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 월드컵은 본선 티켓이 기존보다 16장 늘어나 역대 최다인 48개국이 참가하고 있다. 변방 취급을 받던 축구 약소국들도 넓어진 본선의 문을 통해 지구촌 축구 축제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모두가 환영한 건 아니다. 알렉산데르 체페린 유럽축구연맹 회장은 최근 한 콘퍼런스에서 “월드컵에 흥미롭지 않은 경기가 너무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 발언의 이면엔 ‘세계 축구 중심’인 유럽 국가들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싱겁게 승리하는 경기가 많아질 것이라는 냉소적 시선이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와 북중미 등의 13개국 축구협회는 체페린 회장의 발언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면서 “월드컵에 참가한다는 건 스포츠적 성취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을 냈다. 그리고 이 성명에 이름을 올린 카보베르데와 퀴라소는 유럽 국가를 상대한 월드컵 데뷔전에서 ‘언더도그의 반란’과 ‘승패를 초월한 낭만’이라는 월드컵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둥근 공에 정해진 결과는 없다
아프리카 대륙 서쪽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는 16일 미국 애틀랜타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승 후보’ 스페인과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 스페인의 승리 확률이 87.2%에 달한다는 인공지능(AI)의 예측과 무려 65계단의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차이(스페인 2위, 카보베르데 67위)를 무색하게 만든 대이변이었다. ‘공은 둥글다’는 말처럼 축구에 의외성이 없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반전이다. 영국 가디언은 “카보베르데가 불가능은 없다는 걸 보여줬다”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국내 팬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했던 카보베르데는 15세기 포르투갈에 의해 발견된 이래 500여 년간 식민지로 있다가 1975년 독립했다. 오랜 식민 지배와 반복된 가뭄으로 인해 해외에 터를 잡은 동포(약 150만 명)가 본토 인구(약 50만 명)보다 많은 나라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던 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적함대’ 스페인의 소나기 슈팅을 몸을 던져 막아낸 골키퍼 보지냐 등 ‘푸른 상어들’(카보베르데 대표팀의 애칭)은 월드컵을 통해 카보베르데라는 국가의 존재를 전 세계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페드루 브리투 카보베르데 감독은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회복력이 카보베르데의 참모습이라는 걸 증명했다”고 말했다.
결과를 초월한 소국의 축제
15일 미국 휴스턴 스타디움 전광판에는 ‘1-7’이라는 스코어가 찍혔다. 이 스코어는 축구계에선 상징적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4강전이 열린 브라질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개최국이자 대회 역대 최다(5회) 우승국 브라질이 독일에 무릎을 꿇은 경기의 스코어가 1-7이었다. 당시 충격에 빠진 브라질 관중들은 굵은 눈물을 흘렸다.
휴스턴 스타디움에서 열린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경기에서 7골을 넣고, 1골을 내주며 승리한 국가도 독일이다. 패자는 월드컵에 처음 참가한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퀴라소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관중석 풍경은 12년 전 브라질과는 완전히 달랐다. 퀴라소 팬들은 자국 선수들을 향해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전통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췄다. 그들에게 경기 결과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당시 경기장에 있었던 퀴라소인 미렐라 파쿤다는 FIFA 인터뷰에서 “70세가 되고서야 월드컵에 출전한 우리 대표팀을 현장에서 응원하겠다는 꿈을 이뤘다. 우리에겐 이 자리에 온 것 자체가 승리”라고 했다.
자국의 대패 앞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월드컵에서의 한 경기가 승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당당하게 싸운 선수들과 함께 월드컵 데뷔를 자축한 퀴라소 팬들은 약자의 위대한 도전과 순수한 환희가 공존하는 이 풍경이야말로 월드컵의 낭만이라는 걸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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