휴전 협상의 마무리였다. 협상은 공산측의 갖은 잔꾀와 선전술, 터무니없는 지연작전 등으로 진행이 더뎠지만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관문은 ‘이승만과 한국 국민의 반대’였다. 미군 사령관으로서 워싱턴의 지시와 훈령을 받아 협상을 진행시켜야 할 임무를 띤 클라크였지만 이승만과 한국민의 휴전 반대 심정과 논리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마음으로는 동조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승만을 존경하는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신, 압록강 북쪽에 중공군의 병참기지를 손보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확전론을 확고히 지지하는 것도 이승만과 결이 같았다. 클라크는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며 아시아 모든 비공산 국가들의 뿌리깊은 안전 보장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인도 네루 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한 ‘아시아의 별’이라고도 했다.(클라크, 272쪽) 클라크는 “역사는 앞으로 이승만이 한국 전쟁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것이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클라크, 19쪽)● 10대 강국의 초석 ‘한미동맹조약’ 미국은 이승만이 가장 우려하는 휴전 후의 안보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동맹 협상’, 이른바 ‘소 휴전회담’을 통해 이승만의 반대가 장애가 되지 않고 휴전회담이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했다. 휴전 협정 서명 한달여 전인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7월 12일 출국하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며 12차례에 걸쳐 주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이 휴전에 동의하면서 얻어낸 합의사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제공 및 장기 경제원조 △한국군 40개 사단 증강 등이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의 침략이 있을 경우 미국이 다시 오는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배치 및 전략에 관한 계획(JOEWP)’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었다. 트루먼 후임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한미간 상호방위조약은 유엔이 비효율적인 기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한미간에 조약이 체결되면 일부 참전국이 군사 개입을 축소하려 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했다. 베트남은 휴전협정을 맺고 2년 뒤 공산화됐다. 이승만은 ‘협정’이 종이조각에 그치지 않는 안보 방패막이로 만들면서 비로소 휴전 반대를 접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휴전협정 체결 후인 8월 방한해 “조약은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홀로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할 것이며 적에게 미국이 할 일을 할 것이라는 명백한 통고를 하는 것”이라고 10월 1일 체결될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는 조약에서 “외부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의 방위 결의를 공개적이고 정식으로 선언해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당사국 중 어느 한 국가가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고 조항으로 명문화됐다. 조약은 이듬해 11월 비준서 교환으로 발효됐다.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 한데는 한미동맹이라는 안보 울타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조이 제독이 지적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과 협상 요령●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➀회담에 유리한 장소 선정과 분위기 조성 ➁장기 담판에 대비 계급보다 능력위주의 회담 대표단 구성➂원하는 결론으로 가도록 속임수가 있는 의제 설정➃협상에 유리한 사건을 중간에 모의하고 촉발시킴 ➄지연전술로 상대의 조급증 유도, 서방의 인도주의 악용➅약속 후 검증을 거부하는 방법 모색➆협정 실행 중 ‘거부권’ 확보해 필요시 이행 회피 ➇‘가짜 쟁점’ 끼워 넣어 다른 목적 확보용으로 거래➈부력(浮力)있는 진실은 부인보다 왜곡 선호➉상대가 양보하면 약점으로 알고 더욱 강한 요구⑪불리한 합의는 자의적 해석으로 부인 회피 ⑫같은 요구 되풀이해 피로하게 함●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요령 ①정전을 요청해도 압력을 낮추지 마라②회담 시한을 설정해 지연전술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③회담 장소를 결정하게 하면 오만해진다④회담 제안에 서둘러 응하지 마라⑤최고의 협상팀을 구성하라⑥일방적 양보 아닌 댓가를 받아내라 ⑦서두르지 마라 ⑧의제에 함정이 있는지 살펴라 ⑨말을 많이하면 표적만 제공한다⑩목적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회담해야 한다⑪전쟁 피하려면 전쟁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⑫협상할 때는 힘을 배경으로 하지말고 사용해야 한다출처 :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참고 문헌>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남시욱 지음,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 청미디어, 2020.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국제문화출판공사, 1981.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조윤수 옮김, 『한국전쟁 전사』, 청아출판사, 2023.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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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전협상, 또 하나의 전쟁[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회담은 아마 한두 달이면 끝날 것 같아’ ‘가을에 사과가 빨갛게 익을 때까지 끌 것 같네!’‘크리스마스 전에 끝나 집으로 가게 되기를 희망해’1951년 7월 10일 시작된 6·25 전쟁 휴전회담에 유엔군 측 5명의 대표 중 아레이 버크 극동해군 부참모장(준장)은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회담 타결 전망에 비관적이 되어갔다.협상은 버크의 우려보다 훨씬 길어져 2년도 넘긴 759일간 계속됐다. 협상 시작 후 양측 사망자는 개전 이후 1년과 비교해 3배가량 많았다. 희생을 줄이자는 휴전 협상이 더욱 피를 부르는 역설을 낳았다. (이용호, 107쪽)● ‘싸워서 승패 가릴 수 없다’미국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뒤 북진하며 압록강에 도달할 때까지는 휴전이나 협상을 생각지 않았다. 중공군도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로 서울을 다시 점령할 때까지 남진(南進)에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1951년 4, 5월 이후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중공군은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점령한 뒤 37도 선까지 내려왔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밀려 올라갔다. 4월 이후 두 차례 춘계 공세를 퍼부으면서 7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했음에도 중동부 전선은 점점 북으로 밀려 올라갔다. 유엔군은 중동부 전선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다시 38선을 치고 올라갔지만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4월 11일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 해임은 확전론을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왔다. 만주 폭격이나 핵무기 사용 등 ‘확전’은 소련 참전을 불러올 수 있고 3차 대전으로 비화할 우려가 크다고 워싱턴은 판단했다. 유럽 방위에 대한 부담, 38선 돌파 북진 시 20만 명 이상의 추가적인 미군의 인명 손실 우려, 전쟁 장기화에 따른 여론의 피로감 등도 휴전으로 방향을 틀게 했다. 1951년 2월 이후 양측 모두 군사적 승리보다 유리한 고지에서 협상하려는 목적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분석이 나왔다.(김계동, 272쪽)1952년 5월 리지웨이에 이어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마크 클라크는 “공산 측은 최후 공세가 봉쇄되자 재빨리 휴전 회담을 제의해 유엔군의 역공세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휴전 회담에 응했다”고 분석했다.(클라크, 163쪽)● 순조롭지 않은 협상 첫 출발“소련 인민은 한반도의 무력 충돌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계 토의가 교전국 간에 시작되어 38선에서 군대가 서로 철수할 수 있도록 휴전과 정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야콥 말리크 소련 유엔대표부 대사가 1951년 6월 23일 저녁 유엔의 라디오방송 시리즈 기획 ‘평화의 대가’에서 던진 한마디는 공산권의 첫 공식 휴전 의사 표명이었다. 1주일 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역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했다. 공산 측은 하루 만에 “개성에서 7월 10~15일 회담하자”고 응답했다. 7월 10일 개성의 99칸 한옥 집 내봉장(來鳳莊)에서 회담이 시작됐다. 그런데 공산 측은 시작부터 기싸움과 선전전에 몰두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터너 조이 제독 일행이 헬기에서 내리자 미군에게서 노획한 지프차와 군용트럭에 백색기를 달아 일행을 태운 뒤 회담 장소로 갔다. 회담 장소도 유엔 측이 제시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거부하고 중공 측이 통제하는 개성으로 오게 한 것처럼 유엔군이 정전 협정이 필요해 항복하듯 찾아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회담장 주변에 배치된 공산 측 병사들은 유엔 측 일행을 포위하고 자동소총을 위협적으로 흔들어대기도 했다. 협상 테이블 위의 공산 측 깃발을 유엔 측보다 더 큰 것으로 가져다 놓는가 하면 동양 문화에서 ‘승자가 남쪽을 향해 앉는다’며 북쪽 편에 공산 측 자리를 배치했다.(이용호, 108쪽) 회담장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조이 제독은 깜짝 놀랐다. 의자 다리가 짧아 마주 앉은 상대측 대표 남일 앞에서 마치 ‘어뢰를 맞고 침몰하는 해군 제독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의자를 바꿔 앉기 전 공산 측 사진기자들의 촬영은 이미 끝난 뒤였다. 공산 측은 회담 사흘째 유엔 측 기자단 출입을 막으려다 리지웨이 사령관이 “유엔 대표단도 회담장으로 가지 말라”며 강경 대응해 공산 측은 물러섰다.(조이, 11쪽)휴전회담 각 5인 회담 대표유엔군 측공산군 측수석대표 터너 조이 극동해군사령관수석대표 북한 인민군 참모총장 남일미 8군 부참모장 헨리 하지스 소장중공군 제1부사령관 덩화(鄧華)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렌스 크레이그 소장중공군참모장 셰팡(謝方)극동해군 부참모장 아레이 버크 준장북한 인민군정찰국장 이상조백선엽 1군단장북한 인민군 제1군단 참모장 장평산● ‘외국군 철수’ 주장, 미 반대로 철회 워싱턴의 휴전 협상 지침은 ‘회담은 군사행동 중지를 위한 정전회담으로 국한해 중공의 유엔 및 안보리 가입이나 지위 문제, 대만 문제, 38선 문제, 군대 철수 등은 배제하라’는 것이었다.앞서 중공이 2차 대공세(11월 25일∼12월 10일)로 기세를 올리던 1950년 12월 7일 저우언라인(周恩來) 총리가 휴전 조건 5개 항을 제시하는 것 같은 상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저우 총리는 외국 군대 한반도 철수, 미군 대만해협과 대만 철수, 중공의 유엔 진입과 장제스(蔣介石) 축출 등을 내세웠다. 마치 승전국이 내미는 카드와 비슷했다.(선즈화, 618쪽)예상대로 공산 측은 휴전회담 첫 회의에서 즉각적인 정전, 38선 중심으로 20km 비무장지대 설치, 모든 포로 교환과 함께 한반도에서 외국군 철수를 포함했다. 중소는 국경만 넘으면 군대를 다시 투입할 수 있지만 (태평양을 건너간) 미군은 돌아오기 어렵다. 미국은 외국 군대 철수는 공산 측에 침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미국의 강한 반발로 ‘외국 군대 철수’는 안건에 포함되지 않았다.회담 시작 16일 만에 합의된 의제는 ① 비무장지대 설치 및 군사분계선 설정 ②정전 감시기관 설치 등 정전 휴전 실천 위한 조치 ③포로에 관한 조치 등이었다.● 군사분계선 기준 실랑이, 접촉선 v. 38선 공산 측은 군사분계선을 전쟁 전의 38선으로 하고 20km의 비무장지대를 둘 것을 제의했다. 옹진반도 등 서부 전선 일부를 제외하고는 38선 이북으로 진출한 아군을 철수시키고 방어할 수 없는 선에 배치하는 것은 사실상 항복에 다름없다고 여겼다. 조이 대표는 “전쟁에서 잃은 것을 회담에서 되찾으려 하지 말라”고 일축했다. 미군은 현 전선에서 북쪽으로 20마일(32km) 넓이를 비무장지대로 하자며 평양 원산선 근처까지 표시된 지도를 들이밀며 맞섰다.(리지웨이, 281쪽)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회담장 주변 중공군 무장병력이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다 항의하면서 며칠을 허비했다. 공산 측은 미 공군기가 회담장 인근 지역을 폭격했다고 주장하며 2개월가량 회담을 중단됐다가 10월 31일 재개됐다.회담이 멈춘 사이 미군은 7월 30일과 8월 14일 평양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전선을 16km가량 북진시켰다. 그러자 공산 측은 ‘38선 분계선’ 주장을 철회했다. 11월 27일 양측은 지상군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고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로 38선 이남의 개성과 옹진반도는 북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최대 난제 포로교환, 자유 송환 v 강제 송환 짧으면 한두 달 내로 끝날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던 6·25 전쟁의 휴전 협상이 2년을 끌게 된 가장 큰 변수는 ‘반공(反共) 포로’의 처리 또는 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협상 초기 2만 명의 중공 포로 중 1만5천명이 송환을 거부하는 등 공산 측 포로 중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하거나 이전 장제스(蔣介石) 부대 소속으로 북한에 연고가 없어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유엔 측은 인도적 차원에서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한 자발적 송환이 되어야 한다고 한 반면 공산 측은 모든 포로를 자동으로 강제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반공포로의 귀환 거부는 냉전체제가 가속화하는 상황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환영할 일이었다.공산 측이 강제 송환을 고집한 것은 포로 미귀환으로 체제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것과 함께 아직 전투가 진행 중인 전선에서 투항자를 막으려는 계산도 있었다. 공산 측이 완고하게 버티자 유엔 측은 1952년 10월 회담을 중단해 6개월 후인 이듬해 4월에야 재개됐다.● ‘협상 유도용 무력행사’ 클라크 사령관은 ‘회담은 협상이 아니라 총포에 의해 타결되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공산 측과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이를 돌파하는 것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클라크는 자신이 ‘동양 최대의 심장’이라고 표현한 수풍댐 등 압록강의 5개 발전소에 대해 1952년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맹폭을 가해 북한이 2주간 정전됐다. 트루먼은 “휴전 협상에서 협력적인 태도를 갖도록 유도하기 위한 목적의 공격”이라고 했다. 7월 11일에는 작전명 ‘프레셔 펌프’로 평양을 향해 1254회 출격해 1500개의 건물을 파괴했다. 8월 4일과 29일에도 평양의 군사 목표물에 대규모 폭격이 진행됐는데 29일 하루에만 1403회 출격해 700t의 폭탄이 투하됐다.(김계동, 333쪽) 전선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루한 공방을 벌이던 포로 협상은 공산 측이 자유 송환과 5개국 중립국 위원회를 통한 심사 및 귀환을 받아들이면서 타결됐다. 클라크의 표현처럼 ‘총포’가 큰 작용을 했다. 초반 협상을 맡았던 리지웨이는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은 가혹한 세금처럼 인내심을 시험해 성서 속 인물인 욥이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했다.(리지웨이, 86쪽)유엔 측과 공산 측 포로 교환 유엔군 포로 공산군 포로 휴전시 송환1만 3444명휴전시 송환8만 2493명(부상병 포함)송환 거부2만 2604명반공포로 석방2만 7000명송환거부359명 (한국군 325명, 미군 21명, 영국군 1명 등)민간인 귀환자3만 7000명합1만 3803명 합16만 9097명● ‘포로에게 포로가 되다’ 6·25 전쟁 포로 문제는 ‘반공 포로’의 송환을 두고 휴전 협상에서 큰 걸림돌이 됐을 뿐만 아니라 수용소 관리에서도 역사적으로 유례를 보기 드문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다. 공산 측은 공작대원들을 포로로 가장해 수용소 내로 잠입시키거나 친공 포로들을 전투요원으로 이용하는 ‘제6열 작전’을 전개했다. 이들은 공산 측의 지령에 따라 판문점 휴전 협상과 연계한 활동을 벌였다. 포로들을 분산 수용하려고 하자 거제 76수용소에서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지하도를 파고 무기를 확보하는 등 전투 계획서까지 발견됐다. 수용소 측은 공산 공작대원과 포로들 간의 간첩 연락 아지트로 사용되고 있던 수용소 주변의 민간인 부락을 철거시키기도 했다.1951년 중반 거제수용소의 북한군 포로가 2만 명에 육박했는데 수용소 내 친공 포로들은 정치 보위부, 조직 및 기획 전담, 경비대, 선전 선동 부서를 두어 마치 ‘포로 공화국’을 방불케 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재판을 하고 사형까지 집행하는 집행대가 있을 정도였다. 수용소에 반미 구호가 적힌 현수막, 심지어 인공기도 내걸었다. 1952년 12월 거제 봉암도(추봉도)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집단 시위를 벌여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쌍방간 교전으로 포로 85명이 사살되고 113명이 부상했다. 포로수용소도 후방의 전선이었다.(클라크, 113쪽) 1952년 5월 거제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도 이런 분위기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포로에게 포로가 되는 난센스가 벌어진 것이다.(클라크, 87쪽) 포로들은 프란시스 도드 포로수용소장(준장)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다 3일 후 풀어주었다. 이들은 석방 조건으로 수용소 자치화, 자유 결사 허용, 수용소 막사 간 연락 전화 가설 등을 요구하고 반공포로 심사 중단을 요구했다. 포로수용소장 납치 사건을 계기로 수용소 내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간에 내란에 버금가는 8개월간에 걸친 피 묻은 투쟁사가 드러나기도 했다. 수용소 내 시위 폭동 반란 탈옥 반공포로 탄압 등이 적절히 관리되지 못한 데는 수용 인원을 초과한 데다 관리를 위해 배치한 인력이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리지웨이는 진단했다.(리지웨이, 286쪽) 정전협상 중 더욱 치열했던 혈전들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 협상이 시작된 후에는 38선 인근에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 및 화력을 실감한 중공군은 1953년 정전 협상 타결이 임박한 시기 최후의 공세까지 2년여간 대규모 공세는 중단했다. 대신 거대한 규모의 땅굴을 파고 버티며 기회를 노렸다. ● 피로 물들인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들 강원도 양구 방산면에서 국군 5사단이 북한군 12사단과 벌인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 16일~22일)는 미군 부대가 실패한 작전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고지쟁탈전이었다. 공격 목표로 삼은 T,U,V 등의 주요 고지를 연결한 능선이 피로 물들었다.그해 ‘단장의 능선전투’(9월 13일~10월 15일)는 양구 방산면과 동면 일대에서 미 제2사단이 중공군과 북한군이 벌인 접전으로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은 종군기자들이 붙여준 표현이다. 아군은 한 달여 전투 끝에 능선을 추가 점령해 전선을 북쪽으로 올렸다. 아군은 3700여명이 전사한 반면 공산군 피해는 2만1000여명에 달했다.(온창일, 257쪽)양구전쟁기념관에는 1951년 6월부터 12월까지 벌어졌던 도솔산, 피의 능선, 펀치볼, 단장의 능선 등 9개 전투가 9개 기둥에 새겨져 있다. 전적비의 숲이 고지전의 치열함을 보여준다.● ‘작전명 쥐잡이’ 지리산 공비토벌1951년 7월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된 뒤 38선 주변에서 대치와 고지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후방인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무장공비도 골칫거리였다. 군은 당시 이상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단 약 3800명이 지리산 일대에 출몰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백선엽, 2009, 264쪽) 주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엔군이 반격 작전을 개시한 뒤 북으로 가는 퇴로가 막힌 북한군 정규군이었다. 여기에 각 지역의 남로당 조직과 여순 사건에 가담한 좌익 무장 세력 등이었다. 공비토벌은 휴전협상 초기 협상 대표로 참여했다가 전방 1군단장으로 옮긴 백선엽 소장이 ‘백(白) 야전전투사령부’라는 특수 임무를 띤 부대를 조직해 맡게 됐다. 수도사단과 8사단 등이 투입된 백사령부는 그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3차례에 걸쳐 지리산을 포위해 좁혀가는 ‘토끼몰이’ 방식으로 소탕했다. 육군본부 자료에는 사살 5800여명, 포로 5700여명이었다. 일부 잔당은 휴전 후까지 출몰했으나 공비토벌은 일단락됐다.● ‘삼용사’가 실마리 푼 백마고지 전투 중공군 3개 사단으로 구성된 38군은 1952년 10월 6일 강원도 철원의 ‘395고지’ 공격을 시작한다. 국군 부대는 전쟁 기간 승패와 영욕을 겪은 김종오 사단장의 9사단. 15일까지 육탄전을 벌이며 24회나 뺏고 뺏기는 대혈전이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1만5천명이 사망했고 국군도 3천4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전투의 실마리는 ‘백마고지 3용사’가 풀었다. 전투 시작 1주일째인 10월 12일 제30연대 제1대대는 백마고지 9부 능선에 설치된 적 기관총 화력에 피해만 입고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포병이나 공군 화력으로도 제압되지 않았다. 이때 3중대 1소대장 강봉우 소위는 오귀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수류탄을 들고 적진지에 뛰어들어 기관총 진지를 폭파하고 자신들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백마고지는 이후 다시는 적에게 내주지 않았다. 서울 능동어린이공원에 ‘백마고지 삼용사의 상’이 있다.무명의 봉우리 ‘395고지’가 백마고지로 불린 유래는 명확지 않다. 작전 기간 중 포격에 의하여 산 정상의 수림이 다 쓰러져 버리고 난 뒤 나타난 산의 형태가 마치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종군기자들이 수많은 조명탄 아래로 하얀 낙하산 천에 뒤덮인 산의 지세를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온창일, 279쪽)● 상감령과 저격능선, 삼각고지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오성산과 인접한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해발 580m의 무명능선이다. 저격능선(Sniper Ridge)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중공군 제26군이 이 능선에서 미 제25사단을 저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중공군에게는 오성산을 방어하기 위한 중요 관문이었고, 국군 제2사단에는 사단 주저항선을 감시하는 위협요소를 없애고 오성산 공격의 발판이 되는 고지였다.양측이 방어 전면 약 800m를 두고 6주가량 전투를 벌였다. 미 7사단은 인근의 삼각고지,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을 공격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으로 부른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한 달 이상 전투 결과 중공군 전사자가 3배 이상이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최후의 혈전, 금성고지와 베티고지 전투 강원도 화천 북방에서의 금성샛별고지 전투(1953년 7월 13~19일)는 정전 협정 1주일 전에 끝났다. 국군 제2군단이 초기에 금성 돌출부를 상실했지만, 중공군 5개군 15개 사단의 공세를 저지하고 이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을 펼쳐 금성을 회복하고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끝냈다. 1주일가량의 전투에서 국군은 1만 4373명(전사 부상 실종 포함), 중공군은 6만 6000여 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4km가량 전선을 밀어 올리는 대가치고는 엄청나게 큰 대가를 치렀다.정전협정 직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이틀간 벌인 베티고지 전투(7월 15〜16일)는 국군 제1사단의 1개 소대가 중공군 3개 대대 병력과 싸워 고지를 끝까지 사수한 기적 같은 전투였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적은 314명이 사살된 반면 아군 전사자는 6명에 그쳤다. 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한국과 미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경기도 연천군 베티고지는 임진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이곳을 뺏기면 휴전선이 10km 이상 남쪽으로 밀려 임진강 남쪽으로 그어질 수도 있었다. 중공군은 15일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 반까지 19차례에 걸쳐 아군 교통호까지 밀고 들어와 총검과 육박전을 벌였다. 베티고지 전투는 영화 ‘격퇴’(1956)와 ‘베티고지의 영웅들’(1980)의 소재가 됐다.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베티고지가 임진강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태풍전망대에서는 매년 호국영령 추도식이 열린다.참고 문헌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터너 조이 지음, 김홍열 옮김,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3.『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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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5성 장군 육군원수, 라디오로 해임 전해듣다’ 1951년 4월 11일 오전 1시(미국 현지시간). 백악관 공보비서가 백악관에서 특별기자 회견을 갖고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해임을 발표했다. 시차가 있어 11일 오후가 된 도쿄의 라디오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맥아더 해임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사령관이어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이었다. 방송을 들은 맥아더의 부관 시드니 허프 대령은 맥아더의 아내 진 맥아더에게 전화해 해임 사실을 전했다. 맥아더는 아내로부터 자신의 해임 보도를 전해 들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에서는 기쁨과 환희로 종이 울리고 축제 기분에 들떴다.(맥아더, 267쪽)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해임을 전해 듣게 된 경위를 자세히 소개했다. 얼마나 갑작스럽고 어이없게 자신의 해임이 이뤄졌는지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상관 명령 불복종으로 군인이 해임되는 것은 큰 불명예임에도 한 번의 해명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을 해임한 것에 대해 후에 격렬히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초 애치슨 국무장관이 무초 주한대사에게 명령서를 전문으로 보낸 뒤 마침 방한 중인 페이스 육군장관이 도쿄로 가서 직접 전달해 예우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카코의 한 언론이 11일 조간으로 보도할 것으로 알려져 부득이 긴급 발표하게 됐다고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설명했다.(트루먼, 424쪽)● “트루먼 탄핵하라”, 여론의 분노 많은 미국인들은 맥아더의 해임 소식에 항의해 전국에서 트루먼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 노조는 항의로 조업을 중단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늘어서 환영했다. 뉴욕에서는 70만 시민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영웅을 맞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 귀국 환영 인파보다 2배는 많았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인기가 없는 사람에 파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트루먼은 전형적인 소인배”라는 논평을 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를 복귀시키라”고 주장했다.(핼버스탬, 938쪽). 맥아더에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퇴임 연설을 하고 해임 경위를 따지는 의회 청문회도 열기로 했다.(‘미래한국’, 2015년 4월 10일) 맥아더가 해임되자 일본은 천황이 직접 방문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한국 국회는 감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위해 했던 일과 우정을 베풀어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세계 역사상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맥아더가 일본을 떠난 4월 16일 2백만 명의 시민이 미 대사관에서 아츠키 비행장까지 길에 늘어섰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는 후지산을 한 바퀴 돈 뒤 미국으로 향했다.(맥아더, 269쪽) ● ‘맥아더 해임은 문민우위 헌법 수호 차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맥아더 육군원수가 공적인 직무와 관련된 문제에서 미국 및 UN의 정책을 성심껏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 사령관이 법과 헌법에 의한 정책 및 명령에 의해 통할되는 것은 기본 원칙이다. 그가 나라에 바친 탁월하고도 유례없는 공헌에 깊은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해임 조치를 다시 한번 유감으로 생각한다.” 트루먼은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아 해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당시는 중공군의 4차 대공세 이후 약 2개월간의 ‘휴지기’였다. 하지만 곧 중공군이 70만 명을 동원한 ‘1차 춘계 대공세’를 벌이기 직전으로 6·25 전쟁은 급류속이었다. 그런데 16개국 UN군 수장이기도 한 장수를 전격 경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임 발표가 나오기 나흘 전인 4월 7일 국무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간부 등이 모인 회의에서 맥아더 해임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심지어 이미 2년 전 극동군사령관 등에서 해임되어야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맥아더 해임’은 한국전쟁 수행 방식의 이견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다. 6·25 전쟁의 작전 범위를 둘러싼 이른바 ‘확전론’과 ‘제한론’의 갈등에서 임계치를 넘어 폭발했던 것이다. ● 트루먼의 휴전 의지 정면 거부한 맥아더 트루먼 행정부에서 맥아더 해임은 휴화산이었지만 해임 결단 이전 보름 남짓 기간에 벌어진 두 사건이 트루먼의 표현대로 ‘선을 넘은’ 계기가 됐다. 해임을 불러온 마지막 두 개의 폭탄이었다. 첫째는 맥아더가 트루먼의 휴전협상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른 3월 24일의 성명. 트루먼은 3월 중공군에 대한 반격작전인 ‘리퍼 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았다고 보았다. 공산군측이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게 느끼는 이 때가 휴전협상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전쟁은 외교보다 군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이랬다. “적의 인해전술은 우리 군대가 익숙해져 쓸모없게 되었다. 중국의 생산기반과 원료로는 중등 정도의 공군과 해군을 편성 유지하는 것도 부족하다. 대량파괴수단의 발전으로 단순한 병력수만으로는 약점이 만회되지 않는다. 군사작전을 중공 연안과 내륙기지까지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인 붕괴 위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트루먼, 416쪽) 밀리는 적을 확실히 밀어붙이고 중국 대륙까지 확전하자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 후퇴한 뒤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선언 초안을 준비해 참전국과 맥아더에게도 보냈었다. 맥아더의 성명은 휴전을 거부하는 확전 위협으로 간주됐다. 국무부는 우방국에 맥아더의 회견은 워싱턴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었다고 해명해야 했다.(김계동, 281쪽)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분개했다. “외교정책에 관한 어떤 발언도 삼가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적으로 무시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며 최고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불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자 UN의 정책을 우롱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불복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수가 없었다.”(트루먼, 417쪽) 그는 맥아더의 성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으며 미국의 전통적인 문민우위에 도전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맥아더를 용인하면 문민우위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한 서약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에게 맥아더 해임은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 “일개 장교가 극동의 황제가 되려는 것 용납할 수 없다” 휴전 노력에 반대하는 맥아더의 불복 사태 처리에 고심하던 트루먼에게 ‘마틴 편지 사건’이 터져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4월 5일 야당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조지프 마틴은 하원에서 맥아더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라며 공개 낭독했다. 대만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지지하는 마틴이 2월 12일 하원에서 했던 “장제스 군대가 한국전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바보스러운 결정”이라는 발언에 대한 맥아더의 코멘트였다. 맥아더가 3월 20일 마틴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귀하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도 않고 전통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외교관들이 입으로 싸우지만 여기서는 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패하면 유럽도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것, 여기서 이기면 유럽의 자유를 보존하게 되리라는 것 등을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이 보입니다. 승리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맥아더, 253쪽) 트루먼은 승리도 올바른 승리와 그릇된 승리가 있는데 맥아더가 마음에 두는 중국 폭격에 의한 승리는 그릇된 승리라고 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침공 기간 중 “나는 싸움마다 모두 격파했으나 어느 한 곳도 얻지 못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의 전장에서의 승리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트루먼, 422쪽)” 맥아더의 편지가 공개된 날 트루먼은 일기에 “맥아더가 또다시 정치적인 폭탄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 될 것 같다. 누가 봐도 확실한 불복종에 해당한다. 극동지역 고집불통 장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적었다.(핼버스탬, 929쪽) 트루먼은 후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더욱 격렬한 어조로 맥아더를 비난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 즉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 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핼버스탬, 935쪽) 4월 9일 미 합참은 맥아더 해임을 건의하고 트루먼은 4월 11일 민간 및 군부참모들의 만장일치 지지로 해임 결정을 내렸다. ● 트루먼과 맥아더의 오랜 신경전 지휘 계통으로만 보면 군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은 수차례 맥아더를 해임 혹은 경질할 수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자 높은 여론 지지를 받는 맥아더는 ‘전쟁에서는 내가 옳다’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갈등이 누적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같은 전과(戰果)가 맥아더를 ‘언터처블’의 지위를 갖게 했다. #1. 6·25 전쟁에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참여시키는 문제를 두고 이견을 보인 가운데 1950년 7월 31일 맥아더가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의 중국 본토 공격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만에 대한 군사적 폭력 행위를 방지하는 문제로 대화가 국한됐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며 무마해야 했다.(맥아더, 180쪽) 그는 회고록에서 이 방문 여파로 자신이 해임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일본과 싸울 때는 장제스와 손을 잡으면서 공산당과 싸울 때는 왜 손을 잡지 않냐”고 불만을 나타내고 “내가 공직에서 추방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분명했다”고 적었다.(맥아더, 185쪽)#2. 맥아더가 1950년 8월 24일 미 해외참전군인회(VFW)에 보낸 메시지도 대만 문제로 트루먼과 갈등을 빚은 대표적인 사례다. 맥아더는 “대만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전진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만 방어를 반대하는 자들은 ‘패배주의자’‘유화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를 해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애치슨도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냐’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며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고 했다.(애치슨, 550쪽)● 트루먼의 ‘언론 금족령’도 무시 트루먼은 1950년 12월 5일, 해외 주재 외교관들에게 군사문제나 외교정책에 관해 미국의 언론기관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특정인을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맥아더를 겨냥한 것이었다. 앞서 12월 1일 맥아더는 ‘US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와 인터뷰에서 만주 국경지대의 공산군을 폭격할 수 없어 UN군은 군의 역사상 전례가 없이 엄청난 핸디캡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직격이었다. 이 때도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어야 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맥아더의 ‘언론 플레이’가 계속되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트루먼이 선택한 카드가 ‘언론 금족령’이었으나 맥아더는 개의치 않았다. 1951년 1월 29일 영국 ‘텔레크라프’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자유를 위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발언해 당시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트루먼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 트루먼과 맥아더, 웨이크섬 신경전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열린 트루먼과 맥아더의 회담은 ‘맥아더의 중공군 불참 오판 발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참전할 가능성이 적고 참전해도 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은 ‘맥아더가 늦게 도착해 트루먼 대통령을 기다리게 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먼저 회담 장소. 당초 호놀룰루가 지목됐으나 맥아더가 ‘전쟁 중 오래 도쿄 본부를 비우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해 워싱턴에서는 1만2000km, 도쿄에서는 4800km 떨어진 웨이크섬으로 결정됐다. 백악관 실무자들이 ‘국왕이 왕자를 만나러 가는 법이 어디있냐’고 반대하기도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외국의 군주처럼 행세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불참했다.(핼버스탬, 555쪽) 그럼에도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러 간 이유는 뭘까. “(재선까지 대통령 임기 6년째인데)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워싱턴에) 다녀가라 해도 오지 않아 유감이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위협에 대한 소식도 궁금했다.”(트루먼, 339쪽) 사령관에게 전쟁 현황을 들으려는 것도 있지만 트루먼이 한 달도 안 남은 중간선거에 ‘전쟁 영웅 맥아더’의 후광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맥아더도 “회담이 무슨 목적으로 열렸는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간선거가 다가오고 있어 대통령은 회담 목적이 자기 정당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부시키는 데 있었던 것 같다”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보았다.(맥아더, 216쪽) 트루먼은 중공군에 대한 맥아더의 견해를 듣는 것이 회담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강조했지만 맥아더는 회담이 끝날 때쯤 잠깐 언급했다고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음을 부각하려 한 반면 맥아더는 주요 화두가 아니었음을 강조한 회고록에서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 대통령에 경례하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가 자신이 탄 비행기를 연착시켜 대통령이 기다리게 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하와이를 거쳐온 트루먼의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는 오는 도중 예정보다 빨리 도착하지 않기 위해 조종사가 일부러 비행속도를 늦추었다.(트루먼, 340쪽)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면서 경례를 하지 않은 것이 모두의 눈에 띄었다.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회담 후 무례함을 들어 교체를 건의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지 않고는 해임할 수 없다”고 했다. 트루먼은 오전에 회담을 마치고 점심을 같이 하고 싶어했지만 맥아더가 도쿄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했다. 맥아더는 시차 때문에 점심을 하고 가면 한밤중에나 도쿄에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트루먼은 퇴임 수년 후 고향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버넌 월터스로부터 웨이크섬에서 맥아더가 경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결국 그를 해임했는데 실은 훨씬 전에 해야 했다.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이해하질 못했다”고 털어놨다. 회담에 워싱턴에서는 35명의 기자와 카메라맨이 3대의 비행기에 나눠타고 와서 트루먼을 동행 취재했다. 반면 도쿄 사령부를 출입하는 ‘근위대’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기자들은 가지 못했다. 맥아더는 전용기에 여유가 있었지만 국방부가 허락하지 않아 기자단 동행없이 섬으로 왔다. 웨이크섬 회담은 메모없이 구두로만 진행됐다. 그런데 회담에서 필립 제섭 대사의 여비서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옆방에서 회담 내용을 속기한 것이 맥아더 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졌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을 증명하는 자료여서 맥아더가 항의하는 등 논란거리가 됐다. ● 트루먼과 맥아더, 상호불신과 불화 트루먼은 맥아더를 군인으로서 존중 존경하지만 “프리마돈나처럼 구는 5성 장군과 도대체 뭘 하란 말인지”라고 자신의 일기에 적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꺼리고 불신했다. 공화당 대선 예비선거에도 출마했던 맥아더는 민주당 소속으로 자신이 싫어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뒤를 이은 트루먼을 좋아하지 않았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에 반대하는 등의 이유로 맥아더를 육군참모총장에서 내쫓고 대장에서 소장으로 강등시켰다. 맥아더는 5성의 육군 원수로서 ‘주방위군 대위 출신에 업적도 정치적 능력도 보잘 것 없는 인물이 어떻게 내 위에 있을 수 있나’라며 대통령과 자신을 지휘 계통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핼버스탬, 191쪽) 웨이크섬 회담에서 만난 트루먼에 대해서는 “겉핧기 지식은 있으나 사실의 배후에 깔려있는 논리나 정확한 원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극동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고 폄하했다.(맥아더, 213쪽)● 맥아더 청문회 맥아더 해임은 큰 파장을 일으켜 공화당은 트루먼과 애치슨 탄핵까지 거론하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상원 군사위원회와 외교위원회 합동청문회가 5월 3일부터 6월 말 42일간 진행됐다. 맥아더 본인을 불러 공방을 벌인 청문회는 3일간 진행됐다. 맥아더는 대만 국민당군 이용이나 만주 폭격 등이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자신의 구상은 한국 전쟁에서의 승리가 목적일 뿐 중국과의 전면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브래들리 합동참모본부 의장은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대중국 태도는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을 수반하고 있다며 맥아더의 전략은 ‘미국을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된 시간과 장소에서 잘못된 적에게 몰아넣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루먼 정부는 청문회를 크나큰 승리의 순간으로 기록했다. 오랜 숙적의 발톱을 뽑아버린 것으로 여겼다.(핼버스탬, 954쪽) 하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장제스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게 내전에 패해 대륙에서 물러났고, 중공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이 3년을 지속하면서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1932년 루즈벨트 집권 이래 2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됐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는 미국 1951년 4월 19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 고별연설에서 자신의 아시아 중심주의에 대한 철학, 자신이 10개월 가량 지휘했고 아직 진행중이던 6·25 전쟁에 대한 소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했다. 그의 중국에 대한 진단은 ‘전랑(戰狼)외교’라는 말까지 듣는 현재의 중국에도 해당될 듯한 내용이 적지 않다. 다음은 연설요지 ● 아시아 흔히 아시아는 유럽으로 향하는 입구라고 말하지만 유럽이 아시아로 향하는 입구라는 것도 사실이다. 아시아나 유럽이나 어느 한쪽이 가지는 방대한 영향은 반드시 상대방에게도 끼치게 마련이다. 미국의 힘이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보호하기에 불충분해 우리의 노력을 분산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패배주의를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적이 힘을 쪼개 아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면 우리도 동시에 적에 반격하는 도리밖에 없다. ● 대만의 중요성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태평양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게 됐다. 어떤 환경에서도 대만이 공산주의자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대만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당장 필리핀의 자유와 일본의 상실을 가져온다. 우리의 서쪽 경계선이 캘리포니아주, 오리건주 워싱턴주 해안까지 후퇴하게 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공산 중국에 대한 인식 공산 정권 아래 통일된 중국의 민족주의는 점차 침략적인 경향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중국인들은 자신의 이상과 개념에 입각한 군국주의를 발전시켜왔다. 중공은 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방법과 개념에서는 점차 침략적인 제국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제국주의의 본질인 영토 및 세력 확장을 위한 야욕을 지니게 되었다. 중공 정권에 이데올로기적 요소는 적은 것 같다.● 6·25 제한전에 대한 불만 나는 증원부대를 요청했으나 보낼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압록강 북쪽 적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도록 허가하지 않는다면 대만의 약 60만 명 병력을 한국전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것이 곤란하면 중국 해안을 봉쇄하여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문제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사령관으로서의 나의 견해임을 밝혔다. 결과는 나의 입장을 왜곡하고 나를 전쟁 도발자라고 비난했다. 이는 진실과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 한국인의 용기와 신념 한국의 비극은 군사행동이 제한되어 있어 더욱 비참해지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 중 사력을 다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민의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은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전한 최후의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이제 52년 군인 생활을 마치려 한다. 내가 입대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내가 웨스트포인트 광장에서 선서를 마친 이래 세계에는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나의 희망과 꿈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초년 장교시절 군대에서 유행하던 노래의 후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의 노병처럼 이제 군대 생활을 끝내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간다. “트루먼 씨, 나의 해임은 부당하다” 한국 정부 부처인 문화공보부가 발행하는 잡지 ‘정보’ 8호(1956년 8월)는 맥아더 장군이 자신의 해임에 대해 트루먼에게 조목조목 반격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잡지는 원문의 출처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다. 미국 정치의 ‘문민 우위’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이 군 사령관을 해임한 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퇴임 후 글로써 격렬히 반박했다. 자신의 해임 배경에 대해 트루먼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설명한 것을 두고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호칭은 ‘트루먼 씨’였다. ● 반박 글을 쓰게 된 동기 트루먼 씨의 사실 왜곡이 너무나 지나쳐 진실한 수정보고를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도리어 국가에 대하여 충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하여서도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황달증에 걸린 환자의 눈에는 모든 것이 황색으로 보인다는 옛말은 트루먼 씨의 과오의 원인을 설명하는 좋은 말이다. 이 어구는 특히 악의 또는 원한과 복수심에서 나오는 비천한 본능작용을 초월하지 못하고 빈번히 과격화하고 저속한 대중 언쟁을 일삼아 오던 트루먼 씨의 경우에 적합한 말이라고 하겠다.● 트루먼의 ‘제한전’ 비판 트루먼 씨의 정책 변경은 약속된 범위 이상으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오랜 휴전회담 기간 받은 아군의 손상보다 훨씬 적은 손해로 완전한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던 아군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묶었다. 국제연합군 사상자의 약 5분의 3은 내가 해임된 뒤 발생했다. 트루먼 씨의 작전은 수비 위주이다. 이는 전쟁에서 수비보다 공격을 위주로 해야 한다는 미국의 한세기 반 이래의 군사적 교의에 역행하는 기괴한 작전이다. 전쟁은 이기지 못해도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기이한 이론도 폈다. ● 해임 절차상의 문제 트루먼 씨는 나를 해임하는데 수년간 있었던 일을 열거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불복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관 명령 불복종은 군인으로서는 가장 중대한 범죄다. 그러한 불명예스러운 비난을 받는 군인은 예외없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법에도 설명과 청문을 요구할 권리가 규정되어 있다. 나에게는 전혀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등의 법적 호소를 제기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직을 떠나고 나도 일개 시민이 되었을 때 회고록을 통해 나의 해임사유가 명령 불복종에 의한 것이라고 뒤늦게 말했다. ● 부당한 해임 사유 트루먼 씨는 나의 해임 이유를 조사한 상원합동조사위원회에 참석한 합동참모본부 간부들이 맹세코 나의 해임이유가 명령불복종이 아니라고 한 점을 은폐하려고 한다. 자신에 대한 비난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씨는 브래틀리 합참의장이 명령불복종의 죄를 비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래틀리는 세 명 의원의 질문에 세 번 거듭해 ‘맥아더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일은 전혀없다’고 대답했다. ● 맥아더 회고록에서 반격맥아더는 자신이 무언가 비열한 방법으로 공화당과 공모하고 있었다고 트루먼이 믿었다며 자신의 해임은 극히 정략적이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의 뜻과 맞지 않은 사례로 링컨과 그랜트 장군의 사례를 들며 “링컨의 침착한 위엄과 자제력을 갖춘 태도와는 얼마나 차이가 클까”라고 꼬집었다.(맥아더, 260쪽)그는 자신이 해임 몇 년 후 상관에 복종하지 않았다며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나만큼 철저하게 복종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무엇보다 문관우위는 미국 정치의 기본 요소지만 자신처럼 갑작스런 방법으로 해임된 예는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해임에 앞서 청문회도, 변명할 기회도 부여되지 않았으며 과거의 경력에 대한 것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는 지휘권 이양에 따른 예의를 지키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며 “사무실의 사환, 청소부, 하급직원도 이처럼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맥아더, 265쪽)<참고문헌>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2권, 일신서적, 1993.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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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번 계급없는 영웅! 학도의용병[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포항에서 7번 국도를 따라 20여km를 올라가면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앞바다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형 태극기가 갑판에 걸려있고 배의 옆면에 ‘작전명 174호…잊혀진 영웅들!’이란 커다란 구호와 함께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흰색으로 쓰여있다. 인천상륙작전 전날 양동작전을 위해 장사상륙작전에 동원됐다 좌초했던 ‘LST 문산호’다. 1997년 3월 6일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대원들이 바닷속 갯벌에서 발견했다. 문산호에 오르기 전 해변에 조성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는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비’, 상륙작전 하는 병사들 조형물 등이 있다. 공원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고등학생 모자 조형물. 모자 앞에 ‘高’자가 선명하다. 상륙작전에 참여한 부대원 대부분이 학생들이었음을 상징한다. ● 학도병으로 구성된 ‘독립 제1 유격 대대’, ‘명부대’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 27일 대구와 밀양에서 모집한 772명으로 육군본부 직할의 ‘독립 제1 유격 대대’가 편성됐는데 대부분 학생들이었다. ‘독립 제1 유격 대대’는 이명흠 대위가 직접 대구역 광장 등에서 모병해 ‘명부대’란 별명이 생겼다. 명부대에 내려진 ‘174호 작전’ 명령은 ‘장사해안에 상륙해 김무정 중장 휘하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아울러 적의 후방을 교란하라’는 것이었다.문산호 기념관 내부에는 학도병으로 참가하게 된 다양한 증언들이 소개됐다. 나라 없는 학교가 무슨 소용인가, 의무감과 사명감으로 왔다. 자원입대하려고 모병소에 갔더니 나이가 어려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오라고 해서 추천서를 받아서 왔다 등 자원입대 진술이 있다. 반면 밀양교를 건너 부산으로 가고 있는데 군인이 오라 하더니 다른 군인에게 인계했다. ‘아저씨 저 17살이에요’ 했지만 ‘잔소리 말고 따라와’ 해서 교복을 입은 채로 미군 트럭에 실려 창녕군의 낙동강으로 갔다는 사연도 있다. 당시 모병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어 긴박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더했다.● 태풍 좌초에도 ‘밧줄’ 상륙과 작전 수행 ‘174호 작전’은 적을 속이기 위해 대대급임에도 불구하고 ‘사단’으로 위장했다. 중대를 연대로 부르고, 지휘관들도 그에 맞는 임시 계급을 부여했다. 북한 방송이 ‘2개 연대가 상륙했다’고 한 것은 이런 기만책이 효과를 본 것이었다. 부대는 출항하기 전 명부대원과 미군이 번갈아가며 승선과 하선을 수차례 반복해 마치 미군도 상륙작전에 참여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나무위키’) ‘명부대’ 대원 772명을 실은 문산호가 하루 전 부산항을 출발한 뒤 9월 15일 오후 2시경 장사해안에 도착했을 때 한반도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는 동해로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으로 출항 및 해안 도착이 계획보다 하루 늦어졌다. 서해에서 인천상륙을 준비하던 맥아더는 태풍이 동해로 비껴가 한숨을 돌렸으나 명작전 주함이었던 2700t급 문산호는 좌초됐다.태풍으로 상륙지점을 찾지 못해 표류하던 문산호가 상륙지점 해안에서 300m 떨어진 해역에서 좌초되자 특공대는 문산호와 해안에 밧줄을 연결해 상륙을 시도했다. ‘밧줄 상륙’ 과정에서 학도병들은 적의 총격에 일개 중대가 거의 몰살됐다고 한다.(최상진, 60쪽) ‘72시간 임무 수행 후 전원 철수’라는 상륙작전은 문산호 좌초와 함께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럼에도 적의 포화 속에 물로 뛰어들어 상륙한 대원들은 해안의 200고지를 점령하고 5일간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전투를 벌이다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귀환했다. 철수할 때도 해안에서 200m가량 떨어진 해상에 조치원호가 정박해 ‘밧줄 철수’를 했다. 양측이 전투를 벌이면서 긴박하게 철수하면서 39명의 대원은 미처 승선하지 못했다. 이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포항전투사’, 31쪽) 이명흠 대위를 포함해 ‘명작전’에 참가한 누구도 이 작전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연막작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당초 사흘에서 1주일로 길어진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부산 부두에서 신문 호외를 보고 자신들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양동작전에 동원됐음을 알게 됐다.(‘학도의용군 연구’, 163쪽) 장사상륙작전 일지 출처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8월 27일 ‘독립 제1 유격 대대’ 편성(772명) 9월 12일 ‘작전 명령 174호’ 전달 9월 14일 LST 문산호 승선, 부산항 출발9월 15일 장사 앞바다 도착, 태풍으로 좌초9월 15일 ‘밧줄’ 상륙, 200고지 점령9월 16〜8일 북한군과 교전. 적 2군단 후방 보급로 차단 작전 9월 19일 구조선 LST 조치원호로 ‘밧줄’ 귀환 아군 피해 : 139명 전사, 92명 부상, 39명 미승선 포로 북한군 피해 : 270명 사살 ● ‘옥쇄한 학도의용군’현 포항여고 앞에는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가 있다. 전사자는 48명인데 전적비 뒷벽에 새겨진 전사자 이름은 14명이다. 전투가 끝난 뒤 보름가량이 지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돼 상당수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11일 학도의용군 71명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국군 3사단 지휘소로 사용되던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적에게 포위된 채 전투를 벌였다. 나이는 16〜21세로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피란 왔다 참가한 고등학생과 일부 대학생들이었다. 북한군 5사단과 766 유격부대는 이날 새벽 3시 반부터 4차례에 걸쳐 파상적인 공격을 해왔다. 학도병들은 M1 소총과 각자 250여발의 실탄, 수류탄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으나 북한군은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실탄이 떨어진 뒤에는 육박전까지 벌이는 혈투로 11시간 반을 버티다 48명이 전사하고 13명은 포로가 됐다. 부상자 6명은 초반에 후송되고 4명은 행방불명이었다.이들이 피로 버티며 적의 진격을 지연시켜 많은 시민들이 피난 갈 수 있었고 사단 지휘소의 주요 서류와 물자도 후방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6·25’, 602〜7쪽) 전적비 옆에는 이곳 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 3학년 이우근 학생이 ‘결전’ 하루 전날 메모지에 쓴 피 묻은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편지는 시신을 수습할 때 주머니에서 발견됐다.‘지금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엎드려 있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인데 적병은 너무 많습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니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는 다시 편지를 쓰지 못했다. ● 최후의 방어선(워커 라인)이자 학도병 성지, 포항 포항 형산강은 6·25 전쟁 최후의 방어선으로 ‘워커 라인’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특히 학도병의 활동이 활발해 국내에는 유일하게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이 있다. 포항여고 앞의 ‘학도의용군 6·25 전적비’를 출발해 포항시 충혼탑〜전몰학도 충혼탑〜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전몰학도 기계 안강지구 전투전적비〜기계 안강지구 전투격전지 조망대로 이어지는 ‘호국 문화의 길’은 학도병의 전투를 기리는 것이 대부분이다.전승기념관 앞 돌 비석에 새겨넣은 학도의용병 사진은 교과서에서도 봤던 널리 알려진 사진. 그런데 그 앞에 한 어머니가 두 손을 뻗어 마치 죽은 아들을 부르듯 안타깝게 무릎을 꿇고 있는 조각이 설치됐다. 병사나 학도병, 소년병 할 것 없이 생떼같이 귀한 자녀를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른 전쟁터에 보내는 안타까운 모정(母情)을 보여준다.● 개전 4일 만에 나선 학도병 ‘학도병은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재일동포 학도의용군 포함)’으로 육·해·공군 또는 유엔군에 배속돼 1951년 2월 28일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를 말한다. 전상(戰傷)으로 중간에 나온 자도 포함한다.’학도병은 6월 29일 수원에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구국 비상학도대’가 시작이다. 6월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상황에서도 결사적으로 한강을 도하해 수원에 모인 학생 2백여명이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했다. 그 후 다양한 학도병 조직이 나타났는데 정훈군은 신분증도 발급했다. 다른 학도병 단체의 모체가 된 수원 비상학도대는 한강 방어선의 노량진 전투에 투입돼 상당수가 희생됐다. ‘의용군’이라는 용어는 북한 인민군이 남침 후 양민을 동원하면서 사용해 용어의 혼란을 피해 ‘학도의용병’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학도병은 학생으로 군번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만 해당된다. 군번이 있으면 정규군으로 신분이 바뀐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학생 중 군번을 받지 않았으면 복귀령 이후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군번을 받은 경우 현역으로 복무해야 했다. ● 다양한 전투에 투입된 학도병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다부동 기계·안강, 영천, 포항 등에 총 30여만명이 참가했다. 그중 5만여 명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고 그 외 인원은 후방 선무, 공작 활동 등을 맡았다. 7천여명이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우다 전사했다. (‘1129일간의 전쟁 6·25’, 597쪽)6·25 전쟁은 개전 초부터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 병력 보충이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낙동강 방어선뿐 아니라 다양한 전투에서 소년병과 함께 긴급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된 국군 해병 1연대에도 제주도에서 급히 모집해 배에서 소총 작동법만 배우고 투입된 학도의용병이 포함됐다.전남 여수 순천 광양 등 호남 동부지역 학생 180여명은 7월 초 혈서를 쓰고 학도병에 자원입대한 뒤 7월 25일 섬진강 화개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1천여명과 전투를 벌이다 7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이는 6·25 전쟁에서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라고 한다.(순천 ‘호남호국기념관’)정부는 병력 충원이 원활히 이뤄지면서 1951년 3월 학도병은 학교로 돌아가도록 했다. 정부의 학교 복귀 지시나 대통령의 담화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곳에서는 학도병 활동이 중단되지 않고 휴전 때까지 계속된 곳도 있었다.(‘학도의용군 연구’, 73쪽)● 관심 연구 지원 부족한 학도병학도병의 활약과 희생을 주제로 한 영화가 ‘학도의용군’(1977), ‘포화속으로’(2010), ‘장사리, 잊힌 영웅들’(2019) 등 여러 편 나왔다. 학도병은 국군이나 미군에 배속되어 활동하거나, 적지에서 유격대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연구 평가 지원 등이 다른 참전 용사들에 비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대부분의 참전자들이 사망하거나 이제는 고령으로 직접적인 증언을 듣기도 어려워지고 있다.(‘학도병 연구’, 2쪽)● 재일학도의용군6·25 개전 직후부터 일본의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청년 및 학도 지원병을 전선에 파견하기로 했다. 재일 한인 청년들은 미군 극동사령부의 심사를 거쳐 동경 아사카 캠프에서 유엔군과 함께 2주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던 거류민단 소속 부녀회가 제작해 준 의용군 휘장을 미군 군복 상의나 군모에 달고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제1진 69명은 1950년 9월 11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유엔군과 함께 배를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인천상륙작전에 3차례, 원산과 부산에 각각 한 차례씩 5차례에 걸쳐 653명이 참전했다.(‘1129일간의 전쟁’, 608쪽) ● 소년병 전쟁에서 전사 부상으로 병력 소모가 늘어나면서 병력 보충이 시급해지자 학도병은 물론 소년병도 자원이나 모집을 통해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국에서 모인 소년병 부대는 1950년 8월 초 기계 안강전투에서 국군 25연대에 배속돼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전투는 소년병이 도착해도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전선에 배치돼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고 한다.(‘1129일간의 전쟁’, 609〜617쪽) ‘소년병’은 징집 연령인 18세 미만으로 주로 12~17세 청소년들인데 이들에게는 군번이 부여됐다. 군번이 부여되지 않은 학도병은 정부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돌아갔다. 그런데 더 어린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돼 정식 군인 신분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군 생활을 계속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 뒤에도 전역하지 못해 5~7년간 더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소년병은 2만7천여명이 참전해 2570여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길거리에서 징병관에 의해 모집되기도 한 소년병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6시간가량 훈련을 받은 후 바로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징병되어 가면서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경우도 있다. 소년병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낙동강 전투시 주변 학교 여학생들이 행정병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붙잡혀 가면서 전투에서 형제가 국군과 북한군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이는 그야말로 동족상잔이 벌어졌다.카투사(KATUSA)국군은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미 지상군의 병력보충을 위해 카투사(KATUSA·Korea Augmentation to the US Army) 제도를 시행했다. 당시 일본 주둔 미군은 감소 편성되어 있는데다 전선에 투입된 이후 많은 전투력 손실이 발생했다. 육군본부는 8월 16~24일 8600여 명 카투사를 1차로 선발해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 보냈다. 8월 20일부터는 한국에서 전투 중인 각 사단에도 각각 250명을 보냈다. 카투사는 경계, 정찰, 진지구축, 방어진지 위장 등의 보조임무를 수행했다.(김철수, 130쪽)●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에 투입 1950년 8월 16일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부산항에서 요코하마로 떠났다. 8월 24일까지 8623명의 카투사가 당시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이던 미 육군 제 7사단에 급하게 보충되었다. 그들은 겨우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초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대구와 부산 등에서 불심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이 실시되었다. 피난민 숙소를 급습해 자고 있던 장정들을 골라내는 이른바 ‘토끼몰이’ 방식도 있었다. 미리 준비한 M1 개런드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섰을 때 소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키만 되면 징집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일본으로 처음 출발한 카투사 313명 중에는 부인을 위해 약을 구하러 나섰다 끌려온 유부남부터 책가방을 든 15세 중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배 위에서 입영명령서를 스스로 작성했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후지산 기슭 미 7사단 훈련소로 갔다.(문관현, 182쪽) 한국전쟁 기간 전체 카투사 4만3660명 중 6415명이 전사해 전사율 14.7%로 미군의 전사율 2.2%보다 7배 가까이 높았다. 북한군은 카투사를 붙잡으면 ‘미제의 앞잡이’라며 더 가혹한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2012년 62년 만에 북한에서 돌아온 용사들의 유해 12구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배속돼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약 800명의 카투사 중 일부였다.(애플먼, 역자 서문)‘장진호 동쪽’에 투입된 미 7사단 31연대에 ‘뻐꾸기 대대’로 편입된 32연대 1대대는 캠프 맥네르에서 500명의 카투사를 받았다. 대대가 장진호에 도착했을 때는 약 3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카투사는 3개 소총 중대에 각각 45명에서 50명이 할당되었다. 이들은 중대병력 숫자의 약 4분의 1을 구성했다. 그런데 미군 분대장들이 한국군 분대원과 만족스럽게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 동쪽 전투 시 이같은 소통부족은 큰 장애가 되었다.(애플먼, 84쪽)● 정전 협정 이후에도 지속 카투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낙동강 방어선이 북한군에게 거의 돌파되려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던 시기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은 한국에서 전투 중인 미군 3개 사단에 초급 보병장교와 하사관, 경험있는 소총수들을 채워주는 보충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일찍이 한국군 정규 병력을 미군 부대에 배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국군을 주일미군 기지에서 훈련시킨뒤 미군과 한국군 1명씩 짝을 지어 작전을 수행하는 이른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까지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군부대 한국군 배속 방안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다 ‘카투사 제도’로 공식화되었다. 카투사 제도는 정전협정 이후에도 부족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 ● ‘임진스카웃’ 활동1960년대와 70년대 북한의 도발이 최고조로 올랐을 당시 카투사들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2사단의 특수부대인 ‘임진스카웃’ 정찰대에 편성되어 북한군과 근접 전투를 수행했다. 카투사와 한국군 장교로만 이루어진 ‘임진스카웃’은 미군 2사단에 배속된 대간첩중대(CAC)였다. 임진스카웃은 1965년 9월 경기 파주에서 처음 결성됐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 침투 등 충돌이 많을 때는 미 2사단의 첨병으로 활동한 ‘전투 보병의 꽃’이었다고 한다. 임진스카웃과 북한군 특수8군단은 창과 방패처럼 맞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임진스카웃은 1991년 10월 한국군 1사단에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경계 임무를 넘겨주고 26년만에 사라진 뒤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다 2002년 6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가 임진스카웃 배지 착용과 인증서 수여 등 일부 임진스카웃 제도를 부활시켰다.(문관현, 11쪽)<참고 문헌>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문관현 지음, 『임진스카웃』, 정음서원, 2022.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6·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포항전투사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학도의용군 포항지회.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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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천이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없다” 철수만 3차례 고민한 미군[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경북 영천의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2층 전시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섬 위치를 커다란 세계 지도 위에 표기해 놓은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부산까지 함락되면 한국군과 정부 인사 및 민간인 62만 명가량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신한국 창설 계획’을 미 합참이 영천 전투(9월 5〜13일) 전에 세웠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사모아 프로젝트’는 아군이 영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비밀 계획으로만 그치고 실행되지 않았다. 영천 전투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도 취소되지 않고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었다. 6·25 전쟁 개전 이후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고 다시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밀고 내려온 뒤 ‘고지전’ 국면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미군은 최소 3차례 한반도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 “영천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포기한다” 1950년 9월 8일.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결전’이라고도 불리는 영천 전투가 한창인 때였다.  대구 육군본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사무실로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찾아왔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는 맥아더 장군의 극비 지시 사항이라며 영천을 적에게 넘겨주는 경우를 상정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철수 장소는 ‘아메리칸 군도’라고만 했다. 정 총장이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 작전명)도 세워져 있는데 영천이 떨어지면 이 작전도 취소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워커는 “불가피한 일이죠”라고 대답했다. 당시 낙동강 전투 상황에 따라 인천상륙작전도 취소하고 미군은 철수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이다.(정일권, 85〜86쪽)정 총장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이튿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가려면 가라고 하시오. 영천이 무너져 적군이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싸울 것이요”라고 반발했다.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영천 전투에서 두 번 뺏기고 두 번 빼앗는 전투 끝에 아군은 영천을 지켜냈다. 물론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워커는 “우리끼리 했던 얘기로 없던 걸로 합시다”고 말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신한국 계획은 미국이 6·25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1129일간의 전쟁’, 116쪽)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대구가 함락될 경우에 대비해 미군이 설정해 놓고 있던 ‘밀양 방어선’도 한반도 엑시트 전략의 중간 단계 격이었다. 밀양은 대구와 부산의 중간 길목.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대구를 점령하면 철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밀양 방어선은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미군이 마지막으로 북한군을 잠시 묶어두기 위해 설정한 ‘철수용 방어선’이었다. 상부 지시로 방어선을 설계한 미 8군 공병참모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슨 라인’이라고 불렸다. 이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는 제주도로, 한반도에 전개했던 미군은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이었다.(백선엽 2권, 234쪽)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를 보면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후 전선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면서 미군 철수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미국은 그들의 군사전략이나 국익의 득실, 또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의 정략이라는 저울대 위에 남한 땅을 올려놓고 있다. 남한 땅을 포기하는 것이 자국의 복합적인 이익에 부합된다는 쪽으로 저울 바늘이 기울 때, 그들은 냉큼 부산까지 내려가 훌쩍 떠날 수도 있다.”(8월 1일 자)8월 9일 이승만은 전시내각을 소집했는데 최악의 경우 정부는 제주도로 옮겨야겠지만 자신은 대구를 사수하겠다고 했다. 8월 14일에도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간 뒤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이승만이 발끈했다. 무초 대사는 “남한 전체가 점령되면 망명정부를 (세워 대한민국을) 지속시켜 나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 위아래로 흔들며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요”라고 말했다.8월 16일 밀양에 있던 영국군 장교는 “낙동강 전역에 걸쳐 사단급 병력의 적이 밀려오고 있다. 오늘 밤에는 더 많은 적이 도하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밀양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는 전문을 보냈다.(페렌바크, 221쪽) ● “중공군 강압에 의한 철군” 두 번째 미군 철수 위기는 중공군이 참전해 유엔군이 북한에서 후퇴한 뒤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였다.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내려오기 4일 전인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군이 전략을 보강해 유엔군을 한국에서 축출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면 유엔군 철수 결정을 정부 차원에서 빨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합참은 이를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고 규정하고 트루먼의 재가를 받아 맥아더에 전달했다. 표현만 달리했지 ‘중공군 강압으로 철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 2사단이 평양 북쪽 군우리에서 한 개 연대 이상이 괴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이 밀물처럼 올라갔다가 썰물처럼 후퇴한 뒤였다. ‘성공적인 후퇴’라고는 하지만 동부전선의 제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봉쇄돼 흥남에서 해상탈출을 하고 있던 때였다. 흥남항구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항구를 떠난 것이 12월 24일이었다. 2차례 공세를 펼친 중공군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몰라 ‘중공군 포비아’가 커지던 때였다. ● 맥아더 ‘대중(對中) 강공’ 제안맥아더는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는 워싱턴의 패퇴 전략에 대해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으로 응수했다. 맥아더는 △중국 해안 봉쇄 △중국 내륙 공업시설을 해공군 폭격으로 파괴해 전쟁 수행 능력 해체 △대만 국민당 군대의 유엔군 지원 △대만군에게 중국 본토 견제공격 허용 등이다. 맥아더는 전략적 차원에서 유럽 안보에 우선을 두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시아에서 패배하면 결국 유럽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며 극동에 대한 우선적 지원을 강조했다.합참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 ‘인력과 물자의 심대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을 재확인했다. 합참은 중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조치로 인해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행위에 말려드는 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트루먼의 경고도 전달했다. 다만 유엔군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불가피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최악의 경우 한국의 망명정부를 제주도 등으로 옮기기로 했다.(김철수, 211쪽) 워싱턴의 수세적인 방침과 달리 맥아더는 중국 폭격 등 확전론을 폈다. 워싱턴이 소련까지 개입할 수 있다며 우려를 제기한 것에 대해서는 “소련이 세계 전쟁도 불사할지는 동서 양 진영의 전투력과 능력을 소련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다”라며 “감히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맥아더, 240쪽) 소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해도 군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련의 보급로는 시베리아 철도 하나뿐인데 공중에서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맥아더, “소련 참전하면 미 8군 일본으로 철수”12월 23일 교통사고로 워커 8군 사령관이 사망했다. 맥아더가 26일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를 도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리지웨이는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맥아더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몇 개월이 걸려서라도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련 참전 가능성은 낮게 보지만 소련이 참전하면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지웨이는 자신이 부임했을 때 ‘철수’가 현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도 해명해야 했다. 그는 “고령의 전사에게 내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첫 번째 과제였다”고 했다. 그래서 이승만을 만나 건넨 인사말이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였다고 소개했다.(리지웨이, 141쪽)>리지웨이는 부임 후 중공군 기세에 눌리지 않고 ‘위력 수색’을 벌이며 반격 작전을 폈다. 당시에 널리 퍼진 한반도에서의 철수까지 고려하는 패배적인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12월 초에 이미 철수 피난 준비” 프란체스카 여사의 12월 일기에도 철수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오후에 챔프니 대령이 극비명령서를 받았다며 대통령 뵙기를 원했다. 미 8군사령부로부터 교사, 기술자, 의사 등 저명한 민간인과 가족의 명단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8군은 이미 8천5백 명의 가족을 선박으로 제주도에 피난시킬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12월 13일)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군과 국무부가 한국 철수에 대해 약간 견해를 달리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전황이 나빠지면 일본으로 미군을 빼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군 수뇌들은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한국으로부터 명예롭게 철수하는 길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국무부는 ‘강제로 물러나지 않는 한’ 한국으로부터 후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트루먼, 408쪽). 군이나 국무부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금강 넘으면 100만 명 철수”많은 6·25 전쟁 연구자들이 전쟁 중 한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즉 미군이 철수해 전쟁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때로 보는 것은 1·4 후퇴 이후다. 더 정확히는 1월 중순 중공군이 북위 37도선,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왔을 즈음이다. 미 정부의 1월 12일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100만 명 제주도 철수 이동 계획’이 포함됐다.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군 철수 검토를 항의하자, 러스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미국은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알고 싶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의 정부 관리 이외에도 군과 경찰을 제주도로 이전한다”고 되어 있다. 대략적인 인원은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만 6천명, 한국 육군 26만 명, 경찰 6만 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만 명 등 100만 명 가량이다.(김철수, 212쪽)제주도가 용이하지 않으면 한국군을 일본으로 후송시키는 것은 한일 간 민족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일본 본토가 아닌 오키나와 기지에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 무초 대사도 제주도 지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다.(이상호, 321쪽)이 계획은 한국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극비로 하되 유엔군 방어선이 금강선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구체화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전선에서 금강까지는 50km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전면 중단을 선언한 뒤 속도 조절을 했다.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전선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아 철수 계획도 이행되지 않았다. ● 트루먼과 맥아더의 ‘철수’ 공방   전쟁 중 주요 현안을 두고 이견을 보이거나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기도 했던 트루먼과 맥아더는 미군 철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루먼은 “부산교두보로 물러설 때까지 점차 전선을 축소하고 그다음에는 철수하는 것뿐이다는 것이 맥아더의 견해”라고 했다.(트루먼, 409쪽)트루먼은 맥아더가 ‘유엔군이 오랜 싸움으로 지치고, 부당한 비판에 분격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다면서 반대이유가 없으면 전술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속도로 한반도에서 철수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트루먼, 409쪽). 하지만 맥아더가 1월 10일 최대한 신속히 한반도로부터 철수하자고 제안한 것은 자신의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따른 것이었다. 대규모 중공군 개입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철수하고 자신의 원래 기본적 임무인 일본 방위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이상호, 322쪽)미 합참이 “중공군에 금강까지 밀리면 일본으로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철수 실행 여부는 자신에 맡긴 것을 두고 맥아더는 강하게 반발했다. 맥아더는 합참의 메시지는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사는 없는 패배주의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의 구상은 반격이 아니라 무난하게 도망하는 것, 대만의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전세를 만회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회피를 택하려는 것이라고 했다.(맥아더, 245쪽)● 극약을 지니고 있던 대통령 부부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중공군 참전 이후 밀리는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총과 극약’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과 나는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대통령의 권총과 함께, 보다 확실한 천국행 티킷을 각자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원할 때 죽을 수 있는 무엇(극약)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무자비한 대량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는 어떤 위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프란체스카 일기, 1951년 1월 1일) 참고 문헌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 지음, 최필영 윤상용 옮김, 『이런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9.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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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중공군이 보름달 뜨는 날까지 계산해 1950년의 마지막 날 3차 대공세(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에 나선 이후 4일만인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1월 중순에는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37도 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미군은 금강 방어선까지 밀리면 다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거나 한반도에서 철수할 구상까지 했다. 하지만 38선을 넘어온 후 중공군은 약점이 부각되는 반면 유엔군은 장점이 커졌다. 중공군이 북한 산악지대에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유인 매복하던 수법은 한계가 있었다. 아군은 이제 포위돼도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고립 방어’로 버티며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다. 아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 38선 이북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위축된 자신감을 되찾고 공세로 돌아섰다. 불의의 사고로 워커 장군이 사망한 뒤 후임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이 주효했다.국군과 유엔군의 북진과 초고속 후퇴 1950년9월 28일유엔군 서울 수복10월 1일국군 38선 돌파 10월 19일유엔군 평양 탈환(같은 날 중공군은 압록강 도강 시작)10월 26일국군 초산 압록강 도달↓(전세 역전)12월 5일중공군 평양 점령12월 26일중공군 38선 돌파1951년1월 4일중공군 서울 점령 1월 10일유엔군 37도선(평택~삼척) 후퇴유엔군중공군 38선 → 평양 : 19일 38선 → 압록강 : 26일압록강 → 38선 : 67일 38선 → 서울 : 9일 ● ‘서울 후퇴’ 공성전(空城戰)과 원주 전투1951년 ‘1·4 후퇴’는 다시 수도를 뺏기는 것이었지만 워커 사망 후 부임한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공성전략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12월 26일 38선을 돌파한 뒤 주공(主攻) 방향을 서울로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압박해왔다. 리지웨이는 서울이 포격권에 들어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면서 보다 방어가 유리한 곳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오산〜삼척선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다. 처음 한강 다리를 먼저 끊어 많은 납북자 피해를 낳았던 것과 달리 서울 시민에게는 1950년 12월 하순 피난령이 내려졌다. 후에 북한도 유엔군의 반격으로 밀려 올라갈 때 서울 사수나 방어 의지를 보이지 않고 3월 5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서울은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점도 되지만 부담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중공군이 서울을 거쳐 남진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원주가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한때 점령당했다. 미 10군단 2사단이 원주를 탈환하고 지킨 ‘원주 전투(1월 5~13일)’ 승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공산군이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남도현, 283쪽). 군우리 전투에서 한 개 연대 규모가 섬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미 2사단으로서는 38선 남쪽에서 설욕하는 전투의 서막이었다. 2월 지평리와 5월 벙커 고지, 9월 단장의 능선전투 등에서 미 2사단은 연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원주전투 이후 피아간 접전은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 지평리 전투, 전략 전술 리더십의 승리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잠정 중단’ 명령을 내리고 원주 전투에서 제동이 걸린 이후 주춤했던 중공군이 2월 중순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으로 공격해 왔다.2개 군단이 만나는 이른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인 이곳에는 미 2사단의 23연대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력에서 10배가 넘는 중과부적의 상황. 23연대는 둘레 약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부대 간 빈틈을 없애 방어에 나섰다가 중공군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자 방어망 둘레를 6km로 축소했다. 이곳은 사단 본진과 30km가량 떨어져 즉각적인 지원도 어려웠다. 전투 70여년이 지난 뒤 찾아간 지평리는 주변이 얕은 산으로 둘러싸여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전쟁 당시에는 원형으로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촘촘히 방어망을 구축한 채 밤만 되면 물밀듯이 파고드는 중공군과 때로는 백병전까지 벌였던 곳이다. 방어진지 중심부쯤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중공군이 불었던 나팔 실물과 프랑스 대대가 사용한 수동 사이렌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야간에 벌인 소음 전쟁이 생각나게 했다.1951년 2월 13일 어둠이 짙게 깔리자 사방에서 횃불을 들고 징과 꽹과리를 치는 중공군이 밀려들었다. 원형진지 안으로 포탄도 쏟아부어 연대 참모가 전사하고 연대장 폴 프리먼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진지를 지켰다. 이튿날 날이 밝자 미 공군의 공중 폭격으로 공세는 주춤했으나 다시 밤이 되자 사전 정찰에서 철조망이 없었던 남쪽으로 중공군이 돌파를 시도해 산발적으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원형 방어 진지 밖에 대한 미 공군의 맹폭 지원 속에 미 제5 기병 연대가 포위망을 뚫었다. 일본에서 발진한 C-119S 수송기 24대는 14일 3시간가량 보급품을 공중 투하했다. 2박 3일간의 전투에서 중공군은 5400여명이 전사한 반면 23연대는 전사 52명, 실종 42명이었다. ● ‘인해전술’ 극복한 반격의 전환점 지평리 전투에는 프랑스가 파병한 1개 대대가 참가했다. 대대장은 1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전역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이는 레지스탕스 활동 당시 가명이고, 본명은 마그랭 베르느네)이다. 대대급 병력 파견으로 대대장을 맡기 위해 스스로 중령으로 계급을 낮췄다. 프랑스 대대는 중공군의 심리전 무기였던 나팔 소리에 대응해 휴대용 수동식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중공군 나팔 소리를 삼켜버렸다. 병력 운용의 신호로도 사용했던 나팔 소리가 사이렌 소리 때문에 안 들리자 중공군이 우왕좌왕했다. 이때 프랑스 대대 병사들이 화력을 집중해 공격하고 진지를 박차고 나가 육박전을 벌여 성과를 거뒀다. 프랑스 대대에는 카투사 한국인 병사 101명도 포함됐다. (‘1129일간의 전쟁’, 312쪽)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지평리 전투에 대해 “제공권이 없어 고전했다. 미군 전투기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맹폭을 가하니 밤에만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지원 병력도 물밀듯이 몰려왔다. 미군은 이 전투 후 전술상 하나의 지점을 고수하면서 인근 부대의 지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훙쉐즈, 236쪽)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다시 반격의 터닝포인트를 이루게 하는 분기점이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주눅 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전투였다. 중공군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매복과 기습, 포위 전술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전투였다. 비록 적에게 포위돼도 방어 전면을 좁혀 방어하면서 진지 밖 적에 대해 화력을 퍼부은 것이다. ● 사창리 전투, 국군의 공중증(恐中症)과 가평의 영연방 여단 지평리 전투의 타격으로 움츠렸던 중공군이 2개월여간 재정비 끝에 무려 70여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5차 대공세를 벌였다.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에 포위된 상황은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와 비슷했으나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분산되어 있는 예하 연대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틈을 파고든 중공군에게 분리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꽹과리 피리 나팔 소리에 ‘초산의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고립 방어’를 통해 화력 지원을 받기보다 포위당하는 두려움에 무질서한 후퇴와 도주에 나섰다. 화력 지원에 나섰던 미 포병대대도 포위 타격을 당했다. 사창리 전투(4월 22〜24일) 사흘간 6사단 1만3천여명 병력 중 가평으로 철수해서 남은 병력은 6300여명에 불과했다. 6·25 전쟁 기간 국군에 줄곧 나타났던 ‘공중증(恐中症·중공군을 두려워하는 심리)’이 그대로 드러났다.사창리에서 장비도 내팽개치고 도망친 국군 6사단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긴급히 투입된 부대가 영연방 제27여단이었다. 27여단은 영국 미들섹스연대 1대대, 호주 왕립연대 3대대, 캐나다 프린세스 페트리샤 경보병 2대대, 뉴질랜드 왕립 제16 포병연대 등 4개국 연합부대였다. 국군 6사단 패잔병들이 무질서하게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북으로 향하던 영연방 여단은 23일 가평에서 중공군 제20군과 만났다. 영연방 여단은 3일 동안의 가평 전투(4월 23〜25일)에서 부대원의 40% 이상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켰다. 이를 통해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수도권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 가평 전투는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 ‘버티기 승리’를 통해 중공군의 5차 대공세라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 데 기여했다.● ‘고립 방어’의 성공 사례 설마리 전투 경기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을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포위했다. 지평리나 가평 전투와 마찬가지로 ‘고립 방어’ 의지만 있으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다. 방어선을 최대한 줄이고 밤을 버틴 뒤 낮에는 막강한 화력 지원으로 방어선 외곽의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온창일 등, 210쪽)영국 제29여단은 병력에 비해 넓은 정면을 담당한 데다 각 대대 및 중대가 서로 떨어져 상호 지원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상황에서 1951년 4월 22일 밤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일제히 임진강을 건너와 공격했다. 글로스터 대대원 652명의 10배도 넘는 규모였다. 235 고지로 철수한 좌측 담당의 글로스터 대대는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포위 고립됐다. 이 전투에서 탈출한 영국군은 67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59명 전사, 장교 21명을 포함한 526명은 포로가 됐다. 사흘간 피로 버틴 설마리 전투는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결정적으로 지연시켰다. ● 국군과 미군의 관할권 다툼으로 생긴 구멍, 오마치(오미재) 고개1951년 5월 태백산맥 서쪽 산악지대는 6·25 전쟁이 터진 후 새로 창설된 9사단과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 제3군단이 맡았다.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주로 담당한 서부전선에 비해 열세였다. 조중(朝中) 연합군사령관 펑더화이는 막강한 화력의 미군이 주력인 서부보다 이곳이 약한 곳으로 보고 돌파하기로 했다. 당시 중동부 전선의 국군은 6개 사단인 반면 중공군은 18개 사단을 투입했다. 현리 전투의 참패는 이런 수적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단은 국군과 미군 간 관할권 공백과 다툼이었다. 자연 지형에 대한 고려 없이 관할지역을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제군 31번 국도의 오마치고개는 미 10군단 관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마치 고개의 위아래 보급로는 국군 3군단에 속했다. 상체와 하체는 국군이 맡고 허리는 미군에 속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주요 지형지물은 분할하지 않는다’는 전술 교리에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차단되면 끝이다’고 생각될 만큼 요충지였다. 3군단은 미군 관할 지역에 29연대를 배치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미10군단이 왜 남의 관할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느냐며 철수하라고 했다. 결국 29연대를 빼면서 1개 대대만 남겨놓았는데 이번에는 더 상위인 미 8군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4월 11일 오마치에서 대대 병력마저 철수시켰다. 문제는 국군이 병력을 모두 빼낸 뒤 미군이 즉각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인제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를 비워둔 것이다.● 방어, 초기 대응, 후퇴 총체적 실패 중공군 선발대 1개 중대가 17일 오전 7시30분경 오마치 고개를 장악했다. 그들은 3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 야간 12시간 동안 산악지대를 시간당 평균 2.5km씩 행군했다. 선발대 도착에 이어 곧 제60사단 전체가 밀물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돼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3사단의 김종오 사단장이 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철수를 명령한 것이 대 실책이었다. 미군이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당하는 것이 곧 전멸은 아니었다. 지평리 전투나 바로 옆 벙커고지 전투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3사단은 철수를 위해 현리에 집결한 뒤 적이 장악하고 있는 오마치 고개 돌파를 시도했다. 고개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 규모를 오판했을 수도 있다. 고개를 장악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부대원들은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무질서하게 주위 방대산 등을 타고 도주했다. 일부 간부는 계급장도 떼고 철수했다고 한다. 퇴로가 차단됐다는 이유만으로 전투를 포기하고 사단장부터 말단 사병까지 줄행랑을 쳤다. 70km가량 남으로 내려왔을 때 3사단은 34%, 9사단은 40%가량만이 수습됐다.(남도현 324쪽)유재흥 당시 3군단장은 “솔직히 하룻밤 사이에 아군 전선을 뚫고 산악지대를 30km나 주파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관할권이 겹쳐 오마치에서 부대를 철수하더라도 고개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소규모라도 부대를 배치하지 않은 것이 천려일실이었다고 했다. 부대가 후퇴하면서 전혀 보조를 맞추지 못해 미 10군단과의 사이에 30km에 달하는 틈이 발생했다. 적은 무인지경인 상태에서 침투할 수 있었다. 현리전투 인근 희생된 많은 장병을 화장한 곳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유재흥, 270쪽)현리전투(5월 16〜22일)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되고 유재흥 군단장은 보직을 잃었다. 그는 개전 초기 가장 먼저 붕괴된 전방의 7사단장으로 7사단이 해체됐다. 이어 1·4 후퇴 후 그가 군단장이던 2군단도 대전에서 해체된 바 있다.● 벙커고지와 용문산의 설욕군우리 전투 참패 후 지평리 전투에서 되갚았던 미 2사단은 중공군의 6차 대공세(5월 16일~20일)에서도 선전했다. 벙커고지 전투(5월 17∼19일)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홍천 진격을 막았다. 지평리 전투의 주역이 23연대였다면 벙커고지 전투는 38연대였다. 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던 때 38연대도 홍천 북방 778고지 일대에서 포위됐다. 38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전 병력이 참호를 깊이 파고 벙커에 엄폐한 뒤 피아가 섞인 진지 내에 포화를 퍼붓도록 하는 위험한 작전을 벌이면서까지 진지를 지켰다.용문산 전투(5월 18~20일)도 현리, 벙커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였다. 국군이 사창리와 현리 전투에서 잇따라 패퇴해 국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한 쾌거였다. 당시 사단장은 사창리 패전 때와 같은 28세 약관의 장도영 소장으로 그의 설욕전이기도 했다. 6사단 2연대 장병들은 철모에 ‘결사(決死)’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다. 용문산 일대에서 쫓긴 중공군은 화천호까지 밀려가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다 저수지에 뛰어들거나 아군의 포화에 목숨을 잃었다. 사살된 적군이 1만7100여명, 살아서 돌아간 병사는 1000여명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에 오랑캐를 섬멸한 곳이란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는 전적비를 세웠다.중공군의 ‘지하 만리장성’ 땅굴중공군의 땅굴은 미군의 전투기 공습을 견디며 지구전을 벌이기 위해서 등장했다. 중공군은 1951년 가을 산기슭에 소규모로 팠던 땅굴을 서로 이어 붙이면서 말발굽 모양의 땅굴로 발전했다. 그해 10월 중공군사령부 차원에서 전군에 땅굴 공사를 지시했다. 땅굴은 단순히 상대의 화력으로부터 지키는 방어 목적뿐 아니라 기습공격에도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사령부는 땅굴 공사의 규격 기준을 만들어 전군에 내려보냈다. 7가지 방어는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즉 공습(防空) 포격(防砲) 독가스(防毒) 비(防雨) 습기(防濕) 불(防火) 추위(防寒)다. 땅굴 파기 지침이 내려간 뒤 전선에는 땅굴 파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중공군 제12군은 8개월간 40여곳에 대장간을 만들어 1만6천여 점 땅굴 도구를 만들었다. 땅굴 파기 확대로 수요가 늘면서 후방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에 ‘기재처’를 만들어 땅굴 파기 기자재의 구입 생산 분배를 맡겼다. 평양 삼등 양덕에도 땅굴 기재 공급기지를 세웠다. 1952년 5월 말까지 제1선 방어진지 땅굴 공사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 8월 말에는 동, 서해안에서도 집중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6개 군단이 땅굴 약 2백km, 참호와 교통호 약 6백50km, 각종 화기엄폐물 1만여 개를 건설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km 길이의 모든 전선에 구축된 폭 20~30km의 방어선에 땅굴을 핵심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을 형성했다.(훙쉐즈, 390쪽). 중국이 한국 전쟁 참전 후 가장 큰 승리로 꼽는 상감령 전투도 바로 이 ‘지하 만리장성’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다고 한다. ‘지하 창고형 땅굴’은 물자 보존 창구 역할도 했다. 1952년 5~6월 중공군 후근사령부는 차량 1200대 분량의 물자를 저장할 창고를 구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1952년 8월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면서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지하 2층으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라고 자랑했다고 한다.단점도 적지 않았다. 땅굴 생활을 하려다 보니 콩기름이든 등유든 기름이 많이 소모됐다. 병사들은 산소가 부족해 기관지염에 걸리고 식수가 부족해 혀가 갈라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참고문헌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 미디어, 2010.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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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下)[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스미스 사단장의 ‘느림보 북진’장진호 전투는 미군과 국군의 ‘북진 과속’이 유인 매복 포위 전술을 구사하는 대규모 중공군과 부딪혀 전열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서부전선에서 미 2군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것과는 크게 달랐다. 미 제1 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상부 명령을 거역하지 않으면서도 현장 지휘관으로서 발휘한 신중함과 치밀함이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도 패배가 아닌 전투’ ‘후방으로 진격하는 전투’로 만들 수 있었다. 스미스는 빨리 북진하라는 알몬드 10군단장의 명령에 자신의 재량권 안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산세도 험하고 지독하게 추운 장진호 동쪽에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숨어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몬드 군단장의 비현실적 요구사항에 진격속도를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다.(러스, 105쪽)동부전선의 3개 부대 중 스미스 사단의 북진 속도가 가장 느렸다. 11월 10일부터 26일까지 하루 평균 1.5 km였다. 스미스가 중공군이 덫을 놓고 있다고 확신한 경험적 증거 중 하나는 미군에 밀려 북으로 쫓겨가던 중공군이 황초령에서 다리를 폭파하지 않은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오라고 손짓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꼈다.동부전선 부대의 북진 정점에서 흥남까지 거리 부대북진 장소흥남 후퇴국군 1군단청진480km미 7사단혜산진320km미 제1해병사단장진호240km● 전진하며 후방 대비한 신중함 스미스는 진격 속도 조절과 함께 장진호 동쪽으로 보냈던 5연대를 다시 불러들여 부대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막았다. 스미스가 해병대가 아니라 육군이었다면 알몬드는 틀림없이 그를 해임했을 것이라고 했다.(핼버스탬, 653쪽) 스미스는 사단 병력을 한 방향으로 모아 전진하면서 부대간 간격을 유지해 적의 중간 침투를 막았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후방 주요 지점에는 작전과 보급을 위한 캠프를 설치했다. 특히 스미스는 해발 2천m의 고산지대 하갈우리에 쌍발수송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임시 활주로를 건설했다.12월 1일 공사가 절반도 안 끝난 야전활주로에 C-47 수송기 1대가 시험 착륙에 성공해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항공 수송이 시작됐다. 관제탑은 무전기를 탑재한 지프가 대신했고 활주로가 짧아 엔진을 역회전시키면서 착륙했다. 12월 10일까지 하갈우리와 고토리의 임시 활주로에서 총 240회에 걸쳐 4689명의 부상자를 후송했다. 함흥 흥남 원산 등에 있던 해병대 행정부대원과 부상에서 회복한 병력 500여명도 기꺼이 지옥의 한복판으로 돌아와 사기를 높였다. 스미스의 신중함으로 미군은 중공군에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나무위키)●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스미스 사단장은 하갈우리에서 많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는데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의 이동이 ‘후퇴하는 것이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한 영국 기자는 ‘후퇴 작전’이냐고 물었다.“후방이 없으면 후퇴가 아니다. 포위당해 있을 때는 후퇴도 철수도 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은 돌파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그의 이 말은 24시간도 안돼 미국 전역에서 발행되는 신문에서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 중이라구!”이라는 말로 보도됐다.(러스, 502쪽). 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은 스미스 사단장의 이 말을 인용한 훈시에서 ‘후퇴가 아니다’는 의미를 더욱 분명히 했다. “우리가 향할 바다쪽 뒷길에 더 많은 중공군이 우리의 진로를 막고 있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이란 말은 미 해군의 장진호 후퇴 작전을 상징하는 한 마디가 됐다.(히긴스, 249쪽)● 장진호 전투의 ‘나비 효과’ 미 제1 해병사단과 7사단 31연대는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면서도 2주 가량 북한 10개 사단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묶어뒀다. 이로써 더 멀리 북으로 올라갔던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잔여 부대가 후방으로 내려오는 시간을 벌어줬다. ‘전반적인 전략적인 패배속에서 이루어 낸 일련의 전술적 승리’라는 말이 장진호 전투의 성격을 잘 표현했다.(러스, 611쪽)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모르고 대비하지 못한데다 동서부 전선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도 않고 ‘무사안일’ 북진을 하다 퇴각하는 ‘전략적 패배’가 있었다. 그 와중에도 미 해병 1사단은 2주 가량에 걸쳐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포위한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혀 ‘전술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중공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병력 보충 등을 한 뒤 이듬해 3월에나 전선에 복귀했다. 3개월 이상 공백기가 생긴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밀려 38선이 돌파되고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동부전선의 9병단 12개 사단은 12월 말부터 전개된 3차 대공세에 참여하지 못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서부전선처럼 밀렸다면 이듬해 1월 중하순 중공군이 37도선에서 남진(南進)을 멈추지 않았을 수 있었다.(김철수, 200쪽)장진호 전투 후 미 10군단은 해체됐다. 제1 해병사단은 8군 관할로 돌아간 뒤 1951년 2월 전선에 복귀했다. 그 만큼 양측 모두 혹한속 전투로 홍역을 치렀다. 중국은 장진호에서 미군을 밀어내리고 함흥 흥남 원산 등을 되찾았다는 이유로 장진호 전투를 6·25 전쟁에서 거둔 대표적인 승리로 꼽는다. 지원군사령부와 마오는 9병단에게 무공을 치하하는 축전을 보냈다.(훙쉐즈, 175쪽) 반면 미국은 후퇴하면서 중공군에게 몇 배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만 입은 채 중공군 대부대를 3개월 가량 묶어둬 성공적인 ‘지연 작전’을 폈다고 평가한다. 서로가 ‘성공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 ‘혹한 속에 빛난 전우애’장진호 전투는 전우애를 빛낸 많은 일화들을 남겼다. 현지 취재를 온 기자들이 많았고 후에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들을 통해 이런 사연들이 전해졌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유담리에서 ‘죽음의 덕동고개’를 넘어올 때 9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600여명의 환자를 들것에 실어 철수했다. 전우의 시체를 실을 차량이 부족하면 자주포 포신에 매달고 오기도 했다.(한 병사의 증언)11월 30일 알몬드 군단장은 하갈우리에서 미 해병 1사단장과 7사단장에게 “하갈우리에 병력이 집결한 뒤 사단 내 모든 편제화기와 장비는 파괴하고 수송기를 이용해 함흥으로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미스 사단장은 이를 거부하였다. 수송기로 후퇴하면 수송기가 이륙한 후 활주로를 지켜야 하는 최후의 병력은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월 4일 미 해군 최초의 흑인 비행사 제스 브라운이 피격당해 하갈우리 인근에서 불시착했다. 브라운의 동료 비행사 톰 허드너는 그를 구하기 위해 중공군의 기총 사격을 받으면서 비상 착륙해 브라운을 구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부서진 기체에 몸이 끼어 꺼내지 못했고 남겨진 브라운은 동사했다. 이들의 동료애를 다룬 영화 ‘디보션’이 2022년 개봉됐다. 미국 최초로 흑인 이름을 딴 녹스급 호위구축함 D-1089함 ‘제스 브라운’ 호가 명명됐다. ● ‘장진호 동쪽’의 비극과 희생 제1 해병사단은 당초 장진호를 좌우에서 끼고 돌아 북진할 계획이었다. 사단 주력은 서쪽, 동쪽은 5연대가 배치됐다. 그런데 스미스 사단장이 사단 병력의 분산을 막기 위해 해병 사단은 모두 서쪽으로 가고 동쪽은 미 제7사단 31연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해병대는 사단이 뭉쳐 전진하고 일정 거리와 통신을 유지해 전진할 때나 후퇴할 때 피해를 줄였다. 하지만 급하게 동쪽을 맡게 된 31연대는 많은 착오와 작전 실패 등으로 피해 규모는 호수 서쪽의 사단 병력에 버금갈 정도로 컸다. 특히 31연대에 ‘뻐꾸기 대대’처럼 배속된 32연대 1대대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대대장인 페이스 중령이 사망하는 등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31연대가 철수할 때 ‘페이스 대대’에 통보도 없이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 잇단 실책이 부른 비극첫 실패는 제1 해병사단 5연대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운다며 서둘러 ‘페이스 임무부대’를 배치한 것이다. 연대 병력이 지키던 곳을 한 개 대대가 맡다보니 측후방 진지를 미처 다 점령하지 못해 구멍이 뚫렸다. 27일 밤 중공군이 호수 동서쪽에서 동시에 공격해 왔는데 U자형으로 침투해 공격했다. 한 개인호에서는 카투사 한 명이 머리가 없어진 채 앉아있었다. 27일 하루 밤에 전방 한 개 중대에서만 8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했다.이런 상황인데도 28일 알몬드 군단장이 페이스 임무부대 방어진지를 찾아 페이스 대대장에게 “중공군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낙오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애플먼, 140쪽). 중공군 80사단이 포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알몬드는 페이스 중령 등 3명에게 은성훈장을 주고 떠났다. 페이스 대대장은 그가 떠나자 훈장을 눈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31연대가 각 부대를 장진호 동쪽 길이 약 16km의 도로를 따라 7개의 각기 다른 장소에 분산 배치한 것도 큰 실책이었다. 적의 측후방 침투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29일 31연대장 매클린 대령이 ‘어이없이’ 실종된 것도 적이 후방으로 침투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매클린은 부대 남쪽 후방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예하 2대대로 잘못 알았다. 상호 사격을 하다 홀로 사격중지를 요청하기 위해 접근하다 중공군에 붙잡혔다. 31연대는 철수하면서 원형 방어가 아닌 도로를 따라 길게 병력과 장비가 이동해 적의 분리 타격에 쉽게 노출됐다. 미 10군단은 사용할 수 있는 항공 자원의 절반 가량을 투입했지만 지상에서 저지르는 실수 때문에 피해를 줄일 수 없었다. 알몬드는 29일 31연대를 하갈우리로 후퇴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최북단에 있던 페이스 임무 대대에는 철수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고립된 페이스 부대는 80시간 동안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학살’을 당했다. 땅이 얼어 묻지 못한 얼어서 뻣뻣해진 시체는 제방 아래에 4단으로 열을 맞춰 눕혔다.(애플먼, 253쪽) 12월 1일 장진호 얼음판 위로 페이스 부대원 200여명이 탈출했는데 페이스 중령은 심장 위에 부상을 입고 남겨졌다가 적의 확인 사살로 숨졌다. 장진호 전투 현장에 묻혔던 페이스 중령의 유해는 2004년 북한이 찾아 8년간의 감식 끝에 신원을 확인했다.● ‘장진호 동쪽’의 희생과 기여 장진호 동쪽 31연대는 장교만도 맥클린 연대장, 페이스 대대장 등 40여명이 희생됐다. 4,5일간 중공군 80사단의 공세를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80사단이 미 제1 해병사단의 본부가 있는 하갈우리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이들이 희생되면서 버티는 몇 일 동안 하갈우리를 방어하고 야전 활주로를 건설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하갈우리 방어가 핵심이었다. 사단 지휘부가 있는데다 이곳이 넘어가면 유담리의 주력부대 후방이 차단되고, 각 부대의 연계도 끊기는 요충지였다. 중공군 80사단이 장진호 동안에서 맥클린 특수임무부대를 공격하느라 하갈우리 포위 작전에 참가할 수 없어 하갈우리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역사가 애플먼은 “육군 병력(31연대)은 어쩔 수 없이 희생양 노릇을 해야만 했고 그 희생양이 도살된 꼴이 되었다”고 했다.(러스, 475쪽)● ‘초신 퓨(Chosin Few)’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 해병사단의 인명피해는 전사 600여명, 부상 및 실종 3천여명, 동상환자 3700여명이었다. 여기에 ‘장진호 동쪽’의 31연대가 3000여명 병력 중 1900명 가량이 부상으로 후송됐고, 385명이 살아남았다. 나머지는 사망 실종 포로 등이었다. 미군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인해전술에다가 밤에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며 심리전을 벌이는 중공군에 전멸이 우려될 정도였다. 중공군은 사망 2만5천명, 부상 및 실종 1만2500여명, 동상환자 1만여명 등이었다. 중국 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는 12월 8일 마오에게 보낸 전문에서 6만 명의 병력 보충을 요구했다. (‘1129일간의 전쟁’, 273쪽 , ‘나무위키’ 등). 미군은 중공군에 비해 인명 피해가 월등히 적지만 단일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는 막대했다. 그래서 ‘초신 퓨’라는 말까지 생겼다. 초신은 ‘장진(長津)’의 일본어 발음이다. 미군이 사용한 지도가 일본어판이어서 이렇게 불렀다. ‘퓨’는 생존자가 적었다는 뜻이다. ‘초신퓨’는 ‘장진호 전투 생존자 전우회’라는 참전용사 모임의 이름이기도 하다. 기념공원은 장진호와 비슷한 분위기의 알래스카에 조성됐다. 장진호 전투의 미군과 중공군 병력과 피해미군중공군부대제 1해병 사단9병단(3개 군단, 10개 사단)제 7사단 31연대영국 해병 41 코만도대대병력수약 3만명12만명(중국측 계산)인명 피해(사망)1300여명2만5천여명‘1129일간의 전쟁’ ‘나무위키’. 인명 피해는 양측 주장에 차이가 있음휴먼 드라마 흥남 철수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중공군 3개 군단 대병력을 2주 가량 저지하는 동안 북쪽까지 진격했던 국군 1군단(수도사단과 3사단)과 미 7사단은 비교적 안전하게 흥남 항구까지 철수했다. 미군은 항구 외곽에 3겹의 저항선을 구축해 해상 탈출 준비를 했다. 저항선 외부에서 접근하는 중공군은 해상에 포진한 항모 7척 등 함포와 공중포격으로 접근을 막았다. 중공군 9병단 5개 사단이 1차 반경 10km, 2,3차 방어선 외곽 2~3km의 3겹 저항선을 공격했으나 산악지대가 아닌 이곳에서는 미군의 막강한 화력이 위력을 발휘했다.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거제도와 제주도로의 ‘흥남 철수 작전’은 많은 병력과 장비 그리고 피난민을 안전하게 후송했다. 흥남철수 작전은 군부대가 빠져나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작전이 진행된 10일간 적의 대부대를 항구 주위에 묶어두고 상당한 피해를 입힌 ‘철수 전투’이기도 했다. 중공군 9병단은 아군 철수 후에도 15일 가량 흥남에서 지체했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피해와 흥남에서 입은 타격으로 중공군 9병단은 서부전선에서 13병단이 유엔군을 38선 아래로 밀어내며 남진해 내려올 때 합류하지 못했다.(백선엽 3권, 135쪽) ● ‘덩케르크’와는 달랐던 흥남 철수 흥남 항구 외곽 방어선과 화력 지원 속에 미군은 장진호 전투로 큰 인명손실이 난 미 제1 해병사단을 제일 먼저 후방으로 뺐다. 이어 국군 1군단, 미 7사단 순으로 철수했다. 흥남 부두에는 소형 선박부터 미주리 전함, 세인트 폴 순양함 등 총 109척의 선박이 193회의 수송작전을 펼쳤다. 10만 5천명의 미군과 한국군, 1만 7천500대의 차량, 35만t에 달하는 보급품과 장비가 운반됐다. 흥남 부두에는 10만 명 이상의 피난민도 몰렸다. 미군은 당초 2만5천명 가량의 피난민을 수송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김백일 국군 1군단장의 강력한 요구를 미군이 받아들여 약 10만명이 배에 올랐다. 미 10군단 참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LST(상륙용 주정) 2척, 상선 3척을 보내 피난민 5만 여명을 배에 태웠다. 특히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약 1만4천명을 태웠다.원산에서 올라온 미 3사단이 마지막으로 배에 오른 뒤 해군 UDT 대원이 흥남 부두의 방파제를 포함한 주요 시설에 설치한 400t의 다이나마이트, 50만 파운드의 폭탄을 터뜨려 흥남 철수 작전은 종료됐다. 흥남 철수에서 미군이 많은 수의 피난민을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인도적인 고려도 있었지만 미국의 막대한 전쟁물자 조달 능력도 배경으로 꼽힌다. 당시 미국은 전세계 생산의 50% 가량을 차지했다. 함흥에서 피난민을 배에 태우기 위해 버리고 파괴한 장비와 물자를 보충할 수 있는 능력과 여유가 있었다. ● 현봉학 박사의 “피난민은 개종한 기독교인” 기지 피난민은 많은데 할당된 선박이 제한되어 있는데다 피난민 속에는 농민 복장, 두루마기 차림의 첩자도 숨어 있었다. 의사 출신으로 알몬드 10군단장의 통역 겸 고문으로 일했던 현봉학 박사는 포니 대령에게 “대부분의 피난민은 신앙심이 투철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된 독실한 신자”라고 설명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던 때였다. 공산주의를 피해 떠나려는 기독교인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점을 부각했다. 선박 몇 척이 더 피난민 철수용으로 전환하도록 맥아더 사령관의 승인을 얻었다.(웨인트라웁, 295쪽)흥남에서 피난민 수송에 할당된 선박은 12척이었는데 마지막 수송선이 매러디스 빅토리호였다. 항공유 운반선인 빅토리호는 정원 60명으로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13명밖에 더 탈수 없었다. 선장 레너드 라우는 포니 대령과 협의해 25만t의 군수물자를 내리고 피란민 1만 4천명을 태웠다. 24일 마지막으로 출항한 빅토리호는 25일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거제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운항 중 4명의 산모에게서 5명의 아이가 태어나 ‘크리스마스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최상진, 123쪽). 미국인 선원들은 5명 아이에게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 1~5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2023년 73세가 된 ‘김치 1호’ 손양영 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모친은 평생 피란길에 북에 두고 온 형과 누나 등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23년 6월 27일)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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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上)[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 좌측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작전에 투입된 형상의 병사들 기념비가 있다. 6·25 전쟁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제1 해병사단 병사들이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 항미원조기념관은 내부 전시를 시작하는 곳에 장진호 전투에서 뺏은 미 제7사단 31연대 깃발을 걸어놨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전투이자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7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12만명의 인해전술을 돌파하는 기적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발언하자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다음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장진호 전투는 중국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반발했다.● 미 10군단 뒤늦은 원산 상륙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은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6사단이 초산에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던 10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산에 찾아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연설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 8군과 10군단의 지휘권을 2원화해 10군단은 육로로 북진하지 않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바다로 한반도를 돌아오느라 26일에야 원산항에 상륙했다. 맥아더가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킨 것은 워커의 미 8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동쪽에서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국군은 이미 원산을 점령한 뒤 보름이 지난 뒤였다. 평양도 19일 국군 1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에 의해 탈환한 후였다. ● 국군 6사단 ‘초산 과속’의 역풍 평양 점령을 돕기 위해 서진(西進)할 필요가 없어지자 11월 15일 맥아더는 군단의 진격 방향을 바꿨다.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를 거쳐 자강도 무평리와 강계 등 서북 방향으로 올라가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러스, 116쪽) 하지만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8군 지휘하의 국군 2군단 6사단은 이미 초산에서 압록강에 도달했다. 6사단은 ‘초산 과속’으로 압록강 도달 이튿날부터 중공군의 매복 포위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여파는 2군단 전체의 참패로 이어졌다. 국군 6사단이 초산에 도달했을 때 전선을 보면 좌우 부대와의 보조없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19일 압록강을 건너와 매복해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에게 돌출된 6사단은 공격의 호재를 제공했다. 측후방에 빈틈이 많기 때문이다. 6사단은 퇴로가 차단됐고 6사단을 도우려던 2군단 예하 7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공군의 분리 포위 타격에 당한 것이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달했던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보급이 두절되고 탄약이 떨어져 진퇴유곡이었다”며 사단장으로부터 휴대용 전투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 또는 소각하고 이동(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임부택, 319쪽). 6사단의 원래 주둔지는 탄광과 석회광이 있어 광산 개발이 활발했고 광물회사가 보유한 트럭이 많은 강원도 춘천과 영월 일대였다. 전쟁 후 이들 트럭을 징발해 기동력이 뛰어나 개전 초기 춘천 홍천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압록강 북진 작전에서는 홀로 앞서나갔던 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 구멍 뚫리고 퇴로 차단‘초산 과속’으로 괴멸된 6사단과 7사단, 즉 국군 2군단에 구멍이 뚫렸다. 워커와 알몬드간 지휘권 분할로 동서부 전선 사이에 80km 이상의 틈이 있는데다 두 전선 사이의 2군단 마져 무너지자 중공군은 유유히 내려와 11월 9일 원산을 점령한 뒤 미 3사단을 위로 쫓아 올렸다. 이때 멀리 함경북도까지 진격해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끊겼다. 이후 개마고원의 인공호수 장진호에서의 혹한 전투, 흥남 해상철수, 10만 피란민의 눈물 등이 이어졌다.(애플먼, 24쪽)동부 전선에서 아군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 공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인데도 11월 24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현장의 실상을 전하기는 커녕 사령관의 뜻에 부응해 북진에 가속명령을 내린 것이 11월 27일이었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 이후 잠적하듯 모습을 감췄지만 미 10군단 제1 해병사단이 함흥을 거쳐 장진호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길게 전선이 늘어져 분산되는 것을 지켜보며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 주변 유담리 하갈우리 신흥리 등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중공군 9병단 3개군 소속 10개 사단이 공격을 개시한 것도 알몬드가 진격 명령을 내린 27일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전투가 시작됐다. 장진호 전투 중공군(9병단 10개 사단)의 배치와 임무 중공군배치 지역담당27군 4개 사단장진호 동서안제1해병 사단, 7사단 31연대 공격20군 4개 사단유담리 하갈우리주보급로 차단26군 2개 사단고토리후방 봉쇄● 사전 ‘경고’ 무시한 댓가 중공군이 11월 27일 대공세를 시작하기 한 달 전인 10월 28일 국군 26연대(혜산진 부대)는 장진호〜흥남 사이 수동에서의 소규모 전투에서 중공군 16명을 생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124사단 박격포 부대 소속이라며 3개 사단이 북쪽에서 장진호를 향해 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즉각 도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사령부는 놀라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애플맨, 20쪽). 이미 대규모로 장진호 주변으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정보에 어두웠던 아군의 힘겨운 장진호 전투의 시련은 이때 시작됐다.27일 공세 하루 전에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중공군 3명이 민가에 숨어 있다가 7연대 정찰대에 투항했다. 이들은 “20군의 60사단, 58사단, 59사단이 유담리에 6일간 주둔해 있었으며 2개 해병 연대가 하갈우리와 유담리 사이 덕동고개를 통과한 뒤 해병항공대의 근접지원을 피해 어두워진 후에 공격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말단 병사가 대규모 작전계획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허위 정보를 전할 임무를 띠고 민가에 남겨진 미끼일 수도 있다며 포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러스, 128쪽). 이 정보는 장진호 동쪽의 미 7사단 31연대에 전달되지 않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해 ‘장진호 동쪽의 참극’으로 이어졌다.(애플먼, 73쪽)26일 밤 7연대 3대대 쪽에서도 민간인 한 명이 붙잡혀 심문을 했는데 “남서 방면으로 중공군 길 안내를 해주고 가는데, 행군 종대의 길이가 3시간 걸리는 길이였다. 말이 끄는 대포도 있었다”고 했다. 중공군 포로의 진술을 믿지 않은 것은 첫 운산전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포로는 전체 부대의 이동과 배치, 병력 수, 일부 작전 내용까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고 순순히 털어놨다. 백선엽 장군은 후에 국방부의 ‘전사(戰史)’를 보고 궁금증을 풀었다고 했다. 중공군 지도부가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 정신교육과 함께 전투 작전의 세세한 정보도 공유해 위아래 없이 동료의식을 갖게 한 것이라고 했다.(백선엽 1권, 246쪽). 때문에 포로의 진술은 매우 값진 정보였지만 맥아더와 사령부는 줄곧 소홀히 취급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미 제1 해병사단 장진호 전투 일지10월 26일원산 상륙하순 원산 인근 고저리, 북한군 잔당과 교전11월 2〜3일수동 연대봉, 중공군과 미 해병 첫 교전11월 7일 스미스 사단장 알몬드에 부대 분산 배치 항의11월 15일7연대 하갈우리 집결맥아더, 장진호 서쪽 진격 명령11월 25일7연대, 유담리 진입 11월 26일5연대, 장진호 동쪽 미 7사단 31연대에 인계 11월 27일중공군 포위 공격, 미 해병 1사단도 공격 개시12월 1일하갈우리 야전활주로 개통12월 2일덕동통로 확보12월 7일고토리 도착 12월 9일수문교 건설, 황초령 통과12월 11일흥남 도착● 덕동통로, ‘폭스 힐 중대의 기적’ 유담리에서 27일부터 북한군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은 미 제1 해병사단 5연대와 7연대가 철수할 때 퇴로는 덕동통로 한 곳 뿐이었다. 이곳 돌파 임무를 맡은 7연대 F중대(폭스힐 중대)는 5일간 덕동통로에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중공군 3개 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며 지켰다. 폭스 중대가 하갈우리에 도착했을 때 중대원 247명 중 생존자는 60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중증 동상에 걸려있었다. 바버 대위는 1952년 8월 대령에서 소령으로 진급한 뒤 트루만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최고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백악관에서 직접 수여받았다.유담리의 주력 부대가 사단본부가 있는 하갈우리의 부대와 합류할 수 있는 지는 사단의 존망과도 직결된 것이었고, 이는 덕동통로라는 혈로를 지키느냐에 달려 있었다.(러스, 320쪽) 이런 상황에서 나온 ‘폭스힐 중대의 기적’같은 전과는 ①혹한 속에서도 진지 배치 직후 참호를 구축하는 기본 수칙을 지킨 점 ②하갈우리 포병 부대의 지원 사격 ③덕동통로를 우회해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 주효 ④C-47 수송기를 통한 탄약 등 공중 투하 ⑤무엇보다 고립된 부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 따른 부대원의 사기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미 해병대는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에서 밤에는 피리, 꽹과리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몰려드는 유령같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갈우리를 포위해 밀집 포위한 중공군의 숫자가 많아 ‘들판 전체가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고 했다.(러스, 296쪽)후퇴하는 부대가 모두 하갈우리에서 흥남 방면으로 18km 가량 떨어진 고토리에 집결한 것이 12월 7일 밤이었다. 병력 1만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18km를 이동하는데 40시간이 걸렸다. ● 황초령 수문교, 공중투하로 복구 후 계곡 통과 이튿날인 8일 황초령을 넘는 첫 관문은 450m 깊이의 계곡을 연결하는 수문교 중 중공군이 폭파한 약 7m 구간을 복구해 건너는 것이었다. 다리를 복구하지 못하면 차량과 전차 야포 등 장비를 버려야했다. 7일부터 극동 공군 전투공수사령부가 C-119 수송기 8대를 이용해 낙하산으로 임시 교량 경간목을 공중 투하했다. 1t이 넘는 경간목 4개 중 두 개는 중공군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고 중공군의 간헐적인 공격이 계속되는 등 우여곡절 속에 9일 오후 사단 공병대대가 수문교 복구를 마쳤다. 대규모 교량 설비를 공중 투하해 계곡의 다리를 복구하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야간을 이용해 병력과 장비 뿐 아니라 다수의 피난민도 다리를 건너 11일 흥남에 도착했다. 유담리에서 11월 27일 중공군 공격을 받고 후퇴하기 시작한 뒤 128km를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는 중공군과 사투를 벌인 뒤 약 2주 만이다. 미군은 후위 부대가 모두 수문교를 건넌 것을 확인한 뒤 다시 폭파해 중공군의 추격을 막았다. 한 장교는 북진 명령을 받고 장진호 부근으로 전진해 가던 상황에 대해 “중공군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노리고 있는데 그런 적의 진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지칠 대로 지쳤다. 도쿄 본부에서 오는 명령은 하나같이 말도 안됐다. 우리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핼버스탬, 666쪽)● 살인적인 추위, ‘세계 2대 동계 전투’ ‘땅이 35cm까지 얼어 참호를 팔 수 없어 전투가 심할 때는 동료의 언 시신을 쌓아 방벽으로 이용하는 일까지 있었다.’(‘1129일간의 전쟁’, 261쪽). 당시의 참혹한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북한군이나 중공군보다 더 위협적인 건 한반도의 험한 산악과 악천후였다. 살을 에는 겨울 날씨가 미군에게는 최대의 적이었다.”(핼버스탬, 12쪽). 장진호 전투는 2차 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맞먹는 세계 2대 동계전투로 불린다. 전투 당시의 기온은 영하 37도까지 내려갈 때도 있었다. 습도가 높고 강풍이 불어 체감 온도는 더욱 떨어졌다. 양측이 인명피해를 집계할 때 사망, 실종과 함께 ‘동사자’를 분류해 파악했다. 양측 모두 자다가 동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투 중 죽은 척하고 있으면 생사 확인도 않고 옷을 벗겨가 얼어죽었다. 눈을 녹여 식수로 쓰고, 총기나 대포의 철판에 맨손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깡통으로 지급되는 전투 식량이 얼어 옥수수나 콩을 떼어 입에 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 군의관은 “수혈용 혈액과 진통제의 모르핀도 얼어, 위생병은 모르핀이 얼지 않도록 입 속에 넣고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고, 혈액은 얼어 수혈을 하지 못해 많은 전우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고통을 봐야 했다”고 증언했다. 히긴스는 “동상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 동상은 많은 해병의 손가락, 발가락, 발, 다리가 절단되는 것을 의미했다”고 했다.(히긴스, 251쪽) 자동화기들은 정상보다 매우 느리게 작동했고 수류탄은 잘 터지지도 않았다. 박격포탄이나 야포 포탄에 부착하는 장약의 추진력이 약해져 포탄의 비거리가 짧아져서 아군 병력을 위협하기도 했다. 연료가 얼어 고체 덩어리가 되고 폭약을 터뜨려 구멍을 뚫은 뒤에야 참호를 파기도 했다.(러스, 294쪽)중공군 장교도 “영하 20도는 보통이고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 계속됐는데 일부는 솜옷이나 털모자를 걸쳤으나 대부분 방한장비도 갖추지 못했다. 동상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해 전투력 손실이 엄청났다”고 털어놨다.(훙쉐즈, 173쪽). ‘상감령 전투’의 상감령이 어디야?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은 중공군의 참전부터 1958년 북한에서 철수 할때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그런데 두 전투에 대해서는 별도의 코너를 만들어 소개한다. 상감령 전투와 장진호 전투다. 2020년 기념관을 새로 단장하면서 기념관 외부에 중국이 전쟁 시기를 구분하는 ‘1차〜5차의 전역(戰役)’을 동판에 새겨 놓았다. 여기에는 ‘상감령 전역’만을 따로 소개했다. 이전 기념관에서는 내부에 전쟁 당시 철원의 지형까지 모형으로 만들어 놓고 상감령 전투 소개에만 하나의 전시실을 할애하다시피 했다. ‘상감령 전역 주요 전투 일람표’ ‘상감령 주요 전투 지역’ 지도 등도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강조하는 상감령(上甘岭) 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43일간 국군과 유엔군이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오성산(해발 1062m) 부근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부근에서 중공군 15군과 벌인 전투다. 중국은 가장 대표적인 승전이라고 선전하지만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98고지와 파이크스봉, 여배우의 이름을 딴 제인러셀 고지 등을 합쳐 삼각고지라 불렀다. 삼각고지 동쪽에 저격능선(538m)이 있다. 중국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쳐 상감령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만 아는 명칭인 셈이다. 1952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유엔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이른바 ‘쇼다운(Show Down)’ 작전을 벌인다. 유엔군의 작전목표는 오성산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삼각고지(미 제7사단)와 저격능선(국군 제2사단)이었다. 하루 최대 30만발의 포탄과 500여개 폭탄이 떨어져 두 고지의 높이가 1~2m 낮아질 정도로 치열했다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대규모 땅굴인 ‘지하 만리장성’으로 버텼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는데 상감령에도 견고한 땅굴이 구축되어 있었다. 훙쉐즈는 “상감령 전투는 땅굴을 중심으로 한 방어체계의 우수성을 실제로 확인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413쪽)상감령 전투는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도 전해져 중국 위문단이 전선을 찾아가 공연을 하고 위문품과 위문편지도 보내는 등 ‘상감령 열풍’이 불었다. 중국에는 ‘레이펑(雷鋒) 정신’처럼 ‘상감령 정신’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이다. 상감령 전투에서 저격능선 전투에 참가한 2사단 등 국군 전사자는 4830명, 중공군 전사자는 1만4867명으로 중공군이 3배 이상이다. 하지만 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채로 전투가 끝났다. 중국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승리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중국에서 ‘상감령’은 영화로도 제작돼 많은 인기를 끌었다.참고문헌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임부택 지음, 『낙동강에서 초산까지』, 그루터기, 1996.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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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 정교한 ‘덫’의 전술[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수풍댐 상류, 영하 10도의 압록강 물속으로 방한복과 신발 양말을 벗어 등 뒤에 묶은 반나체의 병사들이 걸어 들어갔다. 강을 건너왔을 때는 온몸에 얼음이 주렁주렁 매달려 은색 갑옷을 착용한 유령 같았다. 응급처치를 담당하는 여군도 마찬가지였다. 강이 얼어붙기 전 이렇게 수 만명이 건넜다. 주간에는 동굴, 기차 선로 터널, 탄광 갱도, 마을 초가집에 숨어 있다가 어두워지면 이동했다.’(웨이트라웁, 43쪽)중공군은 북한에 들어온 뒤 미군의 공군력을 두려워해 야간에 병력을 이동시켰다. 낮에는 병사 한사람 한사람이 야산의 나무를 베서 등에 지고 이동하다가 미 공군기가 뜨면 그 나무를 세워 놓고 주저앉아 공습을 피했다. 산 가득히 나무를 태워 그 연기로 연막을 형성해 미군 조종사의 시야로부터 숨기도 했다.(백선엽 1권, 196쪽)중공 항미원조지원군 훙쉐즈(洪學之) 제1부사령관은 “1950년 10월 19일 4개군과 3개 포병사단이 안둥(安東·이하 단둥), 창뎬허커우(長甸河口) 지안(集安) 3곳 다리를 건너 씩씩하게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했다.(훙쉐즈, 64쪽). 하지만 많은 병력은 야음을 틈타 다리가 아닌 강물을 직접 건넜다. ● ‘13일의 재결정’, “압록강 다리 폭파 전 일거에 투입”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빠른 속도로 북진해 중공군의 참전은 시간 문제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간 중공군 파병을 둘러싼 막판 신경전 끝에 파병이 최종 재결정된 것은 10월 13일 0시 이후여서 중국측 연구서는 ‘13일의 재결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련군 공군 지원이 없어 마오쩌둥이 갑자기 출병 중지 명령을 내리는 우여곡절이 있어 출병 날짜는 19일로 늦춰졌다. 초기 투입 병력은 1차 25만여 명, 2차 15만 명, 3차 20만 명으로 총 60만 명이었다.(이상호, 252쪽)북한 파병 준비를 위해 단둥(丹東)에 온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10월 7일 미군 전투기가 단둥이나 압록강대교를 폭격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전쟁 확대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는 미군 전투기가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기 전에 4개군(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고 술회했다.(훙쉐즈, 53쪽)● 유엔군의 빠른 북진으로 작전 변경 중공군은 당초 압록강을 건넌 뒤 북한의 허리부분까지 진격해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했으나 유엔군 북진 속도가 빨라 작전을 변경했다. 압록강을 넘어오기 전부터 북쪽 산악지대에서 진지전과 기동전을 배합한 반격 습격 매복 등을 구상했다.(훙쉐즈, 68쪽). 미군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와 산악지대에 숨어있는 것을 몰랐고 중공군은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그렇게 빨리 도달할지 예상 못했다. 초반에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후 상반된 대처가 전황을 갈랐다. 중국은 현대화된 장비와 해공군을 갖춘 미군과 정면 대결하기 보다 우회 공격과 분산, 은폐 등으로 대응했다. 지구전, 적 측면 우회 각개 격파접근전, 야간전, 속전속결, 적의 강한 화력의 장점 발휘 방지 낮에는 병력 분산 은폐해 공습 회피 전투기 활동 제한되는 야간전투 폭격 우려있는 철로 도로 이동 회피 진지 매복후 북진하는 상대 공격 순서시기기간(일)특이 사항11950년 10월 25일〜11월 5일12공세 후 중공군 잠적2〃 11월 25일〜12월 10일15장진호 전투3〃 12월 31일〜1951년 1월 10일111·4 후퇴41951년 2월 11〜18일7유엔군 37도선까지 후퇴5〃 4월 22〜30일91차 춘계공세, 최대 단일 군사작전으로 70만 명 동원6〃 5월 16〜20일52차 춘계공세, 공세 실패 후 본격 지구전, 전선 교착 상태 지속71953년 7월 13 〜27일15휴전 서명 직전 최후 공세● ‘7차례 공세’를 알리는 신호탄 운산 전투 미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3차례나 당한 뒤였다. 1주일에서 보름 가량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공격을 해오다 일정 기간 휴지 기간을 지난 뒤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중공군 출병을 신고한 운산전투(1950년 10월 25일~11월 3일)에서 중공군에게 일격을 당한 뒤에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교훈을 얻지 못한 댓가는 ‘무사안일 북진’하던 미군과 국군의 전황을 훅 뒤집을 정도로 컸다. 운산전투는 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다. 중국은 첫 전투가 벌어진 10월 25일을 참전 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공군은 “미군의 최정예라는 제1기병 사단의 콧대를 꺾어 흥분되는 일이었다”고 평가했다.(훙쉐즈, 108쪽)국군 1사단 15연대는 25일 금광으로 유명한 운산에서 박격포 세례를 받았다. 첫날 전투에서 35세 가량의 포로 한 명이 생포됐다. 두툼하게 누빈 무명 방한복으로 겉은 카키색, 속은 흰색이어서 눈이 오면 위장복도 됐다. 그는 자신이 제39군 소속으로 광둥성 출신이라고 밝힌 뒤 인근에 2만 명 가량의 중공군이 있다고 술술 털어놨다. 직접 신문한 백선엽 사단장은 미 8군을 통해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도쿄 사령부는 조선족 의용병이 가담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15연대는 운산에서 ‘전투부대로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할 정도로 괴멸됐다. 미 제8기병 연대도 중공군에게 포위돼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중공군 포로 한 명의 진술을 흘려버린 댓가였다. 중공군은 운산 전투 후 잠적했다.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과 탄약이 바닥나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중공군의 대규모 투입 사실을 모르는 것을 역이용해 더 큰 승리를 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했다.(훙쉐즈, 111쪽). 일시적 후퇴로 일종의 진공상태를 만든 다음 전투력이 더욱 우수한 적을 추가로 유인해 매복전술로 섬멸하려는 계략이었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적들에게 겁을 먹고 후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유엔군은 이런 중공군의 계략에 말려들었다. (웨이트라웁, 45쪽)애치슨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0월 26일부터 11월 17일까지 3주일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재난으로 가는 것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잃었다’고 했다.(애치슨, 602쪽). 1차 대공세 이후 중공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 ‘미끼 던지고 보름달 계산하고’, 정교한 덫 1차 공세 후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은 유엔군의 북진 속도가 느려진 것을 걱정했다.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는 적이 먼저 밀고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의도적으로 비호산, 덕천 등을 포기해 상대를 유인했다. 후퇴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작전이 노출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고 한다. 주력 부대는 10여km 후방에 있고, 소규모 부대로 기습공격을 해 공격개시선까지 쫓아오도록 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운산 전투 후 바로 자취를 감추는 등 일부러 약하게 보이려고 했다고 했다.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 깊이 유인하려는 전술이었다는 것이다.(펑더화이, 426쪽). 2차 공세를 앞두고는 핵심 정예부대를 ‘미끼’로 던졌다. 항일전쟁과 국공 내전에서 ‘철군(鐵軍)’으로 알려진 112사단을 적의 공격해 노출시켰다. 대비가 허술하다고 판단하고 적이 진격해 오도록 한 것이었다.3차 대공세 전에는 달뜨는 시기를 살폈다. “보름달 뜨기 며칠전이 공격 개시에 가장 좋다. 전투가 최고조에 이를 때 보름달이 되어 가장 밝다.” 우리에게 신정 공세로 알려진 12월 31일 3차 공세 개시 날짜는 그렇게 정해졌다.(훙쉐즈, 192쪽).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채 안가고, 연말연시 경계심이 풀어진 틈을 이용하자는 계산도 있었다. 중공군은 밤에 산악을 이동할 때는 고무 군화를 신고 어두운 산허리를 소리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침입해 왔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3월호, 122쪽)중공군이 7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5차 대공세를 편 것은 미군이 동해안 통천 원산 등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반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38선을 치고 올라오면서 상륙작전으로 39도선의 안주~원산선으로 측면 공격해오면 주요 보급선이 차단돼 큰 위협이 된다고 봤다.●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중공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할 때부터 유엔군을 북한의 산악지대로 유인했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에 후방 역습을 경고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한 후에는 미군이 북한까지 진격하도록 지상군 투입을 늦췄다는 것이다. 북한 최북단 산악지역에서 맞붙는 것이 중공군의 보급선도 짧고 방어에도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미리 투입해 중공군이 38선까지 내려간 뒤 미군이 함흥이나 남포 등 더 북쪽으로 상륙하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쑤이, 155쪽)미군이 압록강으로 진군할 때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고집과 오만을 부릴수록 우리에겐 유리하다. 오만한 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면서 미군이 최대한 북쪽으로 올라와 보급로에 문제가 생기기만을 기다렸다.(핼버스탬, 569쪽)구분1950.10.281950.12월 초1951.7.101953.7.27사단 갯수18315158병력(명)203,640531,500948,2991,221,058시기첫 참전2차 공세 휴전회담 시작정전협정 서명● 미 2사단, 군우리 전투 ‘인디언 태형’ 굴욕 중공군의 ‘매복과 덫’의 전술에 처절한 패배를 당한 것이 군우리 전투다. 국군 6사단을 시작으로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직후부터 중공군의 맹렬한 기세로 이제는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급급했다. 압록강에 처음 도달했던 국군 2군단 6사단은 초산에서 매복 포위당해 괴멸됐다. 7사단과 8사단 역시 중공군 공격에 하룻밤 사이 무너졌는데 두 사단의 사단장은 부대를 이탈한 뒤 서울 거리를 떠돌다 헌병에 체포돼 군법재판에서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일제히 북진할 때 호남지방을 돌며 후방 게릴라 잔병 소탕을 하던 미 2사단이 국군 2군단이 무너져 뚫린 곳에 급거 투입됐다. 미 2사단은 청천강변의 평남 개천군 군우리의 좁은 계곡에서 중공군 제42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공군이 정찰을 맡은 전차 소대를 통과시켰고, 뒤따르는 헌병 정찰대와 수색중대 정찰대, 본대를 분리 타격했다. 군우리 전투는 적이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를 골짜기를 야간에 이동한 것부터 큰 실책이었다. 낮이라면 미군의 공군 및 화력지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야간에는 홀로 적과 맞서야 한다. 카이저 사단장은 곧 바로 현직에서 물러났다. 미군의 전사(戰史)는 카이저 소장의 실수를 상세히 기록해 교훈으로 삼는다고 한다. (백선엽 1권, 125쪽).미 2사단은 앞뒤가 차단된 상황에서 계곡 위에서 집중 포격과 사격을 받아 사흘만에 병력의 20% 만이 살아남았다. 전투가 끝난 뒤 트럭과 장비, 야포와 각종 무기 그리고 막대한 양의 물자가 고스란히 중공군에 넘어갔다. 그중 상당수는 베이징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이 있는 최고 지도부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핼버스탬, 131쪽)미 2사단의 부대 마크가 ‘인디언 헤드’이고 인디언들이 계곡 양측에서 공격하는 전술과 닮아 ‘인디언 태형’을 당했다고 미 전사는 기록한다. 군우리 전투(1950년 11월 29일~12월 1일)는 6·25 당시 미군의 사단급 부대가 당한 최악의 피해였다.(남도현, 279쪽). ● 남진(南進) 속도와 범위두고 공산측 내부 이견 미군이 중공군 공세에 38선 남쪽으로 철수한 것은 12월 16일이지만 중공군이 뒤따라 넘은 것은 열흘 뒤인 26일이다. 마오는 12월 4일 평양에 들어온 뒤 서울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는 너무 멀리 내려가는 것은 보급선도 길어지고 유인 작전에 걸릴 수 있어 서울 점령은 북한군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쑤이, 248쪽). 1951년 1월 8일, 펑더화이는 부대의 진공을 멈추고 전군 2개월간의 재정비를 명령했다. 중공군이 38선을 넘고 서울을 재점령한 뒤에는 중공군을 남쪽으로 더 유인한 다음 육해공 공동 상륙작전을 펴서 독 안에 든 쥐처럼 만들려는 계획인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펑더화이는 “37도선에서 공격을 멈췄는데 우리를 낙동강으로 깊이 유인하려던 적은 우리 방어가 견고하게 완성되지 않은 것을 알고 1월 하순 반격을 가했다”고 당시를 분석했다.(펑더화이, 429쪽) 북한주재 소련대사 라자예프는 “전투에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지 않는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누구냐?”고 항의하다 스탈린에 의해 조기 귀국당했다.(훙쉐즈, 203쪽). ● 중소의 ‘제한전’미국에서도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론과 트루먼의 제한전론 간에 갈등이 있었지만 중소도 확전을 피하고자 했다.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하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공포로부터 해방됐다’고 반겼다고 한다. 전쟁이 한반도에 국한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원했던 소련과 중국은 미군이 신속히 지상군을 보내 참전하자 직접적인 대결이나 확전을 막으려고 했다. 중공은 공중전을 확대시키지 않아 미국의 핵공격 또는 중국 본토에 대한 보복행위의 위험을 피하려고 했다. 트루먼이 중국 본토로 전쟁을 확대하지 않은 데는 중국이 공군력 행사에 신중한 것도 한 요인이라는 분석이다.(쑤이, 260쪽) 소련도 미국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공군 작전에서 제한을 두었다. 전쟁에 참가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이유는 다르지만 미국도 소련 공군의 참전 사실을 비밀로 했다. 소련 참전한 것이 부각되면 여론을 자극해 전쟁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선즈화, 504쪽). 소련 공군 참전 및 교전 수칙소련 영토에서 이륙해 작전 투입 금지중국 혹은 조선비행기로 위장, 조종사는 중국 군복 착용조선 작전 투입 사실 누설 금지 각서와 선서비행 중 러시아어 사용금지유엔군 통제구역 혹은 전선 인접지역 비행 금지서해 상공 교전 금지평양〜원산 남쪽(39도선) 적기 추격 금지절반만 끊어진 ‘압록강 단교(鴨綠江 斷橋)’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압록강 단교(斷橋)는 북한쪽이 없고 중국쪽 교각만 남아있다. 다리의 절반만 폭격으로 부서진 것이다. ‘압록강 단교’로 보존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곳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6·25 전쟁을 읽는 중요한 코드가 담겨 있다.다리가 절반만 끊어진 것은 ‘중공군에 대한 미군의 공습은 저기까지’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압록강 중간이 국경인데 북한쪽 절반만 폭격한 것은 중국으로의 확전을 막겠다는 트루먼 대통령과 군 및 보급품 차단을 위해 다리를 끊어야 한다는 맥아더 사령관의 절충점을 보여준다. 중공군 개입에 대응하기 위해 다리는 폭격하지만 절반 밖에 하지 못한 확전론과 제한전의 갈등이 절반만 파괴된 끊어진 다리에 응축되어 있다. “워싱턴이 내린 제한 명령으로 나는 중공군의 대량 개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만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트레트메이어 장군에게 B29 폭격기 90대로 압록강 철교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폭격을 잘못하여 폭탄이 만주 땅에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 나는 그때까지 그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맥아더, 222쪽)1950년 11월 6일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압록강 대교 등을 폭격하겠다는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의 전보를 받고 워싱턴이 발칵 뒤집혔다. 중간선거 전날 캔사스시에 있던 트루먼에게 애치슨이 긴급 전화를 걸었다. “사안이 중대해서 즉각적인 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트루먼은 “아군에 대한 즉각적이고 심각한 위협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허락할 것”이라고 했다. 미 합참은 도쿄에서 폭격기가 이륙하기 1시간 20분 전 전문을 발송했다. 영국과 협의없이 만주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했다고 알렸다. 명령이 있을 때까지 국경 5마일 이내 표적에 대한 폭격을 연기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맥아더가 “대규모 병력 및 물자가 압록강 전 교량을 통해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휘하 부대를 위태롭게 하고 궁극적으로 와해되도록 위협하고 있다”며 폭격의 필요성을 강조한 긴 전문을 보냈다. “합참의 지시는 중대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즉시 대통령이 제기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애치슨, 600쪽)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맥아더의 전문을 전화로 트루먼에게 그대로 읽어주었다. 부대가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 트루먼은 결정을 번복했다. 다만 “압록강 교량의 한반도측 연결 부분을 포함하는 한만 국경에 대한 폭격을 허락한다. 압록강의 댐이나 수풍발전소 폭격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만주의 영토와 영공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워싱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허가했다. 다리 절반만 폭격하려면 압록강 하류에서 일직선으로 비행하면서 폭격해야 한다. 그러면 적은 비행 코스를 알고 고사포를 발사할 것이다”고 했다. 실제로 이 작전으로 대공포 사격을 받아 부상을 입은 조종사는 “워싱턴과 유엔은 도데체 누구 편입니까”라고 물었다. 맥아더는 ‘절반 폭격’ 지시에 반발해 자신을 해임하라고 요청하는 전보 문안을 준비했다가 참모들의 만류로 찢어버리고 보내지 않았다.(맥아더, 224쪽). 맥아더는 “미국 역사상 야전 사령관에게 주어진 결정 중에서 이처럼 융통성이 없고 무모한 결정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영화 ‘디보션’에는 미 항모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대공 사격을 받으며 아슬아슬하게 교각 사이를 지나며 폭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트루먼의 수정 명령에 따라 압록강 교량에 대한 폭파가 11월 8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됐다. 8일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 비행에서 B-29 3대가 교각 사이의 수면위로 비행하며 폭격을 했다. 중공군은 (실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대공포격을 해왔다. 두 번째 비행에서는 4대의 B-29가 다른 쪽 교량 첫 번째 교각 사이 수면위로 비행했는데 결과에 만족한다. 내일은 B-29가 남은 교량들을 휩쓸고 지나갈 예정이다.”참고문헌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미디더, 2010.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딘 애치슨, 『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권, 2020.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스탠리 웨인트라웁 지음, 송승종 옮김,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작전』, 북코리아, 2015.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펑더화이(彭德懷) 지음, 이영민 옮김, 『나, 펑더화이에 대해 쓰다』, 앨피, 2018.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향군』 1991년 3월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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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적들이 오늘 우리가 처한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여 38도선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북한 신의주 압록강 건너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연명으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긴급 파병 요청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자다. 박헌영은 이 편지를 직접 들고 베이징(北京)으로 달려갔다. 이날 스탈린도 마오에게 참전을 강력히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물론 중공군의 참전이 김일성의 ‘구명 요청’ 편지 한 장으로 결정될 것은 아니었다. 여러 우여곡절과 마오 나름대로의 계산에 따라 이뤄졌다. 그럼에도 6·25 전쟁의 큰 흐름을 바꾼 중공군 개입의 분기점에 이 편지가 있다. ● 마오의 ‘파병 의지’ 중국은 6·25 발생 10여일 후인 7월 7일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25만의 병력을 배치했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압록강을 넘은 파병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베이징(北京) 지도부내에 반대가 많았고 스탈린이 ‘항공 지원’을 해줄지도 변수였다. 1일 김일성의 편지와 스탈린의 전문을 받은 마오는 이튿날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참전을 주장했으나 다수가 반대해 마오는 “당분간 참전할 수 없다”는 뜻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러면서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3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 넘으면 중국은 관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오의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5일 “중소의 연합세력은 미국보다 강하다”며 참전을 독려했다. 중공이 참전을 머뭇거리면 북한에 파견한 소련 인원을 철수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며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파병 의지가 있었던 마오가 꺼낸 카드는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지방에서 마오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올라온 펑은 “미국은 호랑이다. 결국은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언제가 잡아야 한다면 빨리 잡는 것이 좋다”며 파병을 주장했다. 펑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에 지명되자 “설령 전쟁으로 우리 국토가 황폐해지더라도 국공내전 승리가 몇 년 지연됐다고 여기면 된다”고 했다. 8일 마오는 군에 참전 준비 명령을 내렸다. 이날 흑해 휴양지 소치에서 휴양중인 스탈린에게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를 보내 자신의 결심을 전달했다. <1950년 10월 긴박했던 한달>1일3사단 23연대 38선 첫 돌파맥아더, 김일성에 항복 요구김일성 박헌영, 마오에 참전 지원 요청 편지스탈린, 마오에 참전 독려 전문2일마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펑더화이 사령관 지명7일유엔, 유엔군 38선 북진 승인8일미군, 38선 돌파 북진마오, 동북변방군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10일수도사단, 3사단 원산 입성 15일트루먼-맥아더 웨이크섬 회담16일중공군 선발대 압록강 도강김일성 평양 탈출19일중공군 본대 압록강 도하1사단, 미 제1기병사단 평양 입성20일미군, 평양 이북 ‘공수 낙하’ 작전22일국군, 청천강변 도착25일1사단, 운산전투에서 중공군 첫 교전26일6사단, 자강도 초산 압록강 도착이승만 원산 시민환영대회 연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30일이승만, 평양시민환영대회 10만 인파 앞 연설● ‘항공 지원 거절’에도 ‘반기(反旗)’ 접은 마오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을 면담한 다음날인 10일 뜻밖의 소식이 마오에게 전해졌다. 스탈린과 저우언라이가 공동 명의로 “소련 공군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당분한 출동할 수 없다. 중소 모두 당분간 조선에 출병하지 않는다. 김일성에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토록 할 것이다”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소련 공군 지원은 2개월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공군이 미미해 막강한 미군의 공군 화력에 제물이 되면서 파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스탈린은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소련은 항공기 파견을 서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오는 분노했다.(판초프, 547쪽) 마오는 12일 스탈린에게 북한에 파병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군에도 8일 명령을 철회했다. 스탈린에 대한 반기이자 ‘티토’ 유령이 나타난 격이었다. 그런데 마오는 하루 만에 파병으로 돌아서 꼬리를 내렸다. 마오는 “김일성이 동북에 망명정부를 세우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동북의 북한 망명정부’ 왜 마오의 아킬레스건인가마오가 ‘동북의 조선 망명정부’를 막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도 참전하도록 결정하게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인 것은 무엇일까. 1월 소련과 맺은 동맹조약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중국 동북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면 전쟁은 동북 지방까지 확대된다. 그럴 경우 스탈린은 중소동맹조약에 따라 중공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십만의 소련 극동군을 동북에 파병할 근거를 갖게 된다.(선즈화, 485쪽) 스탈린은 5일 마오에게 참전을 독려하는 전보에서도 이러한 뜻을 밝혔다. 일본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소련은 일본과의 전투를 구실로 동북에 출병했다.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중국 주권을 훼손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6·25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돼 소련이 출병하면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장제스 정부 때처럼 소련군이 주둔하며 동북의 주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마오의 고민이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렇다고 ‘북한 동북 망명정부’가 들어섰는데 소련의 동북 출병을 거부하면 중소동맹조약도 난파될 우려가 있다. 마오가 신중국 건설에 필요한 군사 외교 경제적 지원은 어려워진다. 전쟁으로 미국과도 적대 관계가 된 상황에서 소련까지 돌아서면 공산당 정권도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선즈화, 488쪽)동북에 군대를 보유한 북한 망명정부는 시도 때도 없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마오로서는 이것은 국경 너머에 미군이 주둔해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었다. 마오가 내부의 반대 의견과 스탈린이 항공 지원 약속도 받지 못했음에도 파병을 결정한 속사정 중의 하나다.(키신저, 182쪽)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이제 인민지원군이 도강해 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 출동 시기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스탈린과의 풍파가 일단락된 10월 18일 마오는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단호하게 이같은 파병 명령을 전달했다.● 중공 참전의 다양한 이유들마오의 한국전쟁 참전 이유 중에는 국공 내전 기간 받았던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빚을 갚는 것도 있다. 1946∼9년 2차 국공내전 기간 국민당 군대를 우회하는 두 개의 수송 및 보급로가 북한 지역을 지났다. 북한은 중공군의 전략적 후방 기지로도 활용됐다. 부상자와 부대원 가족 1만5000명이 피해 있었고 물자와 무기 장비도 제공받았다. 스탈린은 마오에 대해 “마치 빨간 껍질에 하얀 속살이 있는 순무와도 같다”며 ‘제2의 마셜 티토’라고 의심했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스탈린이 참전을 원할 때 참전해야 했다. 소련의 무기 도입으로 중국군을 현대화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에 도움을 받는 등 스탈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의혹 해소는 꼭 필요했다.(쑤이, 30쪽) 1949년 8월 장제스가 남한을 방문해 이승만과 반공 동맹을 도모한 것도 김일성을 돕기 위해 참전한 한 요인이다. 국민당군이 미군 지원 아래 한국에 공군기지를 건설한 뒤 중국 대륙 공중 폭격에 활용하려는 것을 마오는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쑤이, 55쪽) 중국은 북한이 38선을 넘은 이후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한 것을 보고 마오는 미국이 내정불간섭 원칙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마오의 필생의 과업인 중국 통일의 꿈을 수포로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키며 결의를 보였다.(선즈화, 481쪽) ● 소련은 중공군의 조기 파병 꺼렸다? 시기의 문제일 뿐 중공군의 파병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왜 개전 후 4개월 가량 지난 시기에 파병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유엔군이 북진해서 산악지대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전 효과를 높일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웨이크섬 회담 때 중공군 참전에 부정적이라고 트루먼에게 얘기할 때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했다면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올 때가 더 적기였는데 오지 않았다”고 했다. 히긴스는 “중공이 1950년 6월과 9월 사이 개입했다면 거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마오가 왜 미국이 화력이 증강될 때까지 기다렸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히긴스, 232쪽). 소련이 중공의 조기 참전을 반기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다. 10월에는 스탈린이 마오에게 참전을 압박했으나 초기에는 오히려 파병을 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전쟁을 통해 노리는 목표와도 관련이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뒤 전쟁이 쉽게 승리로 끝나면 적화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중공의 공(功)이 커서 소련의 영향력은 중국보다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미국과의 전투에서 힘이 빠지고 소련에 대한 의존이 커지게 하기 위해 마오를 참전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는 ‘스탈린 음모론’측의 주장이다. 초기와 달리 10월 스탈린이 마오에게 파병을 압박한 것은 유엔군이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이후 38선을 넘어와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세력 범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도 중국의 출병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선즈화, 414쪽). 중국이 조기에 참전해 승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스탈린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해 적대관계가 되게 하려는 스탈린의 목적은 달성됐다. ● “중국 발전이 50년 후퇴해도 참전한다”참전 결정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 전에도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참전 의지를 밝혔다. 8월 4일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더라도 최후까지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참전 방침을 정했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는 “조선은 중국의 이웃이다. 조선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참전 의사를 공개적으로는 처음 암시했다. 녜룽전( 聂荣臻) 중공군 참모총장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발전이 50년 이상 후퇴해도, 저항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며 참전 의지를 밝혔다. 녜룽전의 말처럼 참전 이후 중국은 약 30년간 국제사회 단절된 채 죽(竹)의 장막 너머에서 고립됐다. 스탈린이 중공군의 참전을 종용한 의도대로 미-중 관계는 적대적이 됐다. 중소간에도 분쟁이 계속됐다. 중공이 1979년 미중 수교까지 ‘30년의 고립과 쇠락’을 겪은데는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이 있었다.● 마오, ‘서방-소(蘇) 사이 양다리’, 결과는 ‘왕따’ 마오는 2차 대전이후 세계 질서가 냉전으로 양극화하는 과정에서 소련과는 이념적인 동질성을 같이하면서 서구 국가와도 실리적인 관계를 맺는 ‘양다리 전략’을 구상했다. 국공 내전 시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와 유사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 모두 중국을 상대국과 떼어 놓기 위해 고심했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까지 승인해 미중을 적대관계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대만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쟁이란 선수(先手)를 쳤다. 그러면서 중국이 너무 빨리 참전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중국에게 공이 돌아가지 않도록 고심했다. 6·25 전쟁에서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적대관계가 됐다. 서구 사회로부터는 죽의 장막으로 단절돼 투자와 개발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서구와 다시 손을 잡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퇴보를 면치 못했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참가한 댓가로 마오쩌둥만 ‘왕따’가 됐다는 것이 손튼 교수의 시각이다.(손튼, 535쪽)● 마오와 스탈린 누가 패자(敗者)인가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의 한 대학 교수가 2023년 5월 수업 중 “중국은 6·25 전쟁에서 하나를 얻고 아홉 개를 잃었다(一得九失·일득구실)”고 말해 누리꾼들이 항의했다. 이 교수가 언급한 9개의 ‘실(失)’ 중 미국과 대립 관계, 서방과 결별, 한국과 적대시 등 외부와의 고립이 3가지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유발은 중국의 퇴보를 불렀다고 했다. 이밖에 소련 의존, 수십만 군인 사망, 북한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북한의 핵위협 직면 등이다. 마오쩌둥도 후에 6·25 전쟁 참전을 후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중국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 2013년 제12호에 따르면 마오는 1956년 9월 23일 베이징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의 회동에서 “조선전쟁(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7월 5일 다시 미코얀과 만났을 때도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 전쟁 개시 시기와 작전 계획을 고의로 감췄다. 중국은 피동적으로 연루됐다.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15년 6월 23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부주석 시절부터 줄곧 “중국군의 6·25 참전은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키신저는 한국 전쟁 최대의 패자는 스탈린이라며 다른 해석을 내놨다. 스탈린이 부추겼던 중미 관계의 간격두기는 중소 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중국이 티토주의로 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다. 전후 10년이 되지 않아 소련과 중국은 첫 번째 적수로 변한 반면 다시 10년이 지나기 전에 동맹 관계의 역전(미중 데탕트)이 이뤄졌다는 것이다.(키신저, 189쪽)하지만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다시 서방 세계와 나오기까지 치렀던 안팎에서 치렀던 댓가의 원인에 한국전 참전도 한 요인이라는 것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미 ‘제 2사단’과 한국의 오랜 인연미 육군 제2사단은 한국군 6사단 만큼이나 6·25 전쟁 중 영욕이 극명했던 사단이다. 참전 1년도 안돼 적에게 네 번 포위돼 참패와 설욕전을 주고 받았다. 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이라고 불릴 만큼 참패를 당했으나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했다. 이어 벙커고지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차 대전 당시인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 브루몽에서 창설됐고 2차 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사단 번호가 ‘2’인 것처럼 조기에 창설된 전통있는 부대다. 6·25 전쟁 때는 주둔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를 떠나 선도 부대가 1950년 7월 23일 부산에 상륙했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나고 있을 때였다. 미 제 2사단은 정예부대라는 이유로 맥아더가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회담을 할 때 맥아더가 “전황이 좋아지면 철수시켜 유럽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 부대다. 인디언이 부대기에 표시된 것처럼 별명이 ‘인디어 헤드’다. 2사단은 휴전 후인 1954년 9월 철수했다가 1965년 주둔지 교환으로 제1기병사단 대신 재배치됐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에 주둔해 있고 사단 본부도 한국에 있다. 한국전 당시 한국에 왔던 9개 사단 중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사단이다. 창설 이래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했고, 절반 이상을 한국에 있는 유일한 미군 부대다. 2018년 평택으로 사령부가 옮기기 전까지 휴전선 최전방에 배치돼 ‘인계 철선’ 역할을 해왔다.1976년 7월 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 2명도 2사단 장병이다. 2002년 6월 13일 여중생 두 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도 2사단 훈련 장갑차에 치인 것이다. 참고문헌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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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1950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인민군 복장으로 바꿔입은 6사단 20여명 특공수색대가 소련제 소형트럭을 타고 압록강을 향했다. 북한군 검문소를 만나면 104 탱크부대 소속 장교들이라고 속이고 통과했다. 고장(古場)에서는 북한군 소장 계급의 고사포여단장을 생포해 앞세우고 갔다. 압록강이 있는 초산에 도착한 뒤 주민들에게 국군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서 ‘국군 만세’를 외쳤다.(정일권, 209쪽)정일권 당시 육참총장이 후에 6사단장을 맡은 장도영 장군에게 들은 것이라며 소개한 압록강 첫 도달 장면이었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였다. 국군 6사단 7연대 장병들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경.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병사의 사진 한 장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상징했다. 그날 밤 장병들은 초산에서 밤을 지내며 ‘가거라 38선’ 등 노래를 불렀다. 6사단은 매년 ‘압록강 진격 기념식’도 갖는다. 하지만 ‘압록강 수통’의 기쁨은 다음날부터 참혹한 패전과 후퇴로 이어졌다. 중공군은 깊숙이 들어와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내달은 맥아더의 유엔군은 중국 만주폭격까지 고민했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꽁무니를 빼듯 후퇴해야 했다. ● ‘인천상륙 성공 여세 몰아 38선 돌파’“미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군 패망이지 단순히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다”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부터 이런 결의로 한국에 온 맥아더에게 서울 탈환 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김계동 132쪽). 맥아더와 많은 부분 견해를 달리했던 애치슨 국무장관도 1950년 8월 하순 상륙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을지 말지 논란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했다. 군대 움직임은 측량사가 설정한 선을 따라 진격하고 정지할 수 없으며 실제 군사 상황에 맞게 목표는 다시 설정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애치슨, 577쪽)미 합참은 서울 탈환 하루 전인 9월 27일 “‘38선 이북에서 지상작전을 해도 좋다. 단 어떤 부대도 중국과 소련 국경을 넘어서는 안된다. 한국군 이외의 군대를 만주 국경에 진격시켜서도 안된다”고 했다. 맥아더는 38선을 넘은 뒤 작전 반경에 많은 제한을 두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 이승만 “북진하라!” 국군에 친필 명령 “대한민국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라” 이승만은 1950년 9월 30일 부산 경무대에서 군 지휘관을 소집, 비록 작전지휘권은 7월 유엔군에 넘겼지만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는 친필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북진 논란에 “도둑을 쫓다가 울타리가 있으니 그만두라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정일권, 156쪽)김백일 1군단장은 10월 1일 오전 북진명령을 내렸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은 국군의 날로 정해졌다.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이 38선을 넘은 뒤 원산 입성을 두고 선두 경쟁을 벌여 10일 오전 거의 동시에 원산을 탈환했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낙동강 방어선에서 올라온 미 8군을 오산에서 랑데뷰한 미 10군단은 다시 인천을 통해 바다로 나가 한반도를 돌아 원산에 상륙하도록 했다. 미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은 멀리 남해안을 돌아온데다 원산 앞바다에 부설해 놓은 3천여기의 기뢰를 제거하느라 1주일 가량을 원산과 울릉도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다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전투없이 행정처리 하듯 상륙)’했다. 미군들은 원산 앞바다에서 요요작전을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러스, 38쪽) 미 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지 않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 10월 28일 이원에 상륙했다. ● 지형 고려 안한 북진 목표 ‘신 맥아더 라인’백선엽의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입성 경쟁을 벌였다. 차량을 이용한 미군이 하루 18km 진격한 반면, 1사단은 도보로 하루 25km를 올라가 10월 19일 정오 1사단이 먼저 평양 시내에 들어갔다. 백선엽은 당초 평양 진공 계획에 유엔군만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평양이 고향이다’며 밀번 미 1군단장을 설득해 평양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평양 진입 다음날 평양 북쪽 숙천, 순천 등에 미 187공수연대 4000여명을 투입하는 공수작전이 실시됐다. 하늘이 낙하산으로 시꺼멓게 덮였다. 퇴로를 차단한 뒤 포로와 납치 인사 구출, 도주하는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 포획 등이 작전 목표였다. 1만5천명으로 예상했던 북한군은 이미 청천강을 건너 38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김일성은 1주일 여 전 빠져나간 뒤였다. 공수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비행기를 타고 낙하 현장 상공에서 지켜봤다. 맥아더를 수행한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맥아더의 대담함과 용기, 작전의 시의적절함, 조직력, 행동 등 다시 한 번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10월 20일자 일기).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인파가 모인 평양시민환영대회에서 연설했다. 평양 점령 후 맥아더 사령관은 새로운 북진 목표로 가까운 곳은 압록강까지 60km 가량 남겨놓은 선천~성진을 잇는 ‘뉴 맥아더 라인’을 선포했다. 38선을 넘은 직후 제시한 정주~영원~함흥을 잇는 ‘맥아더 라인’보다 30~110km 위다. 문제는 지형 검토없이 북진 목표만 올린 것이다. 한반도 지형에서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의 방어 폭은 270km 가량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에 가까워지면 방어 폭은 765km로 3배 이상 길어진다.(백선엽 1권, 107쪽)● 전황 낙관과 오판 평양 탈환 이후 미 제1 기병사단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약 반납 지시도 있었다. 평양 탈환 사흘 후인 10월 22일 워커 사령관은 맥아더에게 “20일 이후 한국에 도착하는 탄약 수송선을 다시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105mm와 155mm 포탄을 심은 함선 6척을 하와이로 보내라고 했다. 미 2사단장은 10월 25일 참모 회의에서 “크리스마스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부 미군 장병들은 도쿄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귀국길에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핼버스탬, 34쪽).트루먼은 당시 맥아더가 얼마나 전황을 (터무니없이) 낙관했는지 기록없이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저항은 추수감사절까지 분쇄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다. 미 2개 사단과 유엔군 다른 부대들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한국에 주둔시키겠다. 빠르면 이듬해(1951년) 1월 총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트루먼, 342쪽). 낙동강 방어선에서 쫓겨 올라온 북한군은 아무런 저항을 못하고 중공군 참전이 확인되기 직전 ‘폭풍 전야’ 같은 시기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었다. ● 지휘권 2원화로 동서부 전선 ‘80km 빈틈’ “시속 125마일 속도로 상륙함대 쪽으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가 동쪽으로 비켜가 운명의 여신은 맥아더의 편이었다. 인천에서는 큰 행운이 있었지만 압록강으로의 진격이라는 불가능한 기회로 나아가게 됐다.”애치슨은 인천 상륙이후 맥아더의 ‘과속 북진’ 우려를 이렇게 나타냈다. 실제로 38선을 넘은 맥아더는 전략 전술 작전 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실책 혹은 아쉬움을 남기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특히 북진 작전 지휘권 2원화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서부전선은 워커의 미 8군 사령관, 동부전선은 상륙작전을 수행한 아몬드 소장의 10군단으로 나눴다. 10군단은 도쿄사령부 직속으로 두었다. 상륙작전을 반대한 워커에게서 10군단을 떼어내 지휘권을 둘로 나누고 북진 경쟁을 유도했다. 워커는 전선 시찰을 나온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같은 전선에 두 명의 지휘관이 있을 수 없다. 나를 택하든 아몬드를 택하든 하라”고 사실상 항명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12월 3일의 일이다.(정일권 143쪽). 미 10군단은 장진호 전투 이후 리지웨이가 8군 예하로 통합했다. 지휘가 2원화돼 동서부 전선에 약 80〜100km의 틈이 벌어졌다. 산악지대가 많은 북쪽 지형 때문에 통신도 안되는 등 서로 경쟁적으로 북진하던 8군과 10군단 사이에 소통이 안됐다. 애치슨은 “중간에 큰 공간이 생겨 측면이 적군에게 노출됐는데 도쿄 사령부는 30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수되는 정보를 기초로 조정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애치슨, 603쪽).심각한 것은 중공군 지도부가 이런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이징(北京)이 10월 21일 지원군사령부에 보낸 전보에서 “미국과 국군은 지원군(중공군 의미)이 참전하리라 생각을 못하고 감히 동서 두 길로 나뉘어 마음 놓고 전진하고 있다”며 전선 사이를 파고들어 적을 나누어 포위한 뒤 각개 격파할 좋은 기회라고 지시했다.(훙쉐즈, 80쪽) ● 정보부족, 위험신호 무시, 안일한 자세 평양 탈환 후 북진하던 제1기병사단 8연대의 허버트 밀러 중사는 운산에서 늙은 농부를 만났다. “중공군 수천 명이 있으며 상당수가 말을 타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농부를 대대까지 데려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공군과 아군의 첫 전투인 운산 전투(10월 25일〜11월 3일) 직전의 일이다.(핼버스탬, 37쪽).미군과 국군은 초산과 운산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대규모 참전 사실을 털어놓았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소홀히 취급하고 무시했다. 일개 병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도 한 이유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후 모습을 감췄는데 치고 빠지는 중공군의 전술을 알지 못한 것도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에 대한 오판에 영향을 주었다. 워싱턴 지도부도 중공군이 참전한다해도 압록강 연안의 수력 발전소 등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확보 목적이라고 봤다. 내전이 끝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유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북진했다는 비판에 대해 자신도 정보부재 속에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압록강 건너 중공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총력을 기울여 참전하기로 한 것인지 물어도 워싱턴은 회답이 없었다고 주장했다.(맥아더, 227쪽)● 맥아더, 중공에 대한 무지와 오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빛을 바래게 하는 맥아더의 잇단 중공군 대응 부실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먼저 무지와 오만이다. 워커 후임 8군 사령관 리지웨이나 마셜 장군 등은 중국 근무 경험이 있어 중공군에 대한 이해가 있었지만 맥아더는 한 번도 중국에 가보지 않았다. 필리핀 등에서 오래 머문 그의 머릿속 중국 대륙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어떤 방법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과신했다. 공습을 받으면 발이 묶이고 기동성이 떨어진 일본군과 달리 야간에 엄청난 속도로 기동하는 중공군은 상황이 달랐다. 이런 중공군에 대한 무지가 맥아더의 오판과 실수를 불렀다는 것이다.(핼버스탬, 567쪽).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대해 “거의 없다. 중국은 만주에 30만, 그중 압록강을 따라 10만〜12만 5천 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다. 그 중 5만 내지 6만 명 정도가 넘어올 수 있지만 그들은 공군이 없다. 밀고 내려오면 대살육이 벌어질 것이다”고 자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을 만났을 당시 중공군 2개 야전군(18개 사단)이 이미 만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중공군이 참전한다고 하면 미국내 반전 여론을 부추길 수 있고, 참전 가능성을 부인해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정일권, 223쪽) 하지만 맥아더는 후에 회고록에서 자신의 정보부가 만주와 압록강 연안에 대부대가 집결되어 있는 것은 파악했으나 그들의 저의는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맥아더, 214쪽). 이승만은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아직 한반도에 있을 때 중공군이 참전한 것이 다행이라고 봤다.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까지 했다. 철수한 뒤 참전했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다.(프란체스카, 11월 29일자)● 맥아더, 공군력 제한에 대한 불만 맥아더는 공군력 제한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가 적 병력의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변해 적이 아무리 괴롭혀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것은 문제라고 불만을 나타냈다.(맥아더, 218쪽)맥아더는 11월 7일자 전문에서 “작전 제한으로 한만국경을 넘나드는 적 공군기에 완전한 성역을 마련하여 주고 있다. 이래서는 아군의 사기와 전투능률에 미치는 영향은 중대하다” 고 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군사적 판단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군사적인 판단 이상의 것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회신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시아의 전쟁에 더욱 깊이 개입해 유럽에 눈을 돌릴 틈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 트루먼의 판단이었다.(트루먼, 354쪽)맥아더의 북진 실패에 대해 인천상륙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압록강에 도달하는 신속한 북진이 이뤄졌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의 한 명이 됐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38선 돌파를 머뭇거려 공군지원이나 포병 화력도 없는 농민군(중공군 지칭)에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것이다.(러스, 284쪽)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넘은 뒤 미군은 9일에야 넘었다. ● 맥아더의 북진과 후퇴에 대한 해명 “우리의 북진으로 적들은 시간이 어긋나서 예정보다 일찍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그 결과 봄까지 대병력을 집결시켜 일거에 우리를 괴멸시키려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북진하지 않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섬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규모 중공군 참전이 확인된 후 후퇴한 것에 대해 “중공군에 대항하려면 아군 병력을 적어도 3배로 늘려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속하게 후퇴해 적의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해 공격하기 쉽게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맥아더, 228쪽)미국의 핵무기 사용 논란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한 뒤 중국 동북 지방 등에 대한 핵무기 사용 여부가 논란이 됐다.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명령해 1950년 11월 24일부터 시작된 유엔군의 총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중국군의 남진이 계속되던 때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발언으로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그는 11월 3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기자들이 핵무기 사용도 고려중이냐고 묻자 “미국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 (active consideration)’를 항상 해왔으며 이러한 무기의 사용에 대한 권한은 전투사령관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핵무기 사용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한 듯한 인상을 줬다.(러스, 357쪽) 트루먼의 기자 회견 내용이 영국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영국 하원에서 애틀리 수상을 불러 따졌다. 애틀리 수상은 급히 워싱턴으로 날아와 12월 4일 트루먼을 만났다. 트루먼과 애틀리의 회담이 끝난 뒤 백악관은 황급히 해명성명을 내놨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미국이 보유한 모든 무기에 대해서 그 사용 가능성을 검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대통령만이 원자폭탄의 사용을 허가할 수 있고, 아직 그런 허가는 아무에게도 나간 일이 없다. 그런 허가가 있을 경우 현지 사령관은 그 무기의 전술적 운반책임을 지게 된다”고 밝혔다. 트루먼은 원자탄은 사용되지 않을 것이며, 동맹국과의 사전협의 없이는 미국이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이른바 중공군의 2차 대공세(1950년 11월 25일〜12월 10일)로 미 2사단이 군우리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퇴로가 막힌 동부 전선의 미 10군단은 흥남을 통해 해상 철수하는 등 중공군에 밀리는 상황에서 ‘핵무기 카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맥아더 뿐 아니라 미 행정부에서도 핵무기를 사용하면 중공군 참전으로 인해 빚어진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는 12월 24일 트루먼에게 핵무기 투하 지역을 망라한 리스트를 제출하면서 26개의 원자탄 투하를 권고했다. 여기에는 북한 뿐 아니라 만주의 중공군 및 북한군 보급선도 포함됐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핵무기는 아군에게도 피해를 주고, 정치적 파급효과도 크기 때문에 신중했고 결국 실행되지는 않았다.핵무기 사용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직전 다시 검토됐다. 공산측이 미국의 요구를 쉽게 수용하면서 협정에 조인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핵무기를 사용한 ‘대량보복 전략’을 구상하던 존 덜레스 국무장관이 제출하고 미 합참이 검토했다. 하지만 북한이 유엔군측의 휴전 협상 관련 내용을 대폭 수용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박태균, 233쪽) 마오쩌둥(毛澤東)은 미국이 설령 원자폭탄을 사용한다 해도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마오는 인도 네루 수상 앞에서 원자폭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중국 인구가 얼만데, 원자폭탄으로 모조리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죠. 누군가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대응해줄 겁니다. 1천만 명이나 2천만 명 정도의 인명 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요.”(핼버스탬, 540쪽)<참고문헌>김계동 지음,『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더글러스 맥아더 지음,『맥아더 회고록』, 일신서적, 1993. 딘 애치슨,『Present at the Creation』, Norton & Company Inc., 1969.마틴 러스 지음, 임상균 옮김, 『브레이크 아웃』, 나남, 2004.박태균 지음,『한국전쟁』, 책과 함께, 2005.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1권. 2020.윌리엄 T. 와이블러드 엮음, 문관현 등 옮김,『조지 E.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한국전쟁 일기』, 플래닛미디어, 2011. 정일권 지음,『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1968.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 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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