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이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없다” 철수만 3차례 고민한 미군[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28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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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경북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천 대첩’의 의미와 경과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기념관 외부에는 전투 체험시설도 마련됐다. 영천 = 구자룡 기자  
영천전투 호국기념관의 ‘영천의 위기’ 안내문. 왼쪽에 태평양의 사모아섬이 표시되어 있다. 전투에서 패배하면 한국 정부가 이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경북 영천의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2층 전시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섬 위치를 커다란 세계 지도 위에 표기해 놓은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부산까지 함락되면 한국군과 정부 인사 및 민간인 62만 명가량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신한국 창설 계획’을 미 합참이 영천 전투(9월 5〜13일) 전에 세웠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사모아 프로젝트’는 아군이 영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비밀 계획으로만 그치고 실행되지 않았다. 영천 전투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도 취소되지 않고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었다. 

6·25 전쟁 개전 이후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고 다시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밀고 내려온 뒤 ‘고지전’ 국면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미군은 최소 3차례 한반도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영천 전투 호국기념관’ 앞의 ‘호국의 불꽃’  조형물.  영천 = 구자룡 기자 


● “영천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포기한다” 
1950년 9월 8일.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결전’이라고도 불리는 영천 전투가 한창인 때였다.  대구 육군본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사무실로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찾아왔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의 극비 지시 사항이라며 영천을 적에게 넘겨주는 경우를 상정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철수 장소는 ‘아메리칸 군도’라고만 했다. 
정 총장이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 작전명)도 세워져 있는데 영천이 떨어지면 이 작전도 취소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워커는 “불가피한 일이죠”라고 대답했다. 당시 낙동강 전투 상황에 따라 인천상륙작전도 취소하고 미군은 철수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이다.(정일권, 85〜86쪽)

월튼 해리스 워커 미 8군 사령관.  낙동강 최후 방어선 ‘워커 라인’을 지켜내  6·25 전쟁에서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월튼 해리스 워커 미 8군 사령관.  낙동강 최후 방어선 ‘워커 라인’을 지켜내  6·25 전쟁에서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정 총장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이튿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가려면 가라고 하시오. 영천이 무너져 적군이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싸울 것이요”라고 반발했다.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영천 전투에서 두 번 뺏기고 두 번 빼앗는 전투 끝에 아군은 영천을 지켜냈다. 물론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워커는 “우리끼리 했던 얘기로 없던 걸로 합시다”고 말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신한국 계획은 미국이 6·25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1129일간의 전쟁’, 116쪽)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외부에 조성된 ‘염원의 마당’. 이름없는 참전용사들을 추모하며 경례하는 병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묘명용사의 묘비에는 반지, 안경 혹은 신발 한 짝 유품만이 새겨져 있어 전사자 시신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더한다. 영천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대구가 함락될 경우에 대비해 미군이 설정해 놓고 있던 ‘밀양 방어선’도 한반도 엑시트 전략의 중간 단계 격이었다. 밀양은 대구와 부산의 중간 길목.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대구를 점령하면 철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밀양 방어선은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미군이 마지막으로 북한군을 잠시 묶어두기 위해 설정한 ‘철수용 방어선’이었다. 상부 지시로 방어선을 설계한 미 8군 공병참모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슨 라인’이라고 불렸다. 이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는 제주도로, 한반도에 전개했던 미군은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이었다.(백선엽 2권, 234쪽)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옆에 건립된 영천 대첩비. 국군 8사단 이성가 사단장 지휘하에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하고 북진 반격의 첫발을 내딛게 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를 보면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후 전선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면서 미군 철수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의 군사전략이나 국익의 득실, 또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의 정략이라는 저울대 위에 남한 땅을 올려놓고 있다. 남한 땅을 포기하는 것이 자국의 복합적인 이익에 부합된다는 쪽으로 저울 바늘이 기울 때, 그들은 냉큼 부산까지 내려가 훌쩍 떠날 수도 있다.”(8월 1일 자)

8월 9일 이승만은 전시내각을 소집했는데 최악의 경우 정부는 제주도로 옮겨야겠지만 자신은 대구를 사수하겠다고 했다. 8월 14일에도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간 뒤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이승만이 발끈했다. 

무초 대사는 “남한 전체가 점령되면 망명정부를 (세워 대한민국을) 지속시켜 나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 위아래로 흔들며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요”라고 말했다.

8월 16일 밀양에 있던 영국군 장교는 “낙동강 전역에 걸쳐 사단급 병력의 적이 밀려오고 있다. 오늘 밤에는 더 많은 적이 도하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밀양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는 전문을 보냈다.(페렌바크, 221쪽)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전시된 리지웨이 사령관 사진.  양평 = 구자룡 기자 


● “중공군 강압에 의한 철군” 
두 번째 미군 철수 위기는 중공군이 참전해 유엔군이 북한에서 후퇴한 뒤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였다.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내려오기 4일 전인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군이 전략을 보강해 유엔군을 한국에서 축출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면 유엔군 철수 결정을 정부 차원에서 빨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합참은 이를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고 규정하고 트루먼의 재가를 받아 맥아더에 전달했다. 표현만 달리했지 ‘중공군 강압으로 철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 2사단이 평양 북쪽 군우리에서 한 개 연대 이상이 괴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이 밀물처럼 올라갔다가 썰물처럼 후퇴한 뒤였다. ‘성공적인 후퇴’라고는 하지만 동부전선의 제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봉쇄돼 흥남에서 해상탈출을 하고 있던 때였다. 흥남항구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항구를 떠난 것이 12월 24일이었다. 2차례 공세를 펼친 중공군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몰라 ‘중공군 포비아’가 커지던 때였다. 



● 맥아더 ‘대중(對中) 강공’ 제안
맥아더는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는 워싱턴의 패퇴 전략에 대해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으로 응수했다. 맥아더는 △중국 해안 봉쇄 △중국 내륙 공업시설을 해공군 폭격으로 파괴해 전쟁 수행 능력 해체 △대만 국민당 군대의 유엔군 지원 △대만군에게 중국 본토 견제공격 허용 등이다. 맥아더는 전략적 차원에서 유럽 안보에 우선을 두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시아에서 패배하면 결국 유럽의 패배로 이어질 것이라며 극동에 대한 우선적 지원을 강조했다.

합참은 도쿄에서 맥아더와 만나 ‘인력과 물자의 심대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을 재확인했다. 합참은 중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조치로 인해 일본이나 서유럽이 대규모 적대행위에 말려드는 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 결코 이롭지 못하다는 트루먼의 경고도 전달했다. 다만 유엔군이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은 군사적 필요에 의해 불가피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최악의 경우 한국의 망명정부를 제주도 등으로 옮기기로 했다.(김철수, 211쪽) 

워싱턴의 수세적인 방침과 달리 맥아더는 중국 폭격 등 확전론을 폈다. 워싱턴이 소련까지 개입할 수 있다며 우려를 제기한 것에 대해서는 “소련이 세계 전쟁도 불사할지는 동서 양 진영의 전투력과 능력을 소련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있다”라며 “감히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맥아더, 240쪽) 소련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해도 군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소련의 보급로는 시베리아 철도 하나뿐인데 공중에서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맥아더, “소련 참전하면 미 8군 일본으로 철수”
12월 23일 교통사고로 워커 8군 사령관이 사망했다. 맥아더가 26일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를 도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리지웨이는 소련군이 참전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맥아더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몇 개월이 걸려서라도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킬 것”이라고 대답했다. 소련 참전 가능성은 낮게 보지만 소련이 참전하면 3차 대전으로의 확전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지웨이는 자신이 부임했을 때 ‘철수’가 현안이어서 이승만 대통령과 처음 만났을 때도 해명해야 했다. 그는 “고령의 전사에게 내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기 위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첫 번째 과제였다”고 했다. 그래서 이승만을 만나 건넨 인사말이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였다고 소개했다.(리지웨이, 141쪽)>

리지웨이는 부임 후 중공군 기세에 눌리지 않고 ‘위력 수색’을 벌이며 반격 작전을 폈다. 당시에 널리 퍼진 한반도에서의 철수까지 고려하는 패배적인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1·4 후퇴 피란민 행렬. 개전 직후와는 달리 사전에 피란을 예고해 서울에서 납북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1·4 후퇴 피란민 행렬. 개전 직후와는 달리 사전에 피란을 예고해 서울에서 납북 피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 “12월 초에 이미 철수 피난 준비” 
프란체스카 여사의 12월 일기에도 철수에 대한 우려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오후에 챔프니 대령이 극비명령서를 받았다며 대통령 뵙기를 원했다. 미 8군사령부로부터 교사, 기술자, 의사 등 저명한 민간인과 가족의 명단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8군은 이미 8천5백 명의 가족을 선박으로 제주도에 피난시킬 준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12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군과 국무부가 한국 철수에 대해 약간 견해를 달리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전황이 나빠지면 일본으로 미군을 빼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군 수뇌들은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미군이 한국으로부터 명예롭게 철수하는 길을 고려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 국무부는 ‘강제로 물러나지 않는 한’ 한국으로부터 후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트루먼, 408쪽). 군이나 국무부 모두 한반도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 “금강 넘으면 100만 명 철수”
많은 6·25 전쟁 연구자들이 전쟁 중 한국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 즉 미군이 철수해 전쟁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때로 보는 것은 1·4 후퇴 이후다. 더 정확히는 1월 중순 중공군이 북위 37도선, 평택∼원주∼삼척까지 내려왔을 즈음이다. 

미 정부의 1월 12일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100만 명 제주도 철수 이동 계획’이 포함됐다. 유엔군은 일본으로 철수하고 한국 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장면 주미대사가 유엔군 철수 검토를 항의하자, 러스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미국은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알고 싶다”고 했다. 

미국 정부가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의 정부 관리 이외에도 군과 경찰을 제주도로 이전한다”고 되어 있다. 대략적인 인원은 행정부 관리와 그 가족 3만 6천명, 한국 육군 26만 명, 경찰 6만 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만 명 등 100만 명 가량이다.(김철수, 212쪽)

제주도가 용이하지 않으면 한국군을 일본으로 후송시키는 것은 한일 간 민족 문제로 비화될 수 있어 일본 본토가 아닌 오키나와 기지에 주둔시키는 방안을 검토했다. 무초 대사도 제주도 지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줄 것을 요청했다.(이상호, 321쪽)

이 계획은 한국군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극비로 하되 유엔군 방어선이 금강선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구체화하지 않기로 했다. 당시 전선에서 금강까지는 50km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공군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전면 중단을 선언한 뒤 속도 조절을 했다.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다행히 전선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아 철수 계획도 이행되지 않았다. 



● 트루먼과 맥아더의 ‘철수’ 공방   
전쟁 중 주요 현안을 두고 이견을 보이거나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기도 했던 트루먼과 맥아더는 미군 철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트루먼은 “부산교두보로 물러설 때까지 점차 전선을 축소하고 그다음에는 철수하는 것뿐이다는 것이 맥아더의 견해”라고 했다.(트루먼, 409쪽)

트루먼은 맥아더가 ‘유엔군이 오랜 싸움으로 지치고, 부당한 비판에 분격해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다면서 반대이유가 없으면 전술적으로 가능한 최대한의 속도로 한반도에서 철수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트루먼, 409쪽). 하지만 맥아더가 1월 10일 최대한 신속히 한반도로부터 철수하자고 제안한 것은 자신의 ‘4개항 대중 강경 방안’이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따른 것이었다. 대규모 중공군 개입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한국에서 철수하고 자신의 원래 기본적 임무인 일본 방위에 전념하겠다는 것이다.(이상호, 322쪽)

미 합참이 “중공군에 금강까지 밀리면 일본으로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철수 실행 여부는 자신에 맡긴 것을 두고 맥아더는 강하게 반발했다. 맥아더는 합참의 메시지는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의사는 없는 패배주의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의 구상은 반격이 아니라 무난하게 도망하는 것, 대만의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전세를 만회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회피를 택하려는 것이라고 했다.(맥아더, 245쪽)



● 극약을 지니고 있던 대통령 부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는 중공군 참전 이후 밀리는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총과 극약’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과 나는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으면서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대통령의 권총과 함께, 보다 확실한 천국행 티킷을 각자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원할 때 죽을 수 있는 무엇(극약)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무자비한 대량의 적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는 어떤 위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프란체스카 일기, 1951년 1월 1일)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더글러스 맥아더 지음, 『맥아더 회고록』, 1, 2권, 일신서적, 1993.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 지음, 최필영 윤상용 옮김, 『이런 전쟁』, 플래닛미디어, 2019.
이상호 지음, 『맥아더와 한국전쟁』, 푸른역사, 2012. 
이승만 구술, 프란체스카 지음, 조혜자 옮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기파랑, 2010.
정일권 지음, 『전쟁과 휴전- 6·25 비록 정일권 회고록』, 동아일보사, 1986.
해리 S. 트루먼 지음, 손세일 옮김, 『시련과 희망의 세월-트루먼 회고록』 하, 1968.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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