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12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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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동아일보 산하 화정평화재단은 정전(停戰) 70주년을 맞아 6·25 전쟁 3년을 재조명하는 기획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를 연재합니다. 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로 회고록과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통해 각국이 추구했던 목표의 허실을 조망하고 아울러 전국에 산재한 6·25 격전 현장을 찾아 당시 격전 상황도 재구성합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관람객들이 줄을 길게 서 있다. 북중 접경 도시 단둥을 보려온 관광객들이 기념관도 찾는다. 인원 제한을 위해 미리 등록을 받으며 관람료는 무료. 단둥 = 홍진환 기자
김일성과 박헌영이 1950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보낸 구구절절 참전을 요청하는 편지.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이 편지를 통해 중국은 북한에 “이런 요청을 받고 도와준 것을 잊지 말라”고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적들이 오늘 우리가 처한 엄중하고 위급한 형편을 이용하여 38도선을 침공하게 되는 때에는 우리 자체의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적군이 38도선 이북을 침공하게 될 때에는 약속한 바와 같이 중국 인민군의 직접 출동이 절대로 필요하게 됩니다.”

북한 신의주 압록강 건너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항미원조기념관에는 김일성과 박헌영이 연명으로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긴급 파병 요청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자다. 박헌영은 이 편지를 직접 들고 베이징(北京)으로 달려갔다. 이날 스탈린도 마오에게 참전을 강력히 요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물론 중공군의 참전이 김일성의 ‘구명 요청’ 편지 한 장으로 결정될 것은 아니었다. 여러 우여곡절과 마오 나름대로의 계산에 따라 이뤄졌다. 그럼에도 6·25 전쟁의 큰 흐름을 바꾼 중공군 개입의 분기점에 이 편지가 있다.

● 마오의 ‘파병 의지’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중국 지도부의 6·25 전쟁 참전 논의 장면. 중공군 참전은 한반도가 분단 상태로 머물고 있는 현실과도 무관치 않다. 따라서 참전을 결정한 이 장면을 보는 한국인의 심정은 불편하고 착잡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국은 6·25 발생 10여일 후인 7월 7일 동북변방군을 편성해 25만의 병력을 배치했다.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압록강을 넘은 파병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베이징(北京) 지도부내에 반대가 많았고 스탈린이 ‘항공 지원’을 해줄지도 변수였다.

1일 김일성의 편지와 스탈린의 전문을 받은 마오는 이튿날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했다. 마오는 참전을 주장했으나 다수가 반대해 마오는 “당분간 참전할 수 없다”는 뜻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그러면서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3일 파니카 주중 인도대사를 만나 “미군이 38선 넘으면 중국은 관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내부 전시관 초입에 있는 마오쩌둥과 펑더화이가 악수를 하는 대형 동상. 뒤로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돕고,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중공이 내세운 참전 명분이 적혀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마오의 전문을 받은 스탈린은 5일 “중소의 연합세력은 미국보다 강하다”며 참전을 독려했다. 중공이 참전을 머뭇거리면 북한에 파견한 소련 인원을 철수할 수도 있음을 내비치며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파병 의지가 있었던 마오가 꺼낸 카드는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지방에서 마오의 긴급한 부름을 받고 올라온 펑은 “미국은 호랑이다. 결국은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언제가 잡아야 한다면 빨리 잡는 것이 좋다”며 파병을 주장했다. 펑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에 지명되자 “설령 전쟁으로 우리 국토가 황폐해지더라도 국공내전 승리가 몇 년 지연됐다고 여기면 된다”고 했다. 8일 마오는 군에 참전 준비 명령을 내렸다. 이날 흑해 휴양지 소치에서 휴양중인 스탈린에게 저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를 보내 자신의 결심을 전달했다.

<1950년 10월 긴박했던 한달>
1일
3사단 23연대 38선 첫 돌파
맥아더, 김일성에 항복 요구
김일성 박헌영, 마오에 참전 지원 요청 편지
스탈린, 마오에 참전 독려 전문
2일
마오,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펑더화이 사령관 지명
7일
유엔, 유엔군 38선 북진 승인
8일
미군, 38선 돌파 북진
마오, 동북변방군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
10일
수도사단, 3사단 원산 입성
15일
트루먼-맥아더 웨이크섬 회담
16일
중공군 선발대 압록강 도강
김일성 평양 탈출
19일
중공군 본대 압록강 도하
1사단, 미 제1기병사단 평양 입성
20일
미군, 평양 이북 ‘공수 낙하’ 작전
22일
국군, 청천강변 도착
25일
1사단, 운산전투에서 중공군 첫 교전
26일
6사단, 자강도 초산 압록강 도착
이승만 원산 시민환영대회 연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30일
이승만, 평양시민환영대회 10만 인파 앞 연설

중국 단둥의 ‘끊어진 압록강 다리’위에 설치된 대형 석조 달력. 1950년 5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관)’ 펑더화이가 압록강 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항공 지원 거절’에도 ‘반기(反旗)’ 접은 마오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을 면담한 다음날인 10일 뜻밖의 소식이 마오에게 전해졌다. 스탈린과 저우언라이가 공동 명의로 “소련 공군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당분한 출동할 수 없다. 중소 모두 당분간 조선에 출병하지 않는다. 김일성에게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토록 할 것이다”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그러면서 “소련 공군 지원은 2개월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공군이 미미해 막강한 미군의 공군 화력에 제물이 되면서 파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스탈린은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정작 소련은 항공기 파견을 서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마오는 분노했다.(판초프, 547쪽)
마오는 12일 스탈린에게 북한에 파병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군에도 8일 명령을 철회했다. 스탈린에 대한 반기이자 ‘티토’ 유령이 나타난 격이었다. 그런데 마오는 하루 만에 파병으로 돌아서 꼬리를 내렸다. 마오는 “김일성이 동북에 망명정부를 세우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중국 단둥 기념관 내부에 걸린 깃발들. 북한에서 중공군의 참전에 감사한다며 중조 우의를 굳게 다지자는 내용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동북의 북한 망명정부’ 왜 마오의 아킬레스건인가
마오가 ‘동북의 조선 망명정부’를 막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도 참전하도록 결정하게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인 것은 무엇일까. 1월 소련과 맺은 동맹조약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중국 동북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면 전쟁은 동북 지방까지 확대된다. 그럴 경우 스탈린은 중소동맹조약에 따라 중공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십만의 소련 극동군을 동북에 파병할 근거를 갖게 된다.(선즈화, 485쪽)

스탈린은 5일 마오에게 참전을 독려하는 전보에서도 이러한 뜻을 밝혔다. 일본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소련은 일본과의 전투를 구실로 동북에 출병했다.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중국 주권을 훼손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6·25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돼 소련이 출병하면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장제스 정부 때처럼 소련군이 주둔하며 동북의 주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마오의 고민이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렇다고 ‘북한 동북 망명정부’가 들어섰는데 소련의 동북 출병을 거부하면 중소동맹조약도 난파될 우려가 있다. 마오가 신중국 건설에 필요한 군사 외교 경제적 지원은 어려워진다. 전쟁으로 미국과도 적대 관계가 된 상황에서 소련까지 돌아서면 공산당 정권도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선즈화, 488쪽)

동북에 군대를 보유한 북한 망명정부는 시도 때도 없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마오로서는 이것은 국경 너머에 미군이 주둔해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었다. 마오가 내부의 반대 의견과 스탈린이 항공 지원 약속도 받지 못했음에도 파병을 결정한 속사정 중의 하나다.(키신저, 182쪽)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이제 인민지원군이 도강해 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 출동 시기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스탈린과의 풍파가 일단락된 10월 18일 마오는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단호하게 이같은 파병 명령을 전달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항미원조기념탑’. 동쪽으로 압록강 너머 북한을 향하고 있다. 기념관 자리는 한반도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13병단의 포병 지휘소가 있던 곳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중공 참전의 다양한 이유들
마오의 한국전쟁 참전 이유 중에는 국공 내전 기간 받았던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빚을 갚는 것도 있다. 1946∼9년 2차 국공내전 기간 국민당 군대를 우회하는 두 개의 수송 및 보급로가 북한 지역을 지났다. 북한은 중공군의 전략적 후방 기지로도 활용됐다. 부상자와 부대원 가족 1만5000명이 피해 있었고 물자와 무기 장비도 제공받았다.

스탈린은 마오에 대해 “마치 빨간 껍질에 하얀 속살이 있는 순무와도 같다”며 ‘제2의 마셜 티토’라고 의심했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스탈린이 참전을 원할 때 참전해야 했다. 소련의 무기 도입으로 중국군을 현대화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에 도움을 받는 등 스탈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의혹 해소는 꼭 필요했다.(쑤이, 30쪽)

1949년 8월 장제스가 남한을 방문해 이승만과 반공 동맹을 도모한 것도 김일성을 돕기 위해 참전한 한 요인이다. 국민당군이 미군 지원 아래 한국에 공군기지를 건설한 뒤 중국 대륙 공중 폭격에 활용하려는 것을 마오는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쑤이, 55쪽)

중국은 북한이 38선을 넘은 이후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한 것을 보고 마오는 미국이 내정불간섭 원칙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마오의 필생의 과업인 중국 통일의 꿈을 수포로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키며 결의를 보였다.(선즈화, 481쪽)

중국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첨단 스텔스 전투기 젠-20 모형과 중국군 병사들. 베이징 = 홍진환 기자
중국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첨단 스텔스 전투기 젠-20 모형과 중국군 병사들. 베이징 = 홍진환 기자


● 소련은 중공군의 조기 파병 꺼렸다?
시기의 문제일 뿐 중공군의 파병은 예정된 것이었지만 왜 개전 후 4개월 가량 지난 시기에 파병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유엔군이 북진해서 산악지대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전 효과를 높일 시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웨이크섬 회담 때 중공군 참전에 부정적이라고 트루먼에게 얘기할 때도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했다면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올 때가 더 적기였는데 오지 않았다”고 했다. 히긴스는 “중공이 1950년 6월과 9월 사이 개입했다면 거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마오가 왜 미국이 화력이 증강될 때까지 기다렸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다.(히긴스, 232쪽).

소련이 중공의 조기 참전을 반기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다. 10월에는 스탈린이 마오에게 참전을 압박했으나 초기에는 오히려 파병을 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전쟁을 통해 노리는 목표와도 관련이 있다. 중공군이 참전한 뒤 전쟁이 쉽게 승리로 끝나면 적화 통일된 한반도에 대한 중공의 공(功)이 커서 소련의 영향력은 중국보다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미국과의 전투에서 힘이 빠지고 소련에 대한 의존이 커지게 하기 위해 마오를 참전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는 ‘스탈린 음모론’측의 주장이다.

초기와 달리 10월 스탈린이 마오에게 파병을 압박한 것은 유엔군이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 이후 38선을 넘어와 한반도 전체가 미국의 세력 범위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른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소련으로서도 중국의 출병은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선즈화, 414쪽). 중국이 조기에 참전해 승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스탈린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해 적대관계가 되게 하려는 스탈린의 목적은 달성됐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악수 사진. 단둥 = 홍진환 기자


● “중국 발전이 50년 후퇴해도 참전한다”
참전 결정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 전에도 중국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참전 의지를 밝혔다. 8월 4일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하더라도 최후까지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참전 방침을 정했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는 “조선은 중국의 이웃이다. 조선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참전 의사를 공개적으로는 처음 암시했다.

녜룽전( 聂荣臻) 중공군 참모총장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발전이 50년 이상 후퇴해도, 저항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미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며 참전 의지를 밝혔다. 녜룽전의 말처럼 참전 이후 중국은 약 30년간 국제사회 단절된 채 죽(竹)의 장막 너머에서 고립됐다. 스탈린이 중공군의 참전을 종용한 의도대로 미-중 관계는 적대적이 됐다. 중소간에도 분쟁이 계속됐다. 중공이 1979년 미중 수교까지 ‘30년의 고립과 쇠락’을 겪은데는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이 있었다.

6·25 전쟁에 대한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의 책략과 계산을 분석한 손튼 교수의 책.   ‘마오쩌둥만 왕따됐다’는 것이 결론이다.
6·25 전쟁에 대한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의 책략과 계산을 분석한 손튼 교수의 책. ‘마오쩌둥만 왕따됐다’는 것이 결론이다.


● 마오, ‘서방-소(蘇) 사이 양다리’, 결과는 ‘왕따’
마오는 2차 대전이후 세계 질서가 냉전으로 양극화하는 과정에서 소련과는 이념적인 동질성을 같이하면서 서구 국가와도 실리적인 관계를 맺는 ‘양다리 전략’을 구상했다. 국공 내전 시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와 유사하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 모두 중국을 상대국과 떼어 놓기 위해 고심했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까지 승인해 미중을 적대관계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대만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 전쟁이란 선수(先手)를 쳤다. 그러면서 중국이 너무 빨리 참전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둬 중국에게 공이 돌아가지 않도록 고심했다.

6·25 전쟁에서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적대관계가 됐다. 서구 사회로부터는 죽의 장막으로 단절돼 투자와 개발 과정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다.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서구와 다시 손을 잡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퇴보를 면치 못했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참가한 댓가로 마오쩌둥만 ‘왕따’가 됐다는 것이 손튼 교수의 시각이다.(손튼, 535쪽)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전시된 중공군과 북한 인민군 병사 조각상. ‘어깨를 나란히 한 작전’이라고 밑에 쓰여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 마오와 스탈린 누가 패자(敗者)인가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의 한 대학 교수가 2023년 5월 수업 중 “중국은 6·25 전쟁에서 하나를 얻고 아홉 개를 잃었다(一得九失·일득구실)”고 말해 누리꾼들이 항의했다. 이 교수가 언급한 9개의 ‘실(失)’ 중 미국과 대립 관계, 서방과 결별, 한국과 적대시 등 외부와의 고립이 3가지다. 대기근과 문화대혁명 유발은 중국의 퇴보를 불렀다고 했다. 이밖에 소련 의존, 수십만 군인 사망, 북한에 대한 통제력 상실과 북한의 핵위협 직면 등이다.

마오쩌둥도 후에 6·25 전쟁 참전을 후회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중국 잡지 염황춘추(炎黃春秋) 2013년 제12호에 따르면 마오는 1956년 9월 23일 베이징을 방문한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 부수상과의 회동에서 “조선전쟁(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듬해 7월 5일 다시 미코얀과 만났을 때도 “스탈린과 김일성이 중국에 전쟁 개시 시기와 작전 계획을 고의로 감췄다. 중국은 피동적으로 연루됐다.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연합뉴스 2015년 6월 23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부주석 시절부터 줄곧 “중국군의 6·25 참전은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는 한국 전쟁 최대의 패자는 스탈린이라며 다른 해석을 내놨다. 스탈린이 부추겼던 중미 관계의 간격두기는 중소 관계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중국이 티토주의로 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는 이유다. 전후 10년이 되지 않아 소련과 중국은 첫 번째 적수로 변한 반면 다시 10년이 지나기 전에 동맹 관계의 역전(미중 데탕트)이 이뤄졌다는 것이다.(키신저, 189쪽)하지만 중국이 개혁 개방으로 다시 서방 세계와 나오기까지 치렀던 안팎에서 치렀던 댓가의 원인에 한국전 참전도 한 요인이라는 것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미 ‘제 2사단’과 한국의 오랜 인연
미 2사단 ‘인대언 부대’ 마크.
미 육군 제2사단은 한국군 6사단 만큼이나 6·25 전쟁 중 영욕이 극명했던 사단이다. 참전 1년도 안돼 적에게 네 번 포위돼 참패와 설욕전을 주고 받았다. 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이라고 불릴 만큼 참패를 당했으나 원주 전투와 지평리 전투에서 설욕했다. 이어 벙커고지 전투와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차 대전 당시인 1917년 10월 26일 프랑스 브루몽에서 창설됐고 2차 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사단 번호가 ‘2’인 것처럼 조기에 창설된 전통있는 부대다.

6·25 전쟁 때는 주둔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를 떠나 선도 부대가 1950년 7월 23일 부산에 상륙했다.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려나고 있을 때였다. 미 제 2사단은 정예부대라는 이유로 맥아더가 10월 15일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회담을 할 때 맥아더가 “전황이 좋아지면 철수시켜 유럽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언급한 부대다.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 2사단 참전비. ‘자유를 위하여 전사한 용사들을 위하여’라는 문구와 함께 1950년부터 한국에 주둔하고 있음을 표기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인디언이 부대기에 표시된 것처럼 별명이 ‘인디어 헤드’다. 2사단은 휴전 후인 1954년 9월 철수했다가 1965년 주둔지 교환으로 제1기병사단 대신 재배치됐다. 지금까지 줄곧 한국에 주둔해 있고 사단 본부도 한국에 있다. 한국전 당시 한국에 왔던 9개 사단 중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사단이다. 창설 이래 한국에 가장 오래 주둔했고, 절반 이상을 한국에 있는 유일한 미군 부대다. 2018년 평택으로 사령부가 옮기기 전까지 휴전선 최전방에 배치돼 ‘인계 철선’ 역할을 해왔다.

1976년 7월 1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 2명도 2사단 장병이다. 2002년 6월 13일 여중생 두 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도 2사단 훈련 장갑차에 치인 것이다.

참고문헌
데이빗 쑤이(徐澤榮) 지음, 한국전략문제연구소 옮김. 『中國의 6·25 戰爭 參戰』, 한국전략문제연구소. 2011.
리처드 손튼 지음, 권영근 권율 옮김,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한국국방연구원, 2020.
마거릿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자유를 위한 희생』, 코러스, 2009.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 『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 『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헨리 키신저 지음, 권기대 옮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민음사, 2012.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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